이 땅에서 록음악을 한다는 것은 젊음의 한때를 소비하는, 여가의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음악시장에서 록음악은 결코 주류가 아니며, 록음악에서 다른 장르로의 이동은 음악적 변절로 여겨짐과 아울러 거의 가차없이 매도당한다.

따라서 록음악은, 정작 록음악이 그런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제목처럼 ‘정글’의 법칙에 지배당한다. 최근 발표된 강산에의 3집은 그 정글의 법칙에 살아남는 한가지 방법을 암시한다.

2년 여의 공백 끝에 발표된 이번 앨범의 이름은 ‘삐따기’. ‘삐딱하다’를 명사형으로 바꾸는 한편 의도적인 왜곡을 가해 ‘삐따기’라는 신조어를 만들면서 강산에가 의도하는 것은 자신의 자화상을 오롯이 그려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삐따기란?

머리카락은 긴 나머지 ‘자유로 휘날리는’ 정도이며,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성품과 그 한켠으로는 ‘길들여져 왔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싶은’ 욕망을 간직한 그 어떤 인물이다. 그 삐따기는 남과 자신의 다름을 순간순간 낯설어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내가 만든 삐따기’라는 존재선언을 이끌어낸다.

그 선언은 즉자적이라기 보다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점검을 거친 대타적 선언이라는 점에서 막연한 감상과 유치함 따위를 넘어선다. 보라. ‘보인다고 그게 다 보이는게 아니야, 들린다고 듣는게 아니야’. 쉽게 들리고 읽히지만, 정작 말하고 노래하기에는 어려운 대목이다.

다시 한번. 이 땅에서 록음악을 한다는 것은, 강산에에 이르러 자아의 존재선언을 얻게된 셈이다. 이제 록음악은 편안한가? 아직. 강산에의 이 대타적 선언에는 공감이 필요하다. 열광하라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많은 ‘삐따기’가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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