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또 다시 저격수로 나섰다. 5년전 제14대 대선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저격용 장총을 꺼내든 것이다.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실탄이 ‘이선실’에서 ‘오익제’로, 가늠자가 ‘안기부’에서 ‘공안당국의 관계자’ 또는 ‘여권의 관계자’로 명의변경 됐을 뿐이다.

미확인 첩보를 대서특필하면서 칼럼에선 진상 공개를 강한 목소리로 요구한다. 정치 일정보다 더 중한 국가 안위의 문제이기에 진상 공개는 당위의 명제라는 게 언론의 논법이다.

그러면서도 국가 안위를 책임지는 공안당국의 허술한 수사망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17년간이나 ‘암약’해 온 이선실의 존재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공안당국의 ‘무능’도, ‘황파일’에 올라있는 ‘간첩 혐의자’를 두눈 멀건히 뜨고 놓쳐버린 직무유기도 비판의 대상에 올려 놓지 않는다. 기껏해야 생색내기용으로 칼럼 한귀퉁이에서 한마디 하고 넘어갈 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변하지 않은 것은 ‘북풍 면역결핍증’이다. 중증을 넘어 불치에 가까운 이 증상은 세월이 흘러도 요지부동이다.

87년 대선 당시 비행기 폭파범 김현희가 돌연히 등장했을 때, 그리고 92년 총리급 간첩 이선실을 정점으로 하는 남조선 노동당 사건이 터져나왔을 때 언론은 예외없이 무조건 반사 작용을 내보였다.

96년 총선에서 장학로 비리사건으로 여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북한군이 이례적으로 비무장지대에서 무력시위를 벌일 때도 언론은 냄비마냥 들끓었다.

항체가 형성될만도 한 허다한 계기들이 있었음에도 언론의 ‘북풍 면역결핍증’은 고쳐지지 않았다. 비슷한 계기에 비슷한 ‘북풍’이 불어올라치면 ‘확성기’ 역할에 충실했다. 언론이야 말로 북풍의 ‘핵’이자 ‘바람잡이’였다.

변하지 않는 ‘북풍 면역결핍증’

그러기에 현재진행형인 오익제 보도의 향방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다. 과거완료형의 이선실 관련 보도와의 비교 속에서도 오익제 보도의 끝점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남조선 노동당 사건은 몇개의 마디로 나뉘어 보도됐다. 제14대 대선을 두달 앞둔 92년 10월 6일, 안기부가 총리급 간첩 이선실을 정점으로 하는 남조선 노동당 사건을 발표했을 때 이미 남조선 노동당은 정치권, 좀더 구체적으로는 민주당을 포위, 압박하고 있었다.

민중당 조통위원장인 손병선 씨가 북한 방송을 통해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밀어주라”는 지령을 받았다는 내용이 수사 발표내용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보다 앞선 9월 28일 김대중 민주당 대표의 개인비서라는 이근희씨가 남조선 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인 황인오의 동생 황인욱에게 국방자료를 건네준 등의 혐의로 구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남조선 노동당 사건은 대선 행보에 바쁜 민주당과 김대중 대표의 발길을 붙잡는 족쇄로 작용했다.

이렇게 그려진 밑그림은 10월 17일, 이근희씨의 부인 변상림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약국이 황인오 ‘일당’의 자료전달 장소로 이용된 경위를 조사받고 귀가했다는 안기부의 수사 발표로 다시 한번 증폭됐다.

남조선 노동당과 민주당을 연결하는 가교는 이후 이근희씨에서 정치인으로 승격됐다. 하지만 ‘팩트’가 없었다. 이전까지 안기부의 보도자료를 충실히 받아쓰던 언론은 이때부터 익명의 정보제공자의 장단에 맞춰 ‘춤추기’ 시작했다.

10월 23일, 이현우 안기부장이 국회 국정감사 답변에서 “이선실, 김낙중 등 간첩단이 정치권과 재야를 공작목표로 삼고 폭넓게 접촉한 사실이 확인돼 내사중에 있다”고 발언한 것을 시발점으로 언론은 정치인 접촉설을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 ‘공안당국’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했고 정치인 접촉설은 ‘손병선씨의 자술’이란 단서를 달고 현역의원 5명, 원외인사 4명 등 구체적인 수치까지 곁들여 그럴듯하게 포장됐다.

정치인 접촉설은 대선을 한달여 앞둔 11월 19일 김부겸 민주당 부대변인이 이선실로부터 돈을 받고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되면서 마무리 수순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부대변인의 구속 다음날인 11월 20일, 안기부가 “김부겸씨 이외의 정치인에게서 아직 국가보안법상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며 “따라서 간첩단 사건과 관련해서 현역 정치인을 당장 수사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익명의 정보원에 춤추는 보도

“접촉 정치인 내사중”이라고 밝힌 이현우 안기부장의 한달전 발언도, 현역의원 4명의 명단도 온데간데 없었다. 하지만 민주당은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김부대변인의 구속은 물론 언론이 “시중에 나도는 설”이라며 무작정 보도해 버린 김대중 대표의 이선실 접촉설 때문이었다.

12월로 접어들면서 언론의 ‘받아쓰기’ 보도는 ‘중계방송’ 보도로 바뀌었다. 안기부로부터 바통을 넘겨받은 민자당이 민주당 공격의 최전선에 나서면서 여야 공방이 격심해진 데 따른 결과였다.

언론의 중계방송 보도의 특징은 기계적 균형미를 살렸다는 점. 국민당을 포함한 여야 3당의 색깔론 공방을 산술적으로 ‘공정하게’ 보도했다. 여야 3당 의원들의 글을 나란히 게재하는가 하면 대변인을 비롯한 당직자들의 격렬한 ‘입싸움’을 전하는데도 균형의 미덕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같은 균형보도는 ‘대세’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생색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2개월여를 끌며 대서특필했던 남조선 노동당 관련 ‘첩보’들이 이미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될대로 각인돼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끝간 데 모르고 계속되던 언론의 색깔론 보도가 비로소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12월 16일 ‘초원복국집’ 사건이 터지면서부터였다.

‘북풍보도’ 이젠 자가발전

5년전의 ‘이선실’보도와 5년후의 ‘오익제’보도. 구별하기 쉽지 않은 ‘유사품’보도들이지만 한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5년전 언론의 ‘북풍보도’를 선도했던 공안당국이 이제는 언론의 과열보도 자제를 촉구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소설쓰기식 추측보도가 오익제씨 월북사건 수사나 남북관계에 하등 좋을 게 없다는 것이 공안당국의 주장이다.

공안당국의 이같은 주장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춘 것인지는 다른 각도에서 검토해 봐야 겠지만 한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이제 언론의 ‘북풍보도’는 외압과 눈치보기의 결과가 아니라 언론사 내부의 ‘자가발전’ 구조에 입각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