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에 대표적인 '칙릿 소설'로 소개되고 있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저>  
 
개똥녀, 와인과 포도, 스키, 빵나무는 이번 수능에 출제된 이색 문제들이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언론은 이색문제들을 재미거리로 소개했다.

애완견의 배설물을 다룬 언어영역 듣기평가 3번 문항의 지문은 학생들에게 최근 일어난 사회문제에 대한 해석을 요구했다. 와인과 포도나 빵나무 열매로 푸딩만들기는 지금 우리 사회에 번진 웰빙 열풍을 실감케 하는 문제였다.

지금 고2 수험생들은 아마도 내년 수능을 위해 남의 나라 신조어까지 외워야 할지 모르겠다. 최근 ‘브리짓 존스의 일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대중소설 ‘칙릿(Chick Lit)’이 신문 지상을 떠돌고 있다. 칙릿은 햇병아리 젊은 여성을 일컫는 미국의 속어 ‘Chick’와 문학을 뜻하는 ‘Literature’의 합성어다.

로렌 와이즈버거라는 미국 여자가 쓴 이 소설은 지난 5월 번역돼 소설부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 인기를 무기로 영화제작도 했다. 작가 자신이 패션잡지 보그의 편집장인 안나 윈투어의 비서로 생활했었다. 책 속에서 주인공은 편집장의 눈에 들기 위해 동료 대신 자신을 앞세우고, 동료가 당황해하는 모습에 미소 짓는다. 통속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소설의 인기는 너무 가벼워서 쉽게 읽힌다는 데 있다.

언론은 이런 류의 소설을 선전하기에 급급하다. 칙릿 소설을 마치 ‘성장소설’의 반열에까지 올려놓는 무수히 많은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칙릿’을 사용한 첫 일간지는 역시 조선일보다. 조선은 지난 8월5일자 10면(사회) 톱기사에서 ‘칙릿’을 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아가씨 소설’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섹스와 욕망 등의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 소설의 인기를 등에 업고 영화로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한 동명의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조선일보는 이들 칙릿 소설이 상반기 대박을 터뜨린 이유에 대해, 있어 보이기 위해 비싼 몽블랑 만년필을 쓰고, 취업과 결혼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성형수술도 당당하게 권장하고, 경제적 독립, 섹스, 욕망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20대 여성들의 감성을 잘 자극했다고 한다. 섹스를 많이 언급하면 여권(女權)이 신장되나. 이런 쓰레기 같은 문장을 기사랍시고 휘갈기고 있다.

동아일보는 지난 10일 29면에 패션잡지계가 주 무대였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모티브를 얻어 실제 패션잡지사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전면에 걸쳐 실었다. 매일경제는 지난 9일 36면에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칙릿’을 체험하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는 내용을 머리기사로 실었다.

지금도 서점에 가면 ‘서른살 경제학’ ‘스무살과 서른살’ ‘열정의 온도가 다르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는 식의 쓰레기 같은 책들이 난무한다. 기자들은 제 딸아이에게도 이런 책을 필독서라고 권할까.

요즘 출판계는 추천사 수준의 문학평론이 즐비한 가운데 사재기는 이미 옛날 얘기가 됐고,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스타 마케팅까지 가세했다. 이런 식의 기사로는 제2의, 제3의 정지영을 확대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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