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성신문. 사진=국립중앙박물관
▲ 황성신문. 사진=국립중앙박물관

1906년 2월28일 황성신문이 복간했다. 

황성신문은 대한제국 시기인 1989년 9월5일 남궁억, 나수연 등이 창간했고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주필로 활동했다. 

1905년 11월20일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계기로 정간당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이날에 목놓아 크게 운다’는 의미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완용·박제순·이지용·이근택·권중현) 등 친일파를 비판한 글이다. 이를 계기로 당시 사장 장지연을 비롯해 10여명 직원이 체포됐다. 

앞서 1904년 2월24일자엔 벽돌신문이 나왔다. 황성신문은 2면 ‘별론’이란 기사 내용 일부를 삭제 당했는데 이에 기사 내용 대신 활자를 뒤집어 인쇄하면 지면에는 글자가 아니라 검은 사각형이 나란히 인쇄된다. 이 모양이 벽돌처럼 생겨 ‘벽돌신문’이라 불렀다. 황성신문은 같은달 29일 삭제 경위를 밝혔는데 일제가 인쇄 직전 삭제 명령을 내려 벽돌신문을 냈어야 했다는 내용이다. 1905년 7월 이후에는 검열을 강화해 벽돌신문이 자주 발행됐다. 

▲ 일제강점기 언론탄압 흔적인 벽돌신문
▲ 일제강점기 언론탄압 흔적인 벽돌신문

정간됐던 황성신문은 1906년 2월28일 복간했지만 경영난을 겪다가 1910년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 이후 신문제호가 한성신문을 바뀌어 8월30일부터 발행되다가 같은해 9월14일(제3470호)까지 발행하고 폐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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