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갯마을은 어떻게 생겼을까.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범인은 얼마나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을까. 정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이렇게 하면’이라고 지시어로 말하면 그것이 무엇일까.

시각장애인들이 TV를 접할 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생각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안 봐도 비디오’처럼 ‘눈에 선하게’ 볼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TV프로그램이나 영화를 글로 그려내는 화면해설작가들이다. 권성아·김은주·이진희·임현아·홍미정 등 5명의 화면해설작가는 직업을 알리기 위해 책 <눈에 선하게>를 지난해 출간했고, 최근 2쇄를 찍었다. 홍미정, 이진희 화면해설작가를 만나 화면해설 업무의 현황과 고충을 들었다.

▲ 홍미정(왼쪽), 이진희 화면해설작가
▲ 홍미정(왼쪽), 이진희 화면해설작가

두 작가의 본 직업은 라디오 작가다. 홍 작가는 시각장애인 전문 프로그램을 맡은 일을 계기로 화면해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작가는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이들 작가는 현재 한국시각장애인미디어진흥원 소속으로 일을 하고 있다. 

화면해설은 대사와 대사 사이 ‘빈틈’마다 등장인물의 상황과 표정, 분위기, 주변 환경 등을 묘사해야 한다. SBS ‘런닝맨’에서 유재석이 입장하는 장면을 “더위가 한 풀 꺾인 선선한 날씨의 초가을, 가장 먼저 촬영장에 나타난 유재석”이라고 설명했다. 영화 ‘미나리’의 한 장면은 “마시멜로 같은 하얀 곤포 사일리지가 줄줄이 놓여있는 녹음 짙은 들녘을 지나 앞서 가던 트럭이 좁은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자 모니카도 뒤따른다”고 썼다. 

특히 어려운 장르는 뭘까. 홍 작가는 “다 어렵다”면서 말을 이어갔다. “개인적으로 스릴러나 수사물이 좀 더 어렵다. 잘 안보는 장르이기도 하고, 범죄장면들은 대부분 캄캄한 곳에서 벌어져서 잘 안 보인다. 그럴 때 범인이 무언가로 찌르는 장면에서 언뜻 칼처럼 보인다고 ‘칼로 찔렀다’고 쓰면 안 된다. ‘드라이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뾰족한 것으로 찔렀다’고 표현해야 한다.”

사극도 어려운 장르 중 하나다. “영화 ‘남한산성’과 ‘한산’을 했는데, 사극은 ‘저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는 것’들이 있다. 거북선의 ‘귀퉁이’가 부서졌는데 이 부분을 뭐라고 불렀을까, 이런 고민을 한다. 공부해서 용어를 넣기도 하는데 문제는 낯선 용어이기에 넣는 순간 더 어려워진다. ‘올빼미’ 작업을 할 때는 왕 앞에 휘장 같은 게 있는데 이걸 ‘방장’이라고 부르더라. 그런데 ‘방장’이라고 쓰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얇은 천으로 된 것’이라고 풀어야 한다.” 홍 작가의 말이다. 이 작가는 “JTBC 브레이킹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다운’은 블로그, 각종 유튜브 등 10여개의 창을 띄워놓고 브레이킹 용어를 공부하고 동작을 연구해가며 작업했다”고 했다.

▲ 드라마 '나의해방일지'
▲ 드라마 '나의해방일지'

이진희 작가는 ‘나의 해방일지’ 작업의 경우 감정 표현이 어려웠다고 했다. “워낙 문학적인 작품이어서 여백을 살려야 하는 부분이 어려웠다. 대사가 워낙 없어서 심리묘사를 해야 한다. 대본을 주긴 하지만 대본에서 ‘...’라고만 나와 있는데 이때 배우의 심리를 파고들어서 해설하는 게 어려웠다”고 했다. 이 작가는 “그나마 유명 작품들은 감독과 배우들 인터뷰를 찾아보는데 독립영화는 관련 자료도 많지 않은 상황에서 해석이 어려운 경우 해설하기 힘들다”고 했다.

일례로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을 그는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시간이 지나 구 씨가 혼자 떨어져 앉아 바람에 땀을 식히며 먼 산을 응시하고 있다. 제호네 가족은 새참으로 국수를 먹고 있다. 산등성이와 가까워진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내뿜고, 구씨의 눈빛은 멍한 듯 깊어진다. 제호가 국물까지 마신 뒤 그릇을 내려놓는데 창희와 미정은 땀에 전 얼굴로 무표정하게 국수를 먹는다.”

그러면서 그는 “또 전달이 어려운 것이 표정 연기다. 표정연기가 모호한 배우인데, 풍부하게 해설해주면 연기를 못하는 배우인데, 잘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얘기를 작가들끼리 한다”고 했다. 홍 작가는 “연기가 엉망이면 해설도 엉망으로 써야 하나 생각이 든다(웃음)”고 했다.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할 수만은 없는 ‘딜레마’도 있다. 해설을 하면서 영상 안의 대사, 내레이션, 배경음과 효과음을 침범하면 안 된다. 책에선 “대체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은 너무나 비좁고 때에 따라선 비집고 들어갈 틈을 노리느라 안간힘을 써야 한다”고 설명했다.

