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기자생활이 26년째인 <월간조선> 조갑제부장은 한국언론계에서 돋보이는 존재다. 후일 한국언론사를 쓰는 학자는 그에 대해 적잖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왜? 그는 발로 뛰는 기자 정신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의 역사관이나 정치관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이념과 정치적 성향의 배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사람은 능력에서는 차이가 크지만 도덕성에선 다 비슷한 존재다”라는 그의 명언이 모든 것을 다 말해줄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의 명언 자체엔 동의하지만 그래도 도토리 키재기식이나마 도덕성을 따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기자의 진정한 명예

조 부장의 그런 신념은 오직 자기 일에만 미친 오랜 기자생활의 함정일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사람은 다 같다. 아니 같은 정도가 아니다. 사회적인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이 개인적으론 훨씬 더 매력적인 경우가 많으며 사회적인 평판이 좋은 사람이 개인적으론 졸렬하고 이기적인 경우가 많다.

사실 그걸 매일 경험하는 기자들이 대체적으로 매사에 냉소적일 수밖에 없는 건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의 지식인관도 독특하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집단은 기업인, 과대평가된 집단은 교수다”고 말한다. 그는 위악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지식인들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위선을 혐오한다. 그가 박정희·전두환·김영삼·김대중을 같은 부류로 다루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조 부장은 매우 겸손하다. 그는 부산에 있었던 국제신보에 수습기자로 들어가 선배 기자로부터 받은 가르침 하나를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한다. “기자는 사람을 차별해선 안된다. 시청을 출입하는 기자라면 시장을 대하는 태도와 시청 수위를 대하는 태도가 같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본론은 바로 이거다. 기자가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하면 기자 정신이 설 땅이 없다. 주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을 취재 대상으로 삼는 가운데 자신도 그 반열에 속하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그 반열에 속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는 그 순간 기자의 비극은 시작된다.

자꾸 회전의자와 운전기사가 딸린 전용 승용차가 눈에 아른거린다. 그렇게 되면 발로 뛰는 취재는 끝나는 거다. 요즘과 같은 정보사회에 무슨 발로 뛰는 취재냐고 허튼 소리를 해대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 기자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중의 하나는 조로증이다. 조루가 아니라 조로란 말이다. 너무 빨리 늙는다. 흰 머리칼 날리며 취재현장을 뛰는 기자가 거의 없다. 이건 의외로 매우 심각한 문제다. 그런 현실이 기자를 지망하는 언론학도들에게, 수습기자들에게 무슨 생각을 심어 주겠는가?

요즘 일부 신문사가 도입하고 있는 대기자 제도도 외부 인사를 영입하는 식이라 진정한 의미의 대기자 제도와는 거리가 멀다. 대기자 제도는 의식의 문제고 문화의 문제이기 때문에 제대로 정착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대기자라 할 조 부장의 역할이 돋보이는 것이다.

보다 많은 ‘조갑제’를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학계가 반성해야 한다. 과감하게 대기자를 교수로 영입해야 한다. 기자로 일하다 교수가 되는 것이 정관계로 진출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명예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면 누가 대기자가 되는 걸 3D 업종으로 멸시하겠는가?


기자양성 특수대학?

대학들이 그런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언론인들에게 해외 연수니 뭐니 하는 혜택을 주는 기존의 모든 언론재단들이 그 돈을 차라리 기자를 양성하는 특수대학을 하나 만드는 데에 출연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때마침 교육부도 ‘대학설립 운영규정’을 고쳐 대학 설립의 문턱을 크게 낮추지 않았는가. 물론 언론재단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려고 하겠지만, 일단 주장은 해보잔 말이다.

나는 대기자 조 부장의 역사관과 정치관에 대해선 계속 비판을 하는 입장에 서겠지만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그의 투철한 기자 정신에 대해선 나 역시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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