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을 취미로 시작한지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이것으로 직업을 얻고 난 뒤엔 취미를 잃었었다. 직장을 버리니 다시 취미를 얻었다. 간편한 디지털카메라로 요즘 사진을 찍곤 한다. 이 디카가 종종 나의 마음을 편케 해준다. 주는 대로 돌아오는 디카와 나는 대화를 종종 나눈다. ⓒ 오동명
왜 그리들 바쁜지. 사람들은 하는 일들이 많다. 나(디지털카메라)는 사진 찍는 일에만 전념하지만 그(주인: 필자)는 다른 일로도 무척 바쁜가 보다. 그가 바쁠 땐 나는 너무 한가해진다. 무척 심심하다. 나는 그의 책상 한 모퉁이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 한가하고 심심해지면서 나태해진다. 잠을 실컷 자 보지만 이것마저 지루하다.

그의 손이 그립다. 그가 나를 언제나 찾아주려나. 그 없인 나는 무용지물이다.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지만 내 유일한 친구에게 그럴 수는 없다. 사랑하는 그를 섬기려면 내가 우선 그를 이해해야 한다. 얼마나 바쁘면 돌보지 않고 나를 이대로 놔둘까.

그의 손길을 기다리며...

나에겐 늘 잘 해줘서 그는 화를 낼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화에 대고 버럭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닌가. "믿었던 사람들이 더 하네요. 거듭 약속을 어기고 미루기만 하면 어떡합니까! 이번엔 꼭 입금을 시켜주십시오. 허리 굽혀 부탁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다른 소립니까. 더 이상 거래하기가 힘들겠네요."

그의 아내가 그의 손을 잡는다. "프리랜서로 살기엔 너무나 힘든 세상이야. 이 땅에서 필요한 건 정말이지 정규직 아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합이라니까."

그의 팔이 아내의 어깨를 감싼다. "미안해. 주변머리도 없는 놈이 회사는 박차고 나와서···. 남들처럼 그냥 침묵하고 회사에 남아있다면 당신이 이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아내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기댄다. "고생은 무슨.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 어느 때 보다도 지금이 좋은 걸, 뭐. 내 걱정 말고 지금처럼 당신 소신껏 살아."

먹고살기 위해 본업을 놓아야 하는 그

그가 나를 잠시 놔두는 건 먹고살기 위한 방편을 찾아다닐 때다. 그가 이런 일로 힘들어 할 때 나는 그의 위안처가 되어주고 싶다. 그가 나로 인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면 좋겠다. 며칠 만이다.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그가 한숨을 푹 내쉰다. 또 속상한 일이 있나 보다. 그는 만년필을 꺼내 낙서도 하고 그림도 그린다. 밝게 웃는 얼굴을 낙서하듯 그린다.

'그림만 웃는 얼굴 그리지 말고 주인님도 웃어 봐!' 또 통했나 보다. 나를 집어 든다. 이제는 무언가를 찍는 게 아니라 내 몸에 저장된 여러 사진들을 하나하나 꺼내 본다. 그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내게도 그에게 해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

"그것 봐! 속상한 일이 있을수록 나를 더 찾아줘. 우린 좋은 친구잖아." 그가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사진은 자기다. 며칠 전 그의 아들이 찍었더랬다. 웃통을 다 벗고 있는 제 아빠에게 나를 들이댔다.

"아빠! 다 벗고 뭐해? 창피하지도 않아?" 아들에게 '찍으면 혼내 줄 거야' 하며 협박하는 그의 표정이 순간 내게 잡혔다. 그에게서 또 다른 면을 보는 순간 아들과 내가 합심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엄마, 아빠 봐. 괴짜 동물 같아!"

우리는 이 사진 한 장으로 껄껄걸 웃을 수가 있었다. "네 아빠가 가끔 저런 엉뚱한 데가 있으시단다. 그 사진 절대 없애지 마라. 엄마한테 무게만 잡으려 할 때 꼭 한번 써먹을 때가 있을 거다. 할아버지가 돼서 보면 더 재밌을 거구!" 그가 지워야 한다고 나를 잡아채려 했지만 그의 아들, 아내가 결코 빼앗길 리 없었다.

"아빠! 증거 인멸은 치졸하고 야비한 행동이라며?" 이 한마디에 그가 포기했더랬다. 이제 그 사진을 보고 그가 혼자 씩 웃는다.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기뻐 따라 웃는다. 지워야한다던 그지만 훼방꾼 하나 없는데도 지워버릴 생각을 않는다. "네가 나를 웃게 하는구나."

그와 난 외로움을 나누는 친구

그의 손길이 따뜻해져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지우기는커녕 컴퓨터로 옮겨 저장해 둔다. "팬티만 걸친 하반신이 다 드러난 모습은 좀 흉하다.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니? 네가 양해해줄 수 있겠지? 아래쪽은 지울게. 사진을 찍을 때 적당히 찍을 것만 골라 찍어야 하는데 아들놈이 보이는 대로 다 눌러댔으니···."

촬영 때부터 찍어야 할 피사체를 적절하게 파인더에 잡아 찍는 플레이밍을 얘기하고 있었다. 촬영 후 찍힌 사진을 다시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 정리하는 트리밍을 하며 그가 내게 양해를 구해오고 있었다. 무엇을 선택, 선별하기에 앞서 무엇을 먼저 결정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집어주고 있었다.

"그래, 그 정도는 내가 눈감아주지!" 우리는 외톨이가 아니었다. 외로움도 우리에겐 잠시일 뿐이었다. 우린 서로 나누고 있질 않은가. 나누고 있는 한 결코 혼자는 아니다.

   
오동명 작가는 1957년 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지냈다.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3년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직장을 그만 두고 변경했다. 1년에 한 권은 꼭 내겠다고.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

2000년엔 <당신기자 맞아> 증보판을, 2001년엔 <신문소 습격사건>을 냈고, 2002년엔 소설<바늘구멍사진기>, 2003년엔 사진취미 책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가 시중에 나와 있다. 2004년엔 여행책 <5만원 2박3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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