자세하게 쓴다고 해서 좋은 해설이 아닐 수도 있다. 책은 이를 설명하며 “화면을 읽는 것에만 급급해서도 글쓰기를 뽐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친절이 과도한 개입은 아닌지 고민해야 하며, 불친절이나 무성의해 보이는 해설로 화면해설 자체를 무용지물을 만드는 건 아닌지도 끝없이 돌아봐야 한다. 나는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전한다.
 
한 장애인은 화면해설작가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고만 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겠구나하고, 나도 주인공에게 공감하면서 감정을 따라갈 수 있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바라본다’ 이런 식으로 길게 해설한 다음 곧바로 대사가 나오거나 다음 장면을 넘어가면 해설 쫒아가기 바빠서 내 감정을 가질 시간이 없어요.”

홍 작가는 “답이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시각장애엔 여러 유형이 있다. 우리는 가장 취약한 전맹을 기준으로 쓴다고 돼 있다. 그래서 최대한 자세하게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자세하게 쓰면 또 전맹 분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자세히 써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선천적 전맹이기에 간단히 써달라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선천적 전맹이라서 한 번도 못 봤기 때문에 자세히 써달라고 하신다.”

이 작가는 “외로운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팬텀싱어’를 담당하고 있는데 가사를 어떻게 전달한 것인가에 대해 내적 갈등을 겪었다. 가사를 전달해주려고 하면 노래 소리가 묻히게 되고, 가사를 언급하지 않으면 궁금해할 것 같다. 그래서 여러 방식으로 실험을 하고 있다.”

화면해설작가들은 ‘말을 퇴고한다’는 표현을 쓴다. 입말로 원고를 다듬는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읽어야만 실제 시간을 얼마나 차지할지 가늠할 수 있다. 이 작가는 “대사를 침범하게 않게, 음성의 빈 틈에 들어갈 수 있게 문장 길이나 속도를 맞추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했다.

‘시각’이라는 요소가 배제됐기에 혼동을 줄 수 있는 표현을 빼기 위해 읽기도 한다. ‘비니를 쓴다’는 표현은 ‘비닐을 쓴다’로 들려서 ‘비니’라는 표현은 담지 않았다. 권투 장면에서 ‘미트로 막는다’는 표현은 ‘밑으로 막는다’로 들릴 수 있어 다른 표현을 써야 한다. “‘아는형님’에서 ‘피지컬100’에 이상민을 빚대 ‘빚지컬’이라는 자막을 썼다. 이걸 해설해야 하는데 소리로 들으면 ‘비찌컬’이라고 들릴 것이라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생략하거나 ‘빚쟁이 피지컬’처럼 풀어야 하는데, 예능은 일일이 풀어버리면 재미가 없어진다.”(홍 작가)

작가들은 TV에선 재방송과 비인기 프로그램 위주로 화면해설방송이 편성되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시각장애인분들이 본방송으로 화면해설하면 좋겠다고 요구를 많이 하신다. 현재는 대부분 재방송이다. 그래서 회사에 출근하면 전날 방영된 프로그램에 대한 동료 간 대화에 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제작 시간 때문에 재방으로 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지만 화면해설까지 방송 제작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 작가는 “화면해설을 어떤 프로그램에 할지 정하는 건 방송사 고유권한인데, 인기 프로그램을 잘 안 하게 된다. ‘놀면 뭐하니’나 ‘1박2일’은 화면해설방송을 하지 않아 장애인들이 알기 힘들다”고 부연했다.

노동 환경 측면에선 ‘급박한 시간’과 ‘소통’ 문제가 있다. 이 작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퀄리티가 좋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홍 작가는 “JTBC ‘아는형님’ 재방분 기준 62~63분 정도 분량인데, 영상이 월요일 저녁 6~7시 정도에 온다. 그러면 화요일 오전 9시까지 마감을 해야 한다. 예능은 대본 원고를 제공받지 못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편집본은 내용이 다르기에 본방을 미리 보고 작업할 수도 없다”고 했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처럼 외국인이 나오는 방송은 자막을 받아써 더빙용 원고까지 함께 제작해야 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요즘은 드물지만 영상을 제대로 제공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화면해설방송 도입 초기엔 영화 제작사에서 저작권 문제를 고려해 흑백으로만 영상을 제공해 사실상 제대로 된 해설 작업이 불가능한 일이 있었다. 이 작가는 “처음 화면해설이 도입될 때만 해도 영화 내용을 못 준다고 해서 남양주 촬영소까지 직접 가서 2박3일 동안 영상 돌려보면서 작업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 작가는 “최근 넷플릭스 ‘DP’ 작업할 때만 해도 초반에는 화질이 떨어지는 영상을 받았다. 부재중전화가 떠 있는 장면이 있는데 화질이 안 좋아서 부재중 전화가 몇통인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화면해설 업체) 직원에게 물어보고, 직원이 넷플릭스에 물어봐서 대본을 썼다”고 했다. 홍 작가는 “지금도 대본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본이 아닌 해외판을 만들 때 더빙용으로 만든 대사집이나 자막용 버전을 주기도 한다”며 “지금은 파일로 주긴 하지만 여전히 여러 제약이 있다. 음향 등 다른 후반작업을 할 때는 이렇게 하지는 않을 거다. 제작사나 방송사가 우리를 제작진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홍 작가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꼭 하고 싶었다”며 “방송업계, 미디어 업계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특히 우리도 방송 제작의 일원이라는 점을 생각해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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