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다루며 피해자에 대한 2차가해성 보도를 한 언론사들에 법원이 손해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언론사들이 상고 포기하면서 판결은 확정됐다. 문제 보도가 나온 지 5년 7개월 만이다.

서울고등법원 13민사부는 지난달 13일 안 전 지사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한 김지은씨가 연합뉴스와 일요서울 등 5개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김씨에 일부승소 판결했다. 법원은 연합뉴스(연합뉴스TV 포함)가 김씨에게 1500만 원을, 일요서울이 300만원을 손해배상하고 문제 보도 부분을 삭제하라고 판결했다.

연합뉴스(연합뉴스TV 포함)는 2018년 3~12월 15건의 보도에서 안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다루며 안 전 지사 수행비서로 일하는 김씨 모습이 찍힌 영상을 강조 편집해 자료화면으로 내보냈다. 과거 촬영된 영상 가운데 김씨가 공무 중인 안 전 지사를 수행하는 모습을 안 전 지사와 함께 확대한 뒤 빨간 동그라미를 합성하거나 타인을 흐림처리하는 방식으로 강조한 영상들이다. 김씨 측은 연합뉴스에 영상 삭제를 요구했으나 연합뉴스는 응하지 않았고, 김씨는 기사 삭제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연합뉴스는 재판에서 해당 영상이 공익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김씨가 방송에 얼굴을 밝히고 성폭력 피해를 폭로했으므로 자신 모습이 담긴 다른 영상 공개에도 동의한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국경없는 기자회가 지난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낸 “성차별의 저널리즘에 대한 대가(Sexism’s Toll on Journalism)” 보고서 페이지 갈무리
▲국경없는 기자회가 지난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낸 “성차별의 저널리즘에 대한 대가(Sexism’s Toll on Journalism)” 보고서 페이지 갈무리

재판부는 1심과 2심에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공인이 아닌 보호 대상’이라고 거듭 판단했다.

“김씨에 불필요한 관심 불러일으킨 보도, 2차피해 우려”

서울중앙지법은 1심에서 “원고(김씨)는 어디까지나 관련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라며 “성폭력 사건이 유력 대통령 선거 경선 후보이자 충남도지사인 안희정에 의한 것으로 공적인 사안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김씨는 그 수행비서 내지는 정무비서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김씨가) 안희정의 범죄나 도덕성과 관련한 검증에 관련된 인물이라 할 수는 있으나 원고 본인이 공적 인물의 지위를 취득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당 영상이 성폭력 사건과 관련이 없는 데다, 김씨가 해당 영상 공개에 동의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언론사가 성폭력 피해자의 2차 피해를 막을 의무를 진다고도 강조했다. 재판부는 “언론사는 피해자인 김씨에 대한 보도에 관하여 김씨가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함이 상당하다”며 “초상을 대외 공표하는 데에도 김씨의 명시적인 동의가 있거나 명백히 그 동의가 추단되는 경우에 한해야 하고 공표 범위도 최소한도에 그쳐야 한다”고 했다.

재판부는 연합뉴스가 김씨 얼굴에 각종 편집으로 강조한 점도 2차 피해를 유발할 우려가 크다고 했다. “(이들 사진과 영상은) 김씨 얼굴에 초점을 맞추거나 이를 확대, 강조”하고 있다며 “시청자에 해 김씨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김씨에 대한 2차 피해를 야기할 우려도 있다”고 했다. 특히 “일부는 김씨가 안희정과 밀접한 거리에서 그를 수행하는 내용인바, 마치 김씨와 안희정이 서로 친밀한 관계로서 김씨에게 마치 관련 성폭력 사건을 유발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인식될 우려도 있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도 1심 판결을 인용했다.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 30여명은 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미디어오늘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와 시민 30여명은 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드는 보통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미디어오늘

법원은 안 전 지사 측근의 김씨에 대한 명예훼손성 발언을 검증이나 반론 없이 보도한 언론에 대해선 일부만 손해배상 의무를 인정했다.

