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동안 경제부장이 바뀌어도 저는 한 자리에서 일했습니다. 어느 날 부장이 점심을 먹자더니 말하더군요. 사무실에 오지 말고 재택하라고. 오전에 일하지 말고 오후에 시작하라고. ‘법을 지켜야 한다’면서요. 그때부터 업무 시간이 대폭 줄었습니다. 같이 일한 동료들을 믿고 싶었지만, 저는 그 해 말일 잘렸습니다.”(YTN 영상촬영 VJ로 일한 A씨)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고 법원에서 확정 판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직한 뒤 2년째, 회사는 제게 오전 퇴근을 시킵니다. 단시간근로도 고용계약이라고 주장합니다. 기존에 하던 일은 거둬갔습니다.” (UBC울산방송을 상대로 한 부당해고 사건에 승소한 이산하 ‘무늬만 프리랜서’ 아나운서)

단시간 노동이 비정규직‧프리랜서 노동자 고용 책임을 피하려는 방송사들의 신종 수법으로 떠오르고 있다. 방송사들이 ‘무늬만 프리랜서’로 고용해왔던 노동자들이 권리 찾기에 나서거나 고용 책임이 제기될 때 이들의 업무 시간을 대폭 줄이는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은 이것이 결국 정규직 노동자와 다름없이 일해온 흔적을 지우고 구별 지으려는 전략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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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도 출근하라더니…돌연 노동시간 줄더니 잘려”

A씨는 지난해 말일 6년간 일해왔던 YTN에서 잘렸다. YTN 경제부장은 지난해 6월 돌연 그에게 ‘다음 주부터 오후에 출근하라’고 했다. 아침 9시에 사무실에 출근한 그에게 재택을 지시했다. 촬영과 편집 장비는 쓰지 말라고 했다. 이후 9월부터 일하는 날이 일주일에 하루 이틀로 줄었다. 그리고 그해 말 ‘계약종료’ 통지를 받았다.

그는 YTN 경제부 기자들 지시에 따라 모든 일을 했다고 말한다. A씨의 업무는 기자들이 요구하면 현장에 출동해 영상 촬영과 인터뷰 취재를 하는 일이었다. 주로 경제 분야 교수나 증권‧금융 분석가, 시민을 인터뷰했다. 질문도 기자가 정해줬다. A씨는 “폭염 기록을 깬 2018년 여름을 잊을 수가 없다”며 “야외 시민 인터뷰를 그렇게 많이 했다. 주식‧부동산 경기가 안 좋을 때 시민들을 붙잡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묻는 등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했다. 2020~2021년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될 때 다른 기자들은 재택근무로 전환했지만 A씨만 부장 지시로 사무실에 출근하기도 했다.

▲YTN 보도국 경제부 영상 담당으로 일한 A씨에게 경제부 기자들이 시민인터뷰를 요청하는 SNS 업무 대화 목록.
▲YTN 보도국 경제부 영상 담당으로 일한 A씨에게 경제부 기자들이 시민인터뷰를 요청하는 SNS 업무 대화 목록.

A씨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고, 회사와는 이달 초 화해 조정을 했다. A씨는 “수년간 손발처럼 일을 시키다 업무 시간을 대폭 줄인 건 해고하기 전에 ‘실제 프리랜서’처럼 보이려고 했던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부당해고 확정판결 받고도 ‘오전만 일하는’ 아나운서

이산하 UBC울산방송 아나운서는 지난해 11월 회사가 낸 부당해고 불복 소송에서 최종 승소하고도 현재까지 단시간제로 일한다. 이씨는 UBC 지시로 ‘프리랜서’로 5년 넘게 일하다 2021년 해고됐다. 같은해 11월 노동위원회가 그의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인정하면서 복직했지만, UBC는 그에게 하루 4시간 근무를 지시했다. 급여는 최저시급이다. 현재는 6시간으로 늘어 새벽 5시에 출근해 오전 11시30분쯤 퇴근한다.

이씨는 “복직한 뒤 회사는 단시간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내용을 보면 회사 뜻에 따라 계약해지도 할 수 있게 했다. 제대로 된 계약이라 보기 어려워 계약서도 쓰지 못한 상태”라며 “(회사 대응은) 저를 같은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느껴진다”고 했다. 현재 이씨는 UBC의 정규직 노동자와 처우 차별을 해소하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기약 없는 싸움이다. 방송사로서도 저를 피말리는 것 외엔 의미 없는 싸움”이라며 “방송제작은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방송사들이 이를 악용하는 관행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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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한 아나운서, ‘6시 전 퇴근 지시’에 점심 없이 일해

CBS에서 총 7년여 일하다 해고됐던 경남CBS의 최태경 아나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지난해 노동위원회에서 거듭 부당해고를 인정받았는데, 복직하자마자 회사 지시가 떨어졌다. ‘6시까지 근무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CBS는 최 아나운서가 프리랜서라고 주장하며 부당해고 판정 불복 소송 중이다. 최씨는 “뉴스는 한 타임만 남았고, 음악프로그램 시간도 반으로 줄었다”며 “방송 대신 받은 설교 편집 업무를 하느라 오히려 업무량은 더 많아졌다. 지시대로 6시 이전에 퇴근을 마치기 위해 점심시간 없이 일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들처럼 방송사들이 무늬만 프리랜서들에게 초단시간 또는 단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의도는 뭘까. 우선 노동자성 흔적 지우기가 꼽힌다. UBC 내 무늬만 프리랜서 소송을 대리하는 정일호 법률사무소 시선 변호사는 “노동자로 일을 시키던 방송사 입장에서 근로자성 징표를 지우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며 “그러나 이미 방송사 지시에 따라 일을 한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YTN VJ의 부당해고 구제신청 사건에서 사측은 계약해지 전 단시간으로 일한 6개월을 들어 근로자성을 부정하기도 했다.

