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 쉬프팅. 오래된 영어사전엔 따로 뜻풀이가 돼 있질 않은 걸 보니 신조어인 듯하다. 직역하면 ‘아래로 이동’, 즉 다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발버둥을 치는데 이와는 반대로 거꾸로 더 낮은 곳에서의 안주쯤으로 헤아려진다. 프랑스인들이 말하는 ‘변두리 사람들’도 이에 속한다.

‘슬로우, 슬로우’ 운동도 이에 해당된다. 주로 지역의 이동으로 나타난다. 도시에서 시골로의 자리 옮김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은 많지 않다. 하지만 다운 쉬프팅을 원하는 잠재적인 도시인들이 상당수 있는 걸로 안다. 이런다. 모든 것을 버리고 시골로 떠나는 이들을 보면 ‘용기가 대단하군’하곤 한다. 이 말은 역으로 용기가 없어 떠나지 못함으로 받아들여진다.

   
▲ 졸고 있는 모습, 우리 지하철의 풍경이다. 짧은 체험이긴 하지만, 일본과 프랑스의 지하철에선 우리처럼 졸고 있는 이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적어서일까? 핸드폰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부지런히 찍어대는 이들도 거의 보지 못했다. 첨단 핸드폰을 갖지 못해서일까? 그들 손엔 책이 많이 들려 있었다. ⓒ 오동명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의 향학열

지하철에서 초급 중국어 교재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노인 한 분을 우연히 보았다. “나를 찍는 거야?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거 그거 좋은 거 아닌데….”

몰래 사진을 찍으려다 걸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좋아보여서요.” 하며 머리를 긁었다. 이번엔 웃음으로 대답한다. 자리가 나자 앉아서도 책에 열중이다. 전철이 종로 3가역에 닿자 내렸다. 따라 나섰다.

“사업하세요?” 짐작하고 묻는 게 버릇이 되었나 보다. 중국으로 수출을 하는 중소기업의 사장이라서 중국어가 필요했겠구나 하는 추측은, 그러나 틀렸다.

“이 나이에?” 그는 공짜로 중국어를 가르쳐주는 곳이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중이라 했다. 그 어려운 중국어를 왜 배우냐고 물으려는 내 저의를 미리 알아차리고, “재미있어. 이 공부놀이 한지 1년쯤 되었거든. 아직 멀었지만 하오 티브이에서 하는 말이 종종 들려올 때가 있어.”

공부가 ‘놀이’라 하니 어렵지 않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종로3가면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들은 모여 있는 노인들이 먼저 생각나는 곳이다. 이래서 더 중국어로 공부놀이를 하고 있다는 나이 칠순의 노인이 신기했다. 갈아타기 위해 그는 종로 3가역에서 내렸다. 바삐 걷는 그를 쫓아가는 게 실례가 될 것 같아 고맙다 하고 또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려는데 내게 되레 묻는다.

“내가 왜 좋아 보이던가? 노인네가 책 들고 공부하고 있어서?” 초급 중국어 교재에 연필로 써놓은 그의 한자어 메모들이 떠올려졌다.

“추한 거지. 젊어서 해야 할 공부를 않고 이제야 책을 들고 있으니… 외워지지도 않는 걸 말일세.”

소극적 회피로 채울 수 없는 지적 포만감

그리고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바로 다운 쉬프팅이었다. 그 분에게선 오히려 업 쉬프팅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업 쉬프팅이란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훌쩍 떠나 시골에 처 박혀 살아봐?' 하던 충동의 일탈을 재워주기도 한 그에게선 몸담고 있는 곳에서의 충실을 보았고 처지(나이)에 안주하지 않는 업 쉬프팅을 볼 수가 있었다. 우연히 지하철에서 흘끗 지나치듯 그를 만나고 난 뒤 다운 쉬프팅은 소극적 회피로 간주해버렸다.

사실 도시를 떠나 시골서 마음 맞은 이들끼리 텃밭 갈며 조촐하게 모여 살아오던 공동체들이 몇 년도 안 돼 다시 도시로 기어들어 공동체마을은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소식들도 듣고 있던 터라, 역시 중요한 건 마음이지 장소 바꾸기 정도론 지금의 이 답답하고 산만한 정신이 해결될 게 아니라는 사실도 일깨워주었다. 그가 직접 썼을 한자어(영문 혼용) 메모가 다시 새록 눈앞에 아른거린다. ‘有備無患(유비무환), NO, 有備有福(유비유복)’

   
오동명 작가는 1957년 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지냈다.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3년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직장을 그만 두고 변경했다. 1년에 한 권은 꼭 내겠다고.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

2000년엔 <당신기자 맞아> 증보판을, 2001년엔 <신문소 습격사건>을 냈고, 2002년엔 소설<바늘구멍사진기>, 2003년엔 사진취미 책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가 시중에 나와 있다. 2004년엔 여행책 <5만원 2박3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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