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통의 피맛골이 사라지고 있다. 건물 크기로도 분양 액수로도 어마어마한 대형 오피스텔이 들어서는 공사로 600년 동안 이어져온 거리, 피맛골의 허리가 짤뚝 잘려져 나갔다. 포크크레인 몇 대로 600년 역사가 한순간에 파괴되고 있다.

피맛골은 행인을 지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우리의 옛 서민들의 지혜를 볼 수가 있어서다. 몇 안 되는 양반들의 행차에 일손을 다 놓고 그들에게 머리, 허리까지 조아려야 했던 다수 군중 백성들 속에는 이 사나운 꼴에 마음의 항의를 했던 누군가가 있었다. 그 꼴불견을 보지 않으면 되지 하고 등 돌려 골목통으로 들어간 누군가가 있었다.

민중의 저항의식이 스며있는 터

그곳엔 자연스럽게 먹을 곳들이 들어섰다. 피맛골의 자연발생적 출발을 연상해보면서 나는 감히 이곳을 우리나라의 첫 시민혁명지로 부른다. 그런 시민의 지혜가 담긴 터가 이젠 세상이 바뀌어 권력, 계급이 아닌 돈의 힘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아니 말살되고 있다.

프랑스엔 어느 지방도시나 골목들이 무수히 많다. 길게는 약 천년이 넘은 거리도 있다. 지방 도시들마다 신시가지도 함께 가지고 있지만 오랜 구 시가지를 찾아 외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구시가지는 여전히 그 도시의 중심으로 행세하고 대접 받고 있다. 새 건물을 들이면서 우리처럼 다 부수고 그 자리에 겉만 번지르한 괴물을 얹어 짓진 않았다.

과거는 현재의 발전과 함께 조화를 이뤄가고 있었다. 600년 역사를 가진 서울을 둘러보면 이 긴 역사는 결코 자랑거리가 되어주질 못한다. 600년이라고 해야 고작 임금이 묵었다는 고궁 몇 개뿐이다. 그나마 남은 피맛골까지 사라지고 나면 정말 자랑스러워야 할 고도는 부끄러운 파괴도시로 변모될 게 분명하다.

   
▲ 홍대 앞 거리미술전에서 만난 거리 체험. 유리예술가가 아니면 구경도 못할 재밋거리가 거리에 있었다. 가스불로 그 단단한 유리를 녹여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 꽃도 만들어내고 동물로도 주물려져 나온다. ⓒ 오동명


홍대 ‘프리마켓’의 때 묻지 않은 창작열

하지만 지난 토요일엔 재미있는 곳을 보았더랬다. 토요일마다 프리마켓이 열린다고 해서 실로 10여년 만에 홍대 앞을 찾아보았다. 20여 년 전 상업지로 변한 뒤 외면하고 살아왔었다. 홍대 정문 건너 길 안쪽의 작은 공터 같은 공원(홍익어린이공원)이었다. 비좁은 자리에 마련된 자유시장이라 복잡했지만 놓여진 물건 하나하나가 다 이채로웠다.

조잡하고 조악한 물건도 있었지만 그 속엔 개성이 담겨져 있어 유치해보여도 추잡해보이진 않았다. 만화 같은 초상화를 그려주는 데도 있었고, 자기만의 노트를 만들어주는 곳도 있었고, 흔한 모자에 흔한 핸드백에 결코 흔치 않은 그림을 그려주는 예술가도 있었다. 귀걸이도 가락지도 애써 모양을 낸 흔적을 볼 수가 있었다.

테이프 몇 장을 꺼내놓고 소비자를 기다리는 청년도 있었다. 자기가 직접 작곡하고 녹음한 음악이 담겨진 테이프를 파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른 살 동갑내기 부부가 쥐꼬리 재산을 다 털어 408일간 다녀왔다는 세계여행 사진들을 내놓고 외국여행 다녀오지 못한 많은 이들을 사진으로 흥분시키고 있었다.

이 프리마켓은 부담 없이 작품을 발표하고 교류할 수 있는 젊은 예술가들의 터요, 이들과의 만남의 장소라고 했다. ‘젊은’이란 단어 좀 빼주면 좋겠지만 어쨌든 열린 공간으로써 무척 흥미로웠고 참여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로 폭 빠져들게 했다.

운이 좋아서였는지 더 관심을 끈 곳은 프리마켓 길 건너 홍대 정문 앞에서 열리고 있는 거리미술전이었다. 그곳은 도자기뿐만 아니라 전문가 아니면 거의 만나 볼 수 없을 유리공예나 금속공예 등의 제작과정을 공짜로 볼 수가 있었고 2000원, 3000원의 적은 돈으로도 공예품 제작 과정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미대생들이 마련한 또 다른 프리마켓이었다. 프리마켓과 달리 일주일이란 한시적 자유시장이라서 더 아쉬움은 컸다.