“소송‧별도직군 신설 와중…방송 비정규직 인정 않으려는 전략 일환”

고 이재학 PD 투쟁 이후 수많은 직군의 방송계 노동자들이 권리 찾기에 나서자 방송사들이 이들을 정규직과 구분 짓고 이들의 권리 보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든 대응 전략 중 하나라는 지적도 나온다.

안명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 의장)은 “회사가 방송계 무늬만 프리랜서들의 노동을 정규직 노동자와 다름없이 인정해야 할 시점에 단시간‧초단시간 계약을 적용하면서 이들은 근로기준법의 핵심 조항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 “방송사가 추진하는 무기계약 전환, 별도 직군 신설, 초단시간 등 방송사 대응을 연결하면 결국 방송 비정규직들을 기존 정규직과 구별 짓고, 노동의 위계를 고착화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 각 방송사의 무늬만 프리랜서 ‘대응 전략’은 동시다발적이다. UBC는 지난해부터 올 초에 걸쳐 2년 넘게 일해온 파견·프리랜서 뉴스PD와 CG 업무 담당자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시켰다. 이산하 아나운서의 ‘무늬만 프리랜서’ 부당해고 판례가 나오자 회사가 다른 직군 비정규직을 놓고 대응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무기계약직 계약서엔 이들이 10년 가까이 일해온 경력이 담기지 않았다. 이에 한 CG 노동자가 근로계약이 곤란하다고 밝히자 이후 UBC 측은 해당 CG노동자의 일을 3교대제에서 하루 2시간(새벽 5시30분~아침 7시30분), 측 초단시간으로 대폭 줄였다.

YTN도 방송 비정규직들에 대한 고용 책임을 피하는 과정에서 다층적인 대응 전략을 펴왔다. 2021년 말 CG‧그래픽디자이너와 PD 12명이 YTN을 상대로 근로자지위 소송에서 승소하자, YTN은 항소를 결정했다. 얼마 뒤인 지난해 초 YTN은 공개채용을 거쳐 프리랜서 PD 가운데 2년 넘게 일한 이들을 대상으로 ‘계약직 PD’로 근로계약을 맺었다.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개 노동·사회단체는 지난해 10월 서울 목동 CBS 본사 앞에서 ‘무늬만 프리랜서 아나운서 제대로 된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돌꽃노동법률사무소,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등 10개 노동·사회단체는 지난해 10월 서울 목동 CBS 본사 앞에서 ‘무늬만 프리랜서 아나운서 제대로 된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의도는 정규직과 구별 짓기, 대응 점점 어려워질 것”

안명희 상임활동가는 “일각에선 ‘프리랜서보단 별도 직군 무기계약직이, 단시간 근로계약이 낫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들은 기존과 다름없거나 더 열악한 처우에 놓이고 권리 보장을 받는 부분은 거의 없다”며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노동자 대다수가 비정규직 상태로 남으면서 당사자들의 싸움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했다.

YTN 측은 미디어오늘에 “해당 VJ와 계약기간 종료 시점에 따라 계약 관계를 종료했다”며 “해당 건은 당사자와 합의해 종결된 사안으로 추가로 구체적인 사항을 밝히기 어렵다”고 밝혔다.

UBC 인사기획팀장은 “(이산하 아나운서의) 6시간 근무는 노동위원회 당시 본인 주장에 따른 것이며, 복직 이후 업무가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다. 업무가 대폭 줄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아나운서는 6시간 근무를 주장한 적 없이 없고, 줄곧 방송 업무 특성상 정규직과 마찬가지로 실제 노동시간은 유동적이라고 줄곧 주장해왔다. 해당 팀장은 CG업무 담당자 건에 대해선 “업무시간 축소는 무기계약한 분들의 업무를 확대하면서 진행된 일”이라고 밝혔다.

한편 통계로 보면, 방송산업 비정규직 가운데 단시간 비정규직이 가장 많은 업종은 경영 관련 사무원(800명)이다. 고용노동부가 2021년 용역연구로 진행한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결과다. 연극, 영화 및 영상 전문가가 700명, 고객상담 등 기타 사무원은 400명이었다. 방송작가 및 언론 관련 전문가는 300명, 방송·통신장비 설치수리원과 디자이너는 각각 100명이었다. 

업종별 비율로 보면 경영 관련 비정규직 사무원 가운데 75.9%, 그외 비정규직 사무원 가운데 56.8%가 단시간 고용이었다. 방송통신 송출 장비 비정규직 가운데 69%, 작가 및 언론 관련 비정규직 전문가 가운데 58.2%가 단시간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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