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17일 밤 9시54분. KBS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사가 났다. 그리고 다음 날인 9월18일 오후 KBS 신관 4층 탐사보도팀, 팀원 중 6명이 새로 발령받은 부서로 짐을 옮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이미 일부를 옮긴 친구들도 있고 먼 곳으로 가는 선배는 천천히 박스에 그동안 쌓아놓은 삶의 흔적들을 주어 담고 있었다. 밤을 새가며 눈을 부비며 뒤지던 각종 자료들이 웬만한 이삿짐 크기는 돼보였고 프로그램으로 출고되지 못한 각종 아이템 뭉치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들어 갈 박스를 기다리고 있다.

팀이 없어지는 건지, 팀을 새로 만드는 건지 비워져가는 여섯 개의 책상이 휑하다. 짐을 싸다 말고 문득 사진을 찍어 남기면 어떨까 싶다. 다들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다. “자. 웃으시고.” “앞에 박스들 잘 나오냐.” 웃음같지 않은 웃음이 계속된다. “이거 진짜 폭탄 맞은 분위기야.” ‘보복인사’, ‘학살인사’, ‘홀로코스트 인사’는 내게 이렇게 다가왔다.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지만 ‘예상’과 ‘현실’이 주는 감정의 간극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교한 답을 요구하는 의문들이 머릿속에 맴돈다.

   
  ▲ 지난 18일 낮 12시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 소속 사원들이 서울 여의도 KBS 본관 2층 민주광장에 모여 전날 밤 이병순 사장이 기습적으로 한 보복성 인사에 대해 규탄 기자회견을 벌였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십 수년동안 KBS에서 밥벌이를 해왔지만 게시판에 인사발령이 뜨고 나서 집에서 전화로 연락을 받고 내가 인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는 처음이다. 부아를 삭히며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좀처럼 냉정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생각나는 한 가지. 인사의 대상이 되는 자들의 황당함 만큼 인사를 행하는 자들의 황망함도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황망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KBS의 인사권자임을 당당하게 내세운 이병순 사장은 “이번 인사로 KBS가 바뀌었음을 보여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구한테 보여주는 인사를 주문한 것일까? 설마 촛불을 든 시민은 아닐테고 전임사장 퇴진에 매진하신 000 전우회같은 단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사라고 하기에는 선을 심하게 넘어버렸다. 한나라당파 이사님들이 제청하고 MB로부터 임명장을 받아든 사장이 행한 이번 인사의 주요 시청자는 누구였을까? 한 축은 한나라당과 청와대였을 것이고 또 다른 한축은 25%짜리 정권을 지지해주는 기득권세력이었으리라. 그들의 기대가 이런 황망함을 가져왔으리라.

인사의 대상자가 된다는 사실은 언제나 그리 반가울 게 없는 일이다. 게시판에 이름이 오르고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짐을 싸고 풀고 주변정리를 하는 물리적 번거로움이 싫다. 이 싫음이 6인분이나 발생하고 말았다. 인사의 책임자라고 하는 KBS 보도본부장은 탐사보도팀의 대량인사에 대해 ‘프로그램에 자신의 이념을 표현한 죄’를 물었다고 했다.

사실 이 말이 제대로 된 근거를 갖고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사를 책임지고 했다는 분의 말이니 진정성을 아주 일부나마 인정해보자. 그렇다면 한 개인의 이념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이념이 프로그램에 어느 정도 표현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제 프로그램과 인사에 대한 평가기준이 한 개인의 이념과 이를 프로그램에 얼마나 반영하는가로 변한단 말인가? 나 모르는 사이에 ‘개인별 사상검증 토론회’가 열린 것인지, 초월적 통찰력을 가지신 것인지 경외스러울 뿐이다. 중세 마녀사냥의 재현인가?

신임사장은 물론 새로이 득세하신 분들이 애용하는 말들 중의 하나가 ‘편향’이다. 이번 인사의 배경도 ‘자신의 이념을 프로그램에 표현에 편향된 방송을 만든 죄’일 것이다. 그런데 이 ‘편향’은 누구의 편향인가? 누가 어떻게 ‘편향’되었다고 판단한 것인가? 우리 스스로 우리를 평가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용 써 봐도 ‘편향의 종범’도 못되는 처지지만 ‘편향’의 출처쯤은 알고 있다. ‘KBS의 편향’ ‘미디어포커스의 편향’ ‘쌈의 편향’을 줄기차게 외쳐대던 그들이 있지 않은가? ‘편향’을 외쳐대던 자들이 임명한 사장의 인사에서 ‘편향’은 그들의 ‘편향’일 뿐이다.

‘편향’을 극복하고 ‘KBS의 화합’을 외치던 사장의 인사는 KBS에 깊은 골을 남겨놓았다. 언제든 권력의 판단에 의해 사장과 집행기관은 집으로 가겠지만 이 깊은 골을 메우는 것은 또 남아있는 자의 몫이 돼버렸고 그 골만큼의 반목과 갈등이 지속될 것이다. 그 동안 쌓아 놓은 내부의 민주적 절차와 자율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저들의 ‘편향’과 ‘이념’의 잣대로 정치권력과 기득권세력의 눈과 귀를 위해 갖다 바친 KBS 인사. 이게 ‘공채출신사장시대’를 열었다는 KBS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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