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견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도 노조를 만들어 감시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기자들의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애완견으로 보이더라도 기자는 감시견일 수밖에 없으며, 감시견일 때 기레기가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애완견이 된 감시견> 작품으로 제31회 전태일문학상 르포 부문 수상자가 된 박도제 전 기자는 작품의 내용을 이렇게 요약했다. 작품은 헤럴드경제 기자노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과정을 재구성했다.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 앞에서 박도제 전 기자가 포즈를 취한 모습. 헤이마켓사건은 1886년 발생한 사건으로,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 사진=박도제 전 기자.
▲미국 시카고 헤이마켓 앞에서 박도제 전 기자가 포즈를 취한 모습. 헤이마켓사건은 1886년 발생한 사건으로,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 사진=박도제 전 기자.

작품에는 언론사의 수익은 기업의 광고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선배 쪽팔려서 회사 못 다니겠어요. 오늘 기사도 작성하기 전인데, 출입처에서 해명 전화가 왔어요. 누군가 지면 계획을 넘긴 게 분명해요.”, “선배, 제 기사가 네이버에서 사라졌어요. 재벌 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입건됐다는 기사였어요.” 박 전 기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후배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쌓여갔고, 잠자리에서는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제대로 잠들 수 없었다.

우연인지 2016년 공인노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됐다. 2018년 1월 후배들과 함께 어렵게 기자 노조를 만들었다. 노조를 만들기 위해 저연차 기자들이 강당에 나가 성명을 낭독하는 일도 있었다. 보직자들은 노조 설립을 비판했고 정기총회 장소를 원천 봉쇄하려고 했다. 작품에는 이 과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당시 기자 노조를 만든 이유에 대해 박 전 기자는 “당시 사내에 일반직 중심의 노조가 있었지만, 관심사가 저널리즘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결국 정론직필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근로조건 향상에 나설 수 있는 기자 노조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어렵사리 노조를 만들었지만, 이듬해 2019년 5월 건설사가 대주주로 손바뀜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박 전 기자는 노조위원장이었다. 이후 사회부장 자리를 맡았지만, 지난해 5월 23년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캐나다로 떠났다. 박 전 기자는 현재 온타리오주 런던에 위치한 웨스턴 대학에서 식당 서버로 일하고 있다. 웨스턴 대학 노조 CUPE 2692 소속 노동자다. 박 전 기자의 수상 소식에 함께 일했던 기자 A씨는 “노조 만든 순간 행복했다. 선배의 수상 소식이 기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들었다. 고마우면서도 미안하고 복합적인 감정”이라고 말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8일 박 전 기자를 서면으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박도제 전 기자가 캐나다에 위치한 밴팅하우스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프레더릭 밴팅은 인슐린을 발견해 당뇨병 치료의 문을 연 사람이다. 사진=박도제 전 기자.
▲박도제 전 기자가 캐나다에 위치한 밴팅하우스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프레더릭 밴팅은 인슐린을 발견해 당뇨병 치료의 문을 연 사람이다. 사진=박도제 전 기자.

-20년 넘는 기자 생활을 끝맺음하고 캐나다로 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온타리오주 런던에 위치한 웨스턴 대학에서 식당 서버로 일하고 있어요. 공장 노동자, 언론 노동자에 이어 서비스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캐나다 태생의 사라, 인도에서 유학 온 제이, 방글라데시에서 온 티어링, 이탈리아 출신의 케이시 등과 함께 일합니다. 배경도 언어도 문화도 정말 다양해요. 너무 다양해 가끔 소통의 불편을 느끼지만, 가을 단풍처럼 서로 잘 어울리려고 노력합니다.”

-기자를 그만두고 캐나다에 간 이유가 뭔가요.

“건강, 교육, 가족, 정세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요. 기자 생활적인 측면에선 노조위원장 출신 데스크로서 한계를 좀 느꼈어요. 사회부장을 맡으며 편집국의 변화를 도모할 기획 기사를 추진하고, 저널리즘을 구현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기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문화부에서도 이렇다 할 변화의 모멘텀을 찾지 못했고요. 그럴 거면 역량 있는 후배들에게 얼른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다행히 노조 활동을 하면서 훌륭한 후배들을 많이 만났고요.”

-당시 내용을 르포로 쓰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기레기’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언론인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어요. 실시간 속보 경쟁에 기사가 부실해지고, 광고주 입김으로 기사가 사라지는 아픔 속에서도 희망을 찾기 위해 노조를 만들어 투쟁하는 모습을 글로 남기고 싶었지요. 먼 훗날 후배 기자들이 언론이 망가지는 상황에서 선배들은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면 몇 마디라도 할 말이 있어야 하잖아요. 자본이 아무리 애완견의 역할을 요구해도 언론인은 기본적으로 감시견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어요.”

-내용이 생생한데 당시 상황을 따로 기록해두었나요.

