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뉴스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대권에 대한 논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데도 이른바 고위층의 특별한 제동이 없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올 상반기중의 대권논의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뜻에 따라 방송은 묵시적인 충성을 철저히 지켜왔다.

그런데 요즘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방송이 앞다퉈 대권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권 논의를 앞당길 경우 국력을 낭비할 수 있다던 예전의 논리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 셈이다. 논리의 변경에 대한 해명은 한마디도 없다. MBC에 이어 KBS와 SBS도 각각 조만간 대권주자를 대상으로 토론회를 열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방송 3사는 매일 밤 주요 뉴스에서 대권경선구도를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놀라운 사건이 또 하나 있다.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후보 결정 과정을 방송 3사가 지난 19일 이례적으로 일제히 생중계했다. 그것도 아침 뉴스에 이어 저녁에는 35분동안 중계했다. 방송이 뒤늦게나마 정도를 되찾아 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방송 3사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너무 갑작스런 반성과 함께 정도를 걷는다고 하니, 그 저의에 한 번쯤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방송 3사의 보도 방침이 바뀌게 된 데에는 일단 두가지 이유를 헤아려 봄 직하다. 먼저 현 정권의 권력누수 현상의 일면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방송 3사의 간부가 아직도 고위층의 심중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형편임을 고려해볼 때, 이 추측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TV의 대권 논의 보도가 고위층의 시나리오 가운데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한보사태의 파장을 김현철씨의 구속 정도로 마무리하고 현 정국의 돌파구를 찾아 보자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의혹이다. 대선 자금 정국을 조기에 차단하자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최근 방송 3사 사장이 김영삼 대통령을 면담한 이후 ‘국정의 표류’를 다루는 뉴스가 급부상했다는 지적이다. 5월 12일 의 경우, <정국 표류 국민염증>이라는 제목의 리포트에서, 실제 내용은 대선자금에 대한 여야의 공방인데도 앵커멘트는 “이런 공방에 대해 국민들은 분노하고 지겨워한다”고 돼있고, 제목도 내용과 전혀 맞지 않았다. MBC도 5월 15일 밤에 국정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두시간 이상 생방송 토론을 벌였으며, SBS 역시 일요일 아침에 비슷한 토론을 내보냈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아이템을 방송에서 다룰 수도 있다. 문제는 대선자금에 대해선 ‘정치권의 공방’ 차원에서만 취급하고, 변변한 기획 하나도 없었던 방송이 유별나게 국정을 걱정하면서 마치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겠다는 의지를 보인다는 것이다.

국민 여론조사에서 80% 이상이 대선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넘어가야 한다고 응답한 사실로 미뤄볼 때, 언론은 당연히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어야 했다. 특히 이 문제를 여야간의 공방 차원으로 몰고가 ‘정치권의 양비론’으로 교묘하게 포장해버린다면 그것은 직무유기에 다름아니다.

국민이 정작 지겨워하는 것은 핵심을 비켜가면서 날마다 정치권의 공방만을 되풀이해 보도하는 행태라는 점을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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