일요서울은 2018년 5월 안 전 지사 측근이자 전 수행비서인 어아무개씨의 ‘김씨가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을 전달하면서 “본지는 김지은씨 변호를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법무법인 온세상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지만 오히려 법무법인 측에서는 김씨 사건을 맡고 있지 않는다는 여성 직원의 답변이 돌아왔다”고 했다. 당시는 장윤정‧정혜선 변호사가 김씨의 공익 변호인단으로 사건을 수임한 사실이 언론에 알려져 있을 때다.

재판부는 “(일요신문의) 적시 사실은 허위”라며 “보도는 독자에게 마치 김씨가 관련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거짓말했을 수 있다는 인상까지도 심어주게 되는바, 김씨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가 침해됐음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했다.

[ 관련 기사 : 법원, ‘김지은 비방’ 2차 가해한 안희정 측근에 벌금 200만원 ]

재판부는 그 외 일요서울의 보도에 대한 김씨 측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요서울은 어아무개씨가 김씨의 평소 행동을 문제 삼거나 김씨가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는 발언을 보도했다. 일례로 김씨가 관사에서 성폭력이 발생했다고 주장한 적 없는 상황에서 어씨가 “청경에게 확인해본 결과 김씨가 25일 관사에 온 적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 어떻게 관사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인터뷰 등이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김씨가 관사에서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적시됐다고 볼 수 없다”며 명예훼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보도에도 △어씨 주장이 허위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허위라 하더라도 부수적이고 사소하다 △김씨에 대한 모욕이나 인신공격으로 보기 어렵다 등 이유로 명예훼손을 인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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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8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5회 한국여성대회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unsplash

민주원씨 페북 주장 따옴표 보도엔 인정 안돼 ‘인용일 뿐’

법원은 안 전 지사의 당시 배우자 민주원씨의 김씨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검증 없이 직접인용 보도한 언론사들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각 기사가 민주원의 주장이나 의견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고, 그 이하에는 민주원이 페이스북에 게시한 글의 전문을 그대로 게재했을 뿐”이라고 했다.

민주원씨는 2019년 안 전 지사가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김씨의 고발을 두고 ‘미투가 아니라 안 전 지사를 유혹한 불륜사건’이라고 주장했다.민씨는 이 과정에서 김씨가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던 개인 진료기록과 카카오톡 대화 기록 일부를 공개했다. 헤럴드경제(6건)와 머니투데이(2건), 아주경제(3건)가 제목에서 “김지은 거짓말” “미투가 아니라 불륜입니다” “그들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등 민씨 주장을 직접인용하면서 전문을 전했다.

언론사들과 김씨가 2심 판결에 상고하지 않으면서 선고가 확정됐다. 안 전 지사의 위력에 의한 간음, 강제추행 혐의가 유죄로 확정된 지 4년 만, 이번 손배소가 공익소송 일환으로 2021년 7월 시작된 지 2년 3개월여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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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21일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지사 직장 성폭력사건 2심 대응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김씨 명예훼손한 ‘따옴표저널리즘’, 누가 책임 지나

김씨를 대리한 권현정 변호사(법무법인 시완)은 이번 판결 의미를 두고 “김씨는 방송에 출연해 피해를 처음 알리고 기존에도 언론에 얼굴이 노출된 부분이 있었다. 연합뉴스는 이를 근거로 김씨가 ‘공인에 준하는 위치’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김씨와 같은 미투 당사자들이 공인에 의한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사인((私人)이며, 그에 한정해 언론에 나왔을 뿐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했다. 권 변호사는 “다만 인용 보도라도 명예훼손이 인정된 판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씨의 주장을 검증 없이 인용한 보도에 명예훼손이 인정되지 않은 점은 아쉬운 점”이라고 말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언론은 2심에서 유죄 판결이 나온 시점에서, 피고인의 배우자로 공신력을 인정할 수 없는 민씨의 일방 주장을 어떤 검증이나 반론도 없이 기사화했다. 재판부는 ‘누군가가 그 말을 했다’고 보도해서 문제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 ‘따옴표 기사’가 쏟아진 뒤 민씨 주장은 마치 언론의 검증을 거쳤다는 듯이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며 “언론사의 ‘따옴표 저널리즘’은 그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김지은씨는 2018년 3월 안 전 지사에 의한 성폭행을 공개 고발하면서 한국사회 미투(#metoo) 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대법원은 2019년 9월 안 전 지사에 도지사이자 유력 대권주자 지위를 이용해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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