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해뗏목이 탐사 출발지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예인해줄 탐해호(170톤급)에 이끌려 거진항을 벗어나고 있다. 발해뗏목은 일정대로라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항을 떠나 인공의 동력 하나 없이 바람과 해류를 타고 약 한 달간 동해를 항해해 일본 니카타현에 도착한다. 항해 중간 당연한 우리 땅, 독도도 경유할 예정이다. ⓒ 오동명

“출감하는 기분입니다.”
발해뗏목탐사대, 방의천 대장이 장도에 오르며 낸 첫 마디다. 그의 표정엔 흥분과 더불어 분노도 섞여 있었다. 발해 뗏목탐사를 준비했던 시간은 무려 7년. 자료와 정보 수집에 시간을 거의 쏟았지만 7년이란 시간은 듣기에도 무척 길게 느껴진다.

카페를 처분한 돈으로 시작한 1차 탐사대

우선 자금문제다. 후원자가 나서질 않았다. 1998년 1차 탐사대의 경우도 비슷했다. 한결같이 뜻은 좋다면서도 말로만 후원하고 있었다. 지원하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후원금이 한 푼도 들어오지 않자 당시 대장은 자신의 전 재산인 전세금, 8000만 원으로 탐험을 시작했었다. 방의천 대장 역시 마찬가지다. 운영하던 충남 온양의 작은 카페를 처분한 그의 전 재산, 7500만 원으로 제2차 발해뗏목탐사에 들어갔다.

“1998년 탐사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에서 근해에서 좌초하긴 했지만 긴 여정의 탐험으로 보아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는 거거든요. 단지 모든 대원들의 죽음이 실패로만 보였던 겁니다. 이 슬픈 소식을 듣고 발해뗏목탐사를 이어갈 차례는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즉시 카페를 팔아 자금을 조달하여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로부터 7년의 세월이 흐른 거지요. 고인이 된 1차 탐사대의 정신을 이어 받았으니 저희를 2차 탐사대로 봐주십시오.”

상황은 1차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시대를 연다느니 동북아시아의 주역을 운운했지만 말뿐, 전혀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공허한 정치적 말장난에 불과했다. 더욱이 중국이 고구려를 중국의 역사 속에 넣으려는 수작을 공공연히 천명하고 고구려와 발해 문화유적발굴에 정부당국이 개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부나 정치, 그리고 언론마저도 우려만을 표명할 뿐 어떠한 구체적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인과 정부, 언론의 말 뿐인 지원

이 즈음에 1300년 전 우리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어 따라가고자 한 발해뗏목탐사라니 시의적절하고도 통쾌한 민족정신의 발현과 민족정기의 실천행동에 가슴이 다 후련했다. 하지만 탐사대장은 욕심이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세도가들이 후세를 위해 물려준 건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명맥을 이어온 민족의 저력은 바로 백성의 순수한 열정이었습니다. 우리들도 그 중 한 사람이면 이것으로 족합니다.”

다행히 1차 때와는 달리 SK텔레콤 등에서 후원금을 받게 돼 지지부진하던 탐사계획에 힘이 실렸다. 바로 뗏목 제작에 들어갔고 7년의 긴 준비과정은 한 달 만에 뗏목을 건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다른 문제가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허가나 협조 과정에서 관련 정부 부서와 해양경찰, 해군 등의 간섭 아닌 간섭이었다.

“우리 나라가 왜 더 넓은 땅으로 나가지 못했는지 알겠더라구요”

이유는 단 한 가지.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난색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뗏목제작에서 뿐만 아니라 출항막바지에 이르러서까지 하루에도 수십 통의 전화가 이들로부터 걸려왔다. 별 특별한 내용도 아닌데다가 직접 현장에 나와 점검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전화로만 통제하고 있었다. 일을 진행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때 최종 도착지인 일본 니카타현에선 오히려 도울 것이 없느냐고 수차례 물어왔다고 한다.

“같은 전화상이지만 들려오는 느낌이 있잖습니까? 우리 해양당국의 전화는 간섭으로만 들려왔고 일본의 경운 관심으로 들렸으니까요. 우리나라가 왜 더 넓은 땅으로 더 멀리 퍼져나가지 못했는가를 이번 일로 알겠더라고요. 이런 환경에서 탐험정신이나 개척의지를 감히 펴볼 수나 있겠느냐는 말이죠.”

다른 대원 역시 같은 말을 한다.
“우리나라에선 탐험은 미친 짓으로 봅니다. 할 일 없으니 하는 일쯤으로 여긴다 이 말이지요.”

방의천 대장의 출감하는 기분이란 이러한 우리의 구속,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함이리라.

“준비기간 7년 간 저는 발해뗏목탐사가 바다와의 싸움, 나 자신과의 싸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잘못된 관습과의 마찰을 견디어 나가는 인내의 연속이었더군요. 그 긴 속박을 벗어 던지고 이제야 비로소 떠나는가 봅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이번 탐사의 성공은 관료들의 구습을 타파하는 작은 출발점이라는 또 다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국보법 폐지와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바람 안고 출발

지난 10일 밤늦게 발해뗏목탐사의 출발지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향해 거진항을 떠났지만 뗏목 예인 과정의 문제점이 발견돼 출항 40분 만에 회항했다. 이 과정에서 파손된 뗏목을 수리하고 블라디보스톡까지의 수월한 예인을 위해 뗏목의 앞부분을 보강하느라 꼬박 이틀을 소비하고, 13일 낮 1시57분에 3m의 파고를 뚫고 예인선 탐해호에 이끌려 발해뗏목이 동해바다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뗏목엔 이번 탐사에 참가한 아직은 열악한 시민단체와 아직은 미약한 인터넷신문들의 작은 깃발들이 한데 모여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아직은 열악하고 아직은 미약한 이들의 작은 힘이 7년 긴 시간의 한숨과 좌절, 그리고 극복으로 단련된 당찬 의기의 호령소리를 내며 우리 바다 동해로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빨라야 한 달 후에나 다시 만날 방의천 대장이 지난 1월 26일 발해뗏목탐사대 발대식에 나와 한 짧은 한 마디가 또 들려오는 듯하다.

“발해뗏목은 여러분이 두 가지 약속을 해줘야 떠난다고 합니다. 하나는 국가보안법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떠날 수 있으며, 또 하나는 언론 사주의 소유지분제한이 관철되어야 떠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 발해뗏목탐사는 1300년 전 우리 조상의 생활을 단순히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지금 우리 땅에 팽배한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도전이다. 

   
오동명 작가는 1957년 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지냈다.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3년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직장을 그만 두고 변경했다. 1년에 한 권은 꼭 내겠다고.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

2000년엔 <당신기자 맞아> 증보판을, 2001년엔 <신문소 습격사건>을 냈고, 2002년엔 소설<바늘구멍사진기>, 2003년엔 사진취미 책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가 시중에 나와 있다. 2004년엔 여행책 <5만원 2박3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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