“많은 내용이 노보 등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대 노조위원장으로서 여러 모임에 참석하고 회사와 협상을 펼친 내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르포가 노조 설립을 하며 끝나는데 열린 결말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노조를 만들고 나서 더 힘든 일이 많았는데 저렇게 결말을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민주화 투쟁에 끝이 있을까요. 저널리즘을 구현하기 위한 투쟁도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언론사가 존재하는 한 핵심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될 수밖에 없지요. 노조 설립 이후 우여곡절은 내용이 많아 르포 한편에 다 담기가 어려웠어요. 시즌1의 1부가 전태일문학상에 제출된 것입니다. 노조 설립 이후의 우여곡절은 시간을 두고 차차 정리할까 합니다. 시즌2는 새로운 집행부를 꾸려 노조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후배들이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2018년 1월 헤럴드경제 기자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기자 노조가 왜 필요했고, 가족들이 어려워질 수 있음에도 노조를 만든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기자 노조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기자들은 기자협의회를 통해 목소리를 냈어요. 하지만 기자협의회가 상당 기간 경영진에 흔들리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지요. 임의단체의 한계인 동시에 법적단체인 노조의 필요성이기도 했어요. 당시 사내에 일반직 중심의 노조가 있었지만, 관심사가 저널리즘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결국 정론직필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근로조건 향상에 나설 수 있는 기자 노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기성세대에 많은 반성이 있었어요. 속보 경쟁 속에 오보를 낸 언론들도 마찬가지고요. 아이들의 희생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두 아이 아빠 거든요. 다행히 같은 생각을 하는 후배들이 있어 행동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노조를 만들 당시 저연차 기자들이 강당에서 성명을 낭독하는 일도 있었고, 보직자들은 노조를 만드는 걸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응원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는데요. 노조 만들기,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요.

“노조는 자주성과 민주성이 핵심 가치예요. 회사 경영진은 이런 자주성과 민주성을 싫어합니다. 노조가 자주적이면 조합원인 직원을 마음대로 부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언론사로 따지면 경영진의 각종 민원 요청을 노조 조합원인 기자들이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노조가 민주적이면 노조 간부는 경영진이 아닌 조합원을 위해 일하게 됩니다. 정론직필이라는 핵심 가치가 무너지는 상황에 침묵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회사는 노조 설립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기자가 불법과 편법에 내몰리는 상황을 막고 언론사가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 바로 노조입니다. 노조는 자동차의 브레이크에 비유할 수 있어요. 회사는 액셀을 밟아 빨리 가고 싶은데, 브레이크를 밟으면 빨리 갈 수 없잖아요.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세요.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어떻게 될까요. 도로 위의 흉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브레이크가 있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노동조합설립신고증을 받았을 땐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안도의 한숨이 먼저 나왔던 것 같아요. 이제 회사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더라도 노조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자존감도 높아졌어요. 회사의 반대에 맞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를 세웠다는 점에서 조합원과 함께 뭐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동시에 어깨도 무거워지더군요. 신생 노조로서 쟁취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르포에 담긴 내용은 여전히 많은 언론사에서 현재진행형인 문제들입니다. 노조가 없는 언론 구성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글쎄요. 모두 주어진 상황이 다르니 하나를 꼬집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저희는 노조규약 전문을 통해 이렇게 결의를 다졌어요. ‘우리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지 않으면 불합리한 상황은 끝없이 반복되고 지친 동료들은 계속해서 둥지를 떠날 것이다.’ 기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때 저널리즘은 구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조 설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2019년 5월 중흥그룹이 헤럴드를 인수했습니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던 것 같아요. 기존 대주주에 대한 실망이 컸던 만큼 새로운 대주주에 대한 기대도 많았어요. 하지만 건설 자본이라는 점에서 걱정도 많았어요.”

▲전라남도 광주에 위치한 중흥그룹 사옥. 사진=노컷뉴스.
▲전라남도 광주에 위치한 중흥그룹 사옥. 사진=노컷뉴스.

-기자들이 연차가 쌓이면 경제매체, 일간지, 인터넷매체, 방송사 등 너나 할 것 없이 기업에 광고 달라는 전화를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언론 왜 그래야 할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도와 빈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광고와 협찬에서 자유로운 언론사는 없을 것입니다. 언론도 산업인 까닭입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구성원들 월급을 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버는 방법입니다. 기자들에게 직무와 상충하는 역할을 요구해 돈을 버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광고주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하고요. 그런 구조와 이유로 기레기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돈을 버는 방법을 바꿔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본에 충실하는 방향으로 바꿔야 합니다. 편집국은 저널리즘에 충실한 기사와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고, 광고국은 다양한 마케팅 활동으로 매출을 올리며, 사업국은 신사업을 통해 매출을 다각화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편집국은 어떤 상황에도 저널리즘에 충실해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노조가 필요하며, 법과 제도의 뒷받침도 필요합니다.”

“이는 가장 기초적인 생각인 동시에 가장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유형 자산의 감소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언론사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론사와 기자의 무형자산은 늘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레기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요.”

-언론 환경이 엄혹해서 바로 서기 어려운 걸까요. 아니면 언론이 정론직필을 포기하고 있는 걸까요.

“이번에 수상한 르포 제목이 ‘애완견이 된 감시견’입니다. 애완견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도 노조를 만들어 감시견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기자들의 노력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애완견으로 보이더라도 기자는 감시견일 수밖에 없으며, 감시견일 때 기레기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과 같은 엄혹한 환경에선 기자들의 바로 서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정론직필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환경은 변할 수 있지만, 가치는 변할 수 없습니다. 기자는 애완견처럼 보일지라도 감시견의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김수영의 풀처럼 바람보다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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