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과의 동료 한 분이 안식년으로 독일에 가 있기 때문에 그걸 기화로 친구 몇 사람과 함께 보름 남짓 유럽을 돌고왔다. 대도시의 호텔에서 호텔로, 유명한 관광지에서 관광지로 옮겨다니는 여행이 비용만 많이 들고 실속이 없다는 걸 알았으므로 우리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학생들처럼 배낭을 메고 주로 기차와 전철을 탔고 웬만한 곳엔 걸어서 갔다.

물가가 비싼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쪽에서는 야간열차의 침대칸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약간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돌아와 생각하니 보고 배운게 많았다.

나는 아직 미국이란 데를 가보지 못했다. 일본에는 시골의 한적한 휴양지에서 겨우 이틀 지냈을 뿐이다. 그러니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문명을 주도하는 이 두 나라와 비교해서 유럽이 어떻다고 말할 자격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치체제의 측면에서는 일본이 미국을 쫓아가고 있고 우리 나라가 일본을 쫓아가고 있는 형국이므로, 우리 사회의 변화방향으로 미루어 미국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대강 유추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의 피상적 관찰에 의하면 유럽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고 있고 우리가 세계화의 이름으로 뒤쫓고 있는 변화의 흐름으로부터 얼마쯤 거리를 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물론 유럽이 자본주의 바깥에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각일 것이다. 실은 유럽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원산지요, 전지구적 근대세계의 발상지이다. 다만 미국이 자본주의의 발생·발전과정속에서 생성된, 역사적 뿌리를 갖지 않은 신사회임에 비하여 유럽은 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장구한 전(前)자본주의 시대의 수많은 역사적 축적을 지닌 구사회이다.

나는 9년전에도 독일에서 몇 달 산 적이 있는데, 그 9년 동안 우리 나라가 눈부시게 달라진 것에 비하면 유럽은 거의 변한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령, 우리 나라 길거리에서 흔히 눈에 띄는 풍경의 하나가 핸드폰을 귀에 대고 떠들어대며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보다 더 흔한 것은 요즘 고등학생들까지 차고 다니는 삐삐라는 물건일 것이다.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과시하는 지표적 풍경의 하나일 터인데, 그러나 나는 평소에 그런 사람들을 오히려 동정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가끔씩 아무런 얽매임 없이 거리를 산책하고 숲길을 걸을 자유가 없다면 삶의 기쁨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그런데 다행히도 유럽의 거리에서 나는 핸드폰에 대고 말하며 걷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물어보니 일부 젊은이들 사이에 핸드폰이 보급되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독일의 어느 가정에서 우리의 70년대식 다이얼 전화기가 그대로 쓰이고 있는 것도 보았다.

유럽이 여행자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재래식 교통체계이다. 미국·러시아·중국 같은 거대국가 아닌 중소국가들의 모임인 유럽에서 교통의 중심은 철도인 것 같았다. 수많은 도시들을 그물처럼 연결해서 정확하고 적절하게 실어다주는 편안한 철도가 있는데, 굳이 자동차를 끌고다닐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시내교통에서도 전차·버스·지하철들이 상호보완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교외 거주자가 아닌 한 자가용의 일상적 필요를 거의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든 나는 보름 동안 프랑크푸르트·코펜하겐·오슬로·스톡홀름·베를린·프라하·뭔헨·취리히의 어느 곳에서도 서울이나 부산에서와 같은 끔찍한 체증을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신기하고 의아스러웠던 것은 기차건 전철이건 승객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래 가지고서 어떻게 적자를 감당할까 하는 것이었다. 결국 내린 결론은 고소득자에게서 세금을 거두어 교통·환경·교육·의료등을 사회보장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국민적 복지를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세계화·정보화의 이름으로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그리하여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실직의 불안과 탈락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사회는 정녕 살만한 사회가 아니다. 오늘날 유럽의 안정과 복지가 수백년에 걸친 식민지침략이 바탕에 깔린 것이고 우리는 그 점에 대해 끊임없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 만을 지상의 가치로 알고 질주하는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반성이 있어야 되겠다고 새삼 느낀다.

끝으로 한마디, 신문도 방송도 안보고 안듣고 보름 넘게 지내다가 귀국해서 단 한가지 불편했던 것은 담배값이 오른 것을 몰라 실수했던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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