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매체 가디언이 200여년 전 설립자들과 편집자가 노예제에 연루돼 번 돈으로 매체를 창립한 사실을 밝히고 사죄했다. 가디언은 이 사실을 규명한 연구보고서를 공개하고 회복적 정의를 위한 6가지 조치를 제안했다.

가디언은 29일(현지시간) 1면 머리기사를 통해 “가디언 소유주는 가디언의 설립자들이 대서양 횡단 노예제에 수행한 역할에 대해 사과하고 향후 10년 간 회복적 정의를 위한 프로그램을 발표했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홈페이지 보도자료에선 “자사의 첫 편집자가 반인륜 범죄를 행함으로서 자신의 부를 축적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한다”고 밝혔다.

▲29일 가디언 1면 보도
▲29일 가디언 1면 보도

가디언을 소유한 스콧트러스트는 이날 ‘맨체스터 가디언(현 가디언)’ 설립자들과 대서양 횡단 노예제도 사이의 연관성을 밝힌 학술연구 보고서를 공개했다. 노팅엄대학교 노예연구소 등은 스콧트러스트 2020년 의뢰로 2년 간 해당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가디언은 노예를 소유했거나 이들이 생산한 수입 면화 거래로 부를 축적한 이들의 기금으로 세워졌다. 맨체스터 가디언을 설립한 면화 상인 존 에드워드 테일러는 미 대륙으로 강제로 이송된 노예제 피해자들이 생산한 면을 수입하는 제조‧무역회사와 거래했다. 연구자들은 그의 회사가 미국 씨아일랜드 지역의 특정 농장에서 면을 받아온 거래명세서를 연구했다. 테일러는 맨체스터 가디언의 초대 편집자를 지냈다.

가디언은 그러면서 창간 후원자 가운데 노예제에 연루된 사실이 확인된 이들의 실명과 그 경위를 밝혔다. 매체 설립을 위해 테일러에게 돈을 빌려준 11명 가운데 9명도 유사한 방식으로 노예 경제에 연루됐다. 이 중 한 명인 조지 필립스는 자메이카 하노버의 설탕 플랜테이션 농장의 공동소유주로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다. 그들은 1835년 노예 108명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영국 정부에 보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가디언이 28일(현지시각) 시작한 '코튼 캐피탈' 기획보도 시리즈. 영국의 역사와 가디언의 창립 역사, 노예제의 관계를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디언이 28일(현지시각) 시작한 '코튼 캐피탈' 기획보도 시리즈. 영국의 역사와 가디언의 창립 역사, 노예제의 관계를 밝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캐서린 바이너 가디언 편집국장은 이날 공개한 관련 기획보도 시리즈 첫 편에서 “이들(노예제에 연루된 창립자)의 이익이 언론사 편집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며 “1833년 노예 소유자들이 자신의 ‘인간 재산’을 자유화하는 데 대한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했을 때 가디언 사설은 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른 시대’였다는 말은 반인륜 범죄인 노예제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스콧트러스트는 노예제 피해에 대한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 6가지를 제안했다. 우선 앞으로 10년 간 미국 남동부 씨아일랜드 등 노예제 피해 지역과 자메이카 공동체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위한 회복적 정의 자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스콧트러스트는 “향후 10년 간 총 1000만 파운드(약 160억 원) 이상을 투자할 예정이며, 특히 씨아일랜드와 자메이카의 후손과 공동체를 위한 회복적 정의 기금에 수백만 파운드를 투입할 계획”이다.

▲가디언 홈페이지 갈무리
▲가디언 홈페이지 갈무리

또 매년 영국에 흑인 언론인을 위한 일자리 3곳을 신설하기로 했다. 미국과 호주 가디언지사에도 유사한 제도를 만들 예정이다. 흑인 언론인들이 경력을 유지하고 고위직에 진출하는 것을 지원하는 중간 경력개발과 리더십 프로그램에도 자금을 할당하기로 했다.

바이너 편집국장은 “노예제도는 오늘날 저널리즘을 포함한 많은 산업과 사회에서 인종차별과 불평등이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며 “가디언은 미디어 조직으로 우리 분야의 대표성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배가할 것”이라며 시정조치의 취지를 설명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영국 언론인 가운데 흑인은 0.2%를 차지한다.

스콧트러스트는 향후 3년 간 해당 연구를 진행한 윌버포스 연구소의 가디언 노예제 관련 역사 연구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스콧트러스트는 “대서양 노예무역이 현재 영국 역사에 미치는 영향과 배상, 회복적 정의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공동체 프로그램과 파트너십을 맺을 예정”이라고 했다.

▲가디언 보도 화면. '어떻게 우리 창립자들과 노예제 사이 고리가 가디언의 역사를 바꾸었나'를 주제로 하고 있다.
▲가디언 보도 화면. '어떻게 우리 창립자들과 노예제 사이 고리가 가디언의 역사를 바꾸었나'를 주제로 하고 있다.

스콧트러스트는 가디언 뉴스룸 보도 방향과 관련해서도 제안을 내놨다. 카리브해, 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영미권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보도 영역을 확대하는 데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가깝게는 영국 노예제의 맥락에서 가디언의 역사를 다루는 기획보도 시리즈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가디언은 이날 ‘코튼 캐피탈(면화 자본)’ 시리스의 첫 편을 발표했다.

스콧트러스트는 “존 에드워드 테일러와 그의 후원자들이 노예 경제에 수행한 역할에 대해 깊이 송구하다”며 “우리는 이 사실을 투명하게 밝히고 인정하고 사죄하며 공유하는 것이 반인륜 범죄인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한 역사적 연관성을 다루는 첫발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가디언의 태도는 국내 언론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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