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저항의 결과로 쟁취한 노동법과 안기부법 재론 국면이 최근 한보 및 ‘안보’사태 속에 파묻혀 좀처럼 피어나질 못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특히 황장엽 망명과 이한영 피격 사건을 기회로 아예 안기부 강화론을 들고 나올 기세다. 국민들도 불안하고 뒤숭숭한 나머지 자칫 이에 동조할 가능성이 없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안기부가 어떤 기관인가.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지 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안기부’하면 아무런 죄 없어도 공연히 주눅들고 무서운 것이 사실 아닌가. 물론 안기부가 간첩 색출과 국가 안보라는 본래의 기능에 처음부터 충실했던들 이렇듯 진기한 현상이 발생했을 리 없다. 아니, 현 정권이 안기부의 과거 불법비행에 대해 최소한의 청산작업만이라도 수행했더라도 이러한 사회심리에는 변화가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간신히 수사권의 일부축소만이 이뤄졌을 뿐이다. 그 결과 안기부는 여전히 공포와 외경의 대상으로 군림해왔다. 문민정부의 최대개혁으로 칭송되었던 안기부 수사권의 축소조치가 안기부의 일방적 ‘로비’ 아래 그토록 쉽게 원상회복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하겠지만 이땅의 거의 모든 언론매체들은 안기부가 실지회복을 선언하고 나서자 93년말에 수사권의 일부 축소를 환호하던 바로 그 입과 손으로 안기부의 수사권 부활 시도를 찬양, 고무하기에 바빴다. 심지어는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는 검사조사도 찍소리 한 번 못한 채 안기부가 자신의 권한을 빼았아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언필칭 개혁 안기부의 권세가 확고부동의 2대 권력중추인 언론과 검경의 권세를 간단히 압도해버릴 정도니 날치기 법안에 의해 자신의 권한이 더욱 강화된 것으로 믿는 오늘날의 ‘개악 안기부’가 얼마나 세도를 부릴지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안기부법의 재논의는 바로 이렇듯 안기부가 가일층 득세한 상황, 그것도 전례없이 강력한 북풍한파가 몰아치는 엄중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다. 더욱이 현재는 경제상황과 정치상황의 유례없는 불투명성까지 겹쳐 불가피하게 공포와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다. 하지만 공포나 불안에 매여있는 인간과 사회로부터는 아무런 선한 것과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공포와 불안에 굴복하여 인격의 깊은 근저로부터 비이성적이고 사악하게 타락할 것이지, 아니면 이성과 희망으로 결연히 맞서 각자의 존엄과 자유는 물론 우리 사회의 민주질서를 수호할 것인지 결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날치기 안기부법의 철회 여부를 결정짓는 벼랑끝 시점에 와있는 우리 모두는 이제 너나할 것없이 스스로가 과연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원하는지, 아니면 공포에 의한 지배를 원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그에 따라 실천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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