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무공해 방송을 자임해온 EBS가 최근 뜻하지 않은 풍파에 휘말려 진통을 겪고 있다.
EBS는 그동안 적은 제작비와 미비한 방송장비, 소규모 인력 등 열악한 환경에 시달려왔다. KBS 기준 64% 정도의 월급, 정해진 시간 이상은 쓰기 힘든 편집실, 심지어는 촬영장소가 부족해 건물 입구 소파나 식당에서도 촬영하는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도 좋은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자긍심 하나로 버텨온 것이다.

제작과 편집, 송출이 하나로 연결돼 있어야 하는데도 건물은 3개로 나눠져 있다. 여기도 부족해 ENG 카메라맨등 1백20여명이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공간에서 일하고 있다. 10억여원에 이르는 민감한 장비들이 눈, 비등 외부 기상상태에 노출돼 있는 형편이다.


장소 부족으로 소파·식당에서 촬영

그러나 이런 환경속에서도 질높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왔다. 자연다큐멘터리의 경우 타방송사들보다 나은 프로그램을 양산, 적지않은 성과를 거뒀으며 사회교양·교육 프로그램 분야에서도 ‘시네마 천국’, ‘인터넷 정보사냥’ 등 양질의 인기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면서 ‘과외방송’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명실공히 국민교육 방송으로 자리를 굳혀가려는 시점이었다.

이 와중에 교재출판업체 선정과정에서 일부 간부들이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일부 PD도 강사진 선정과정에서 돈을 받은 혐의가 있다는 내용이 연일 보도되면서 하루 아침에 진흙을 뒤집어쓴 꼴이 돼버렸다. 때맞춰 EBS 방송교재가 기준보다 1.7배 높은 가격으로 책정돼 있다는 감사원 감사결과는 EBS가 입시생들을 대상으로 잇속을 밝히고 있다는 인상마저 갖게했다.

EBS 직원들 역시 허탈감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편성부의 한 직원은 “아이들은 아버지가 돈을 별로 많이 벌어오지 못해도 EBS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척 자랑스러워했다”며 “그러나 이제 비리집단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속에서 도대체 무슨 낙으로 일을 하겠느냐”고 한탄했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몇몇 언론이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EBS 전체를 비리집단으로 보도하고 독자들이 이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면서 EBS 제작환경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며 “출연자들이 방송에 나갈 수 없다며 예고없이 안나와버려 녹화에 애를 먹은 경우도 있고 지방 촬영을 나간 EBS 차량을 사람들이 발로 걷어찬 일도 있다”며 개탄했다.

EBS 사원들은 문제가 확산되면서 비리 사건을 빚은 ‘구조’쪽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정부출연기관으로 국민 교육을 담당하는 EBS의 교재출판업체 선정과정과 교재가격 책정에 왜 상업성이 개입됐는가. EBS가 왜 더 많은 방송교재 판매를 위해 공개입찰을 하고 방송교재 가격을 국정교과서 이상으로 높여야 했는가.


정부지원금 감소, 교재 수입으로 지탱

그 배경에는 주무부처인 교육부와 재경원의 EBS 정책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90년, 공보처가 KBS로부터 EBS를 독립시킨 이후 정부출연기금이 전체 EBS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줄어들어왔다. 당시 예산의 60% 정도를 차지했던 정부출연기금이 97년에는 46% 정도로 감소했다.

이 때문에 방송제작비 확보를 위해 궁여지책으로 자체수입을 늘려왔고 그 주된 재원이 교재인세수입이었다. 이는 교육부가 장려해왔던 방법이기도 했다. EBS의 교재인세수입은 꾸준히 늘어 91년 당시 24억6천만원 규모에서 97년에는 80여억원으로 늘었다.

교육부의 EBS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는 속속 이어지고 있다. 90년 1일 7시간 30분이던 방송시간이 97년 1일 10시간 30분으로 늘어났지만 인력은 7년전 4백92명 그대로다. 계약직까지 포함했을 경우 50명이 늘었을 뿐이다. 교육부가 EBS의 정원을 정부 공무원 채용 기준에 맞춰 인력수급 계획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예산 ‘동결’은 더하다. 일단 ‘예산’이 책정되면 요지부동이다. EBS의 자체수입이 ‘예산’ 범위를 넘어서는 호조를 보일라치면 정부지원 예산 규모를 삭감, 균형을 맞춘다. 당초 책정예산이 실제 소요비용에 턱없이 모자란 형편에서 이같은 ‘균형예산 정책’은 EBS를 옥죄는 ‘족쇄’일 뿐이다.

위성 과외방송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광고방송을 허용함과 동시에 공익자금 지원을 중지키로 해 또다른 문제의 소지를 안겨주고 있다. 이같은 문제들은 교육부가 방송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 환경에 맞게 정책을 입안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로 나아가게 한다.

EBS 기조실의 한 관계자는 교육부의 EBS 정책과 관련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는 시늉이라도 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일단 정연춘 전원장과 허만윤 전부원장이 교재출판업체 선정과정에서 몇몇 업체들로부터 검은 돈을 챙긴 것으로 드러난 이상 EBS의 원장, 부원장 등 중요임원들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고 있는 교육부 역시 일정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공사화’만이 근본적 문제 해결책

EBS는 정부의 과외방송 정책에 의해 탄생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국민교육 방송으로 자리잡기 위한 노력들을 경주해 왔다. 80년 7월30일 과외문제 해결을 위해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국보위)의 교육개혁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EBS. 문교부와 KBS, 문공부, 교육개발원 등이 각각 방송내용, 송출, 제작, 예산, 정책등을 나눠 맡으면서 운영주체들간의 불협화음과 재원조달방법의 혼선은 오랫동안 EBS 운영 정상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결국 이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출연금, 방송수신료 등을 재원으로 하고 △교육부장관 제청하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사장을 둔 독립공사화 방안인 ‘교육방송공사법’이 89년 당시 집권당인 민정당 의원입법으로 국회에 제출됐으나 정부와 민정당이 태도를 돌변, 백지화됐다.

이번에도 방송사에 걸맞는 조직과 재원을 확보하지 못한채 교육부 산하기구로서 갖는 정부조직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EBS TV제작 1부 배인수 차장은 이와 관련 “결국 공사화만이 EBS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고 전제하고 “EBS가 재원마련을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이윤창출 사업을 벌이는 것은 교육방송 본연의 모습을 저버리게 되는 길”이라며 EBS의 발전방안을 위한 근본적인 논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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