볼거리, 먹을거리, 살거리가 넘치는 곳

3시간 남짓 홍대 앞을 둘러보고 나오는 골목길도 참으로 재미가 있었다. 일러스트 초상화가들의 거리 전시 및 즉석 그려주기라든가 스킬자수 전시가 그랬다. 전시장 주변으로 이어진 주막 같은 삼겹살 집들도 더 운치 있어 보였다. 방금 돌아 나온 골목길을 뒤돌아보니 문득 파리의 몽마르뜨르 언덕이 오버랩되었다. ‘우리 것이 더 훨씬 났네.’ 톡 튀어나온 첫 마디였다.

파리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전망이나 어마어마한 크기의 옛 성당, 백년 넘은 골목 안의 건물들, 몽마르뜨를 도는 버스, 케이블 카 등 주변 여건이야 파리의 것이 더 부러웠지만, 펼쳐놓은 각가지 볼 것들(작품들)은 홍대 앞이 더 다양했다. 먹거리인 주변의 식당들도 갖가지이고, 살거리인 옷가게, 장식가게 등이 무수하다. 거리 공연도 자주 열려 홍대 앞에 비해 몽마르뜨르는 오히려 단조로워 보일 지경이다.

이래서인지 외국인들도 눈에 많이 뜨였다. 중고 판 가게에서였다. 4명의 서양인이 중고 CD를 고르고 있었다. 40대로 보이는 이국 여자가 주인이 틀어놓은 곡이 담긴 테이프를 찾는다. 짧은 영어로 홍대를 찾는 이유를 물었다. 홍대 앞이 아주 재미있어 자주 나온단다. 한 곳에 있을 게 다 있어서 좋단다.

자기 나라(스페인)에선 홍대 앞처럼 다양한 것들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이 없단다. 이래서 한국에서 가장 볼거리는 이곳 홍대 앞이란다. 경복궁도 있고 남대문도 있고 이태원도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고개를 젓는다. 이러면서 하는 말, 그런데 너무 복잡하단다. 그리고 가짜가 많단다. 거리에서 리바이스 청바지라 해서 샀는데 그게 가짜였단다.

무질서와 상술로 망가질까 걱정

나와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이 좋은 우리의 문화 터가 상술에 의해 또 짓밟혀지고 있는 장면은 홍대 앞에서도 쉬이 목격할 수가 있다. 불현듯 1981년에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 81’이 떠올려졌다. ‘국풍 81’의 남은 기억이라곤 전국에서 모여든 포장마차들이다. 홍대 앞도 이와 비슷했다. 웬 액세서리 집이 그리도 많은지, 웬 옷 가게는 그리도 많은지,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상술이 잘 마련한 문화 터로 가는 길을 막아서고 있고 그런 치장물에만 눈이 휘둥그레져 모여드는 요상한 소비자들로 또 가는 길목이 체증되고 있었다. 짜증이 났다. 1981년 여의도에서 느낀 반감과 비슷했다.

우리는 참으로 아이디어가 풍부하다. 홍대 앞에의 프리마켓이 들어서고 거리미술전이 자발적으로 열린다. 그런데 멍석을 깔아놓으면 더 아이디어가 많은 상술이 끼어들어 판을 망쳐놓고 만다. 자유시장이니 아무나 참여할 수는 자유는 있겠지만 그 자유가 지나쳐 온갖 것들이 범벅으로 섞어 뭉그러지고 만다. 이러니 지속되질 않고 그 좋은 아이디어는 사라진다.

또 어딘가에서 펼쳐지지만 또 악순환은 계속된다. 소모적이고 일회성으로 끝맺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엔 100년 200년의 전통이나 이어져 내려오는 건물이 긴 역사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나마 남은 자투리 피맛골을 안주 삼아 골목길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곧 사라질 옛 곳, 것에 대한 향수를 미리 접수해둬야 할 것 같다.

‘발전이 말살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통일 또한 그 나머지의 파괴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서울 종로 피맛골에 앉아, 서울 홍대 앞에 서서 우리의 자긍심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더 큰 우리의 힘, 권력이든 돈이든 무력의 힘에 그저 무력해지는 내 모습도 함께 본다. 더 좋을 수 있는 우리나라건만, 아, 어쩌란 말이냐.  

   
오동명 작가는 1957년 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지냈다.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3년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직장을 그만 두고 변경했다. 1년에 한 권은 꼭 내겠다고.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

2000년엔 <당신기자 맞아> 증보판을, 2001년엔 <신문소 습격사건>을 냈고, 2002년엔 소설<바늘구멍사진기>, 2003년엔 사진취미 책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가 시중에 나와 있다. 2004년엔 여행책 <5만원 2박3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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