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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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밀엠브레인, 입소스코리아, 칸타코리아, 케이스탯리서치, 한국갤럽, 한국리서치(가나다순) 등 국내 34곳 주요 여론조사회사가 가입한 한국조사협회가 ‘정치선거 전화 여론조사 기준’을 내놨다. 조사협회는 23일 보도자료를 내고 “정치선거 여론조사 신뢰성 논란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밝혔는데, 핵심은 ARS 조사 폐지다. 

조사협회는 “사람(조사원)이 진행하는 전화 면접조사만을 시행하며 ARS는 하지 않는다. 전화 면접조사와 ARS를 혼용하지도 않을 것”이라 예고하며 “불특정 다수에게 대량 전송해 녹음된 목소리 또는 기계음을 통해 조사하는 ARS는 과학적인 조사 방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통신 환경마저 훼손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이라고 밝혔다.

‘응답률’ 기준도 명시했다. 조사협회는 “응답률은 조사 과정 관리의 엄격성을 진단할 주요한 요건”이라며 “전국단위 조사에서 휴대전화 가상번호를 이용할 경우 최소 10% 이상, RDD(전화번호 임의걸기)를 이용할 경우 최소 7% 이상을 달성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또 “부재중이거나 통화 중인 조사대상자에게 3회 이상 재접촉을 시도겠다”고 했으며 “(조사업체는) 전화 면접조사 응답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언론‧정당 등이 조사협회 회원사의 노력에 협조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협회 발표에 일부 보수신문은 ‘ARS 퇴출’을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23일 사설 <가짜 뉴스 뺨치는 저질 여론조사 법적으로 규제해야>에서 “최근 민주당을 노골적으로 지지해온 방송인 김어준씨가 여론조사 회사를 만들어 등록하기도 했다”며 “유권자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선거 여론조사는 일부 협회의 자율 규제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정파성이 강한 저질 여론조사는 가짜 뉴스 못지않게 우리 사회를 좀먹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며 “적극적인 입법을 통해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를 빙자한 여론 조작은 더욱 기승부릴 것”이라 주장했다. 

정파적 인사가 여론조사업체를 만들 경우 이를 법으로 강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조선일보가 김어준씨가 대표인 여론조사업체 ‘여론조사꽃’을 두고 ‘정파성이 강한 저질 여론조사’로 겨냥한 점은 상징적이다. 앞서 ‘여론조사꽃’이 지난 9월20일~21일 실시한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여론조사는 진교훈 43.4%, 김태우 27.4%로 16%포인트 차였다. 조사방법은 무선 전화 면접 100%였다. 그리고 실제 두 사람의 득표율 격차는 17.1%포인트였다. ‘여론조사꽃’은 전화 면접과 ARS 조사를 병행하고 있다. 

문화일보는 같은 날 사설 <여론 조작 온상 된 저질 조사 퇴출할 입법도 시급하다>에서 조사협회 입장을 환영하며 “저질 여론조사를 퇴출하기 위한 입법이 시급하다. 언론의 협력도 절실하다.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조사는 보도하지 않는 등 보도 준칙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조사협회 회원사가 아닌 리얼미터, 리서치뷰 등 ARS 중심 조사업체 결과는 언론사들이 보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는 23일 유튜브채널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에 출연해 조사협회의 ‘ARS 퇴출’ 입장을 두고 ”정치적 의도보다 시장 논리가 더 크다. ARS의 등장 때문에 전화 면접조사 시장이 굉장히 위축됐다. 조사비는 많이 안 올랐는데 인건비가 많이 올라서 별로 마진이 없는 조사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되어 있는 여론조사기관은 88곳인데, 34곳 조사협회 회원사들은 주로 전화 면접조사를 중심으로 운영해왔다. 

여론조사전문가 박시영씨는 같은 날 같은 방송에서 ”안심번호가 도입된 이후 (신뢰성) 논쟁이 무의미해졌다. 선거조사 해보면 전화 면접이나 ARS나 안심번호로 하면 표집 문제가 없어서 접점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ARS를 겨냥한 보수신문 주장에 대해선 ”ARS 조사에서 민주당이 앞서는 조사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격차가 10%포인트 이상 벌어진 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총선에 영향을 줄 거라고 판단 한 것“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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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0대 총선에서 여론조사는 ‘참패’했다. 이후 여론조사업계는 2018년 안심번호를 도입해 21대 총선에서 본격 활용했다. 안심번호는 조사대상자의 실제 휴대전화 번호가 노출되지 않는 일회용 가상번호로, 조사업체에서 돈을 내고 성별·연령별·지역별 번호를 통신사에 요청하면 안심번호 형태로 제공받는 식이다. 이 같은 변화는 유선전화 중심의 방식이 갖고 있던 보수층 과대표집 우려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최근 조사에서 전화 면접보다 ARS에서 민주당이 더 높게 나오는 흐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최근 몇 년 사이 정당의 자체 선거 여론조사에서 ARS가 주류가 되었다. 안심번호가 등장했기 때문“이라며 ”ARS는 안심번호가 없었다면 도태되었을 테지만 안심번호로 양질의 표본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조사협회 주장에 대해선 ”ARS가 상대적으로 조사의 정교함이 떨어질 순 있지만 전화 면접조사도 완벽하지 않고 응답률이 떨어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대선 직전이던 1월1일부터 2월28일까지 두 달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된 20대 대통령선거 관련 여론조사는 283건에 달했다. 바야흐로 ‘여론조사 선거의 시대’다. 때문에 여론조사 방식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민감해졌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2022년 지방선거 전체 여론조사 중 ARS 비율은 77.7%였다. 때문에 조사협회의 ‘ARS 퇴출’ 입장은 적지 않은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향후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ARS 조사 결과를 보도하지 않거나 ‘가짜뉴스’로 규정할 가능성도 있다. 

‘ARS 퇴출’ 프레임은 경제적 여유가 없어 저렴하게 여론조사를 하고 싶은 소수정당이나 인터넷 언론사들의 선택지를 줄이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자본이 부족한 영세 여론조사업체는 문을 닫을 수도 있다. ‘떴다방’식 여론조사업체의 난립도 문제이지만, 대형 여론조사업체의 이해관계를 감안하지 않고 방식의 변화가 ‘신뢰성 강화’로만 보일 경우도 문제일 수 있다. 결국 여론조사업체 스스로 자신들의 조사 방법으로 정확성을 증명해야 하는 문제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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