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근무제가 오해받고 있다. 최근 ‘유연근무’라는 단어는 ‘획일적’이고 ‘경직적’인 ‘주 52시간제’ 대척점에 위치하고 있다. 언론에서도 ‘주 52시간제 유연화’라는 표현으로 현 정부의 노동정책을 소개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장시간 노동의 맥락에서 주120시간 노동을 꺼낸 것이 한몫하고 있다. 실제 정부 출범 이후 고용노동부는 주 52시간제를 유연화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러면 주 92시간까지 근무가 가능하다는 해석도 나왔다. 권성동 국민의힘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가 지난 21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획일적인 주 52시간 근무제는 높은 고용 경직성의 대표적 사례”라며 노동시간 장기화 필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유연근무제는 오전 9시 출근 6시 퇴근의 주 40시간을 기본으로 하는 기존 표준근무제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쯤으로 의미가 축소됐다. 실제 유연근무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젬마 데일의 저서 ‘유연한 조직이 살아남는다’를 보면 유연근무제는 “고용주가 근무 시간과 근무 방식을 통제하는 것에서 조직구성원 각자가 근무 시간과 방식을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상태로 전환하는 것(25쪽)”이다. 

▲ 유연한 조직이 살아남는다/ 젬마 데일 지음/ 최병현·윤재훈 옮김
▲ 유연한 조직이 살아남는다/ 젬마 데일 지음/ 최병현·윤재훈 옮김

 

 
책에 따르면 유연근무제의 종류는 다양하다. 

‘직무공유제’는 두명이 하나의 정규 업무를 동등하게 책임지는 방식이다. 서구에서 실업률이 높을 때 일자리 나누기와 연동해 시행한 근무형태다. 전일제와 시간제 중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탄력근무제’는 노동자에게 선택권을 보장하는 취지의 제도다. 

기존 노동시간을 주4일 또는 주4.5일 동안 수행하는 ‘집약근무제’도 있다. 주40시간을 줄이지는 않고 출근한 날 더 긴 시간을 일하는 방식이다. 주4.5일제는 2주 9일제로 대체할 수 있다. 물론 노동시간을 줄이는 주4.5일제나 주4일제도 가능하다. 

총 노동시간과 시간당 임금을 계약하고 주나 월별로 노동시간을 다르게 구성하는 ‘연단위시간제’도 있다. 윤 대통령의 주 120시간 발언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전제조건은 노동자 심신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는 한 건강상 문제, 심하면 과로사의 위험이 있다. 기계적으로 이번주에 주 120시간 일하고 다음주에 쉬면 되지 않겠냐는 식의 발상은 금물이다. 

‘원격재택’은 노동자 개인 상황에 맞게 노동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데 최근 코로나 국면으로 재택근무나 휴가지에서 일과 여가를 병행하는 ‘워케이션(work+vacation)’도 유연근무 중 하나다. 

▲ 노동시간과 형태를 정부나 기업이 아닌 평범한 직원들에게도 결정권한을 주는 것이 유연근무제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pixabay
▲ 노동시간과 형태를 정부나 기업이 아닌 평범한 직원들에게도 결정권한을 주는 것이 유연근무제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pixabay

 

중요한 건, 이렇게 다양한 근무형태를 만든 이유다. 한국을 기준으로 주 40시간,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표준근로모델을 설정한 건 노동자들이 아니다. 노동자들에게 단지 노동시간이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면, 생산성이 올라가거나 노동자들 부담이 덜한 방식으로 노동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유연근무의 가장 큰 장점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다수 직장에서 유연근무의 이점을 맛본 상황이고 기업들도 여러 장점을 경험해봤다. 책에선 유연근무제의 필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구조 변화 속에서 점점 많은 사람이 ‘지식기반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지식기반 노동이란 각자 전문 지식과 학습 경험을 이용해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뜻한다. 지식 노동자는 공장이나 생산라인에서 일하지 않기에 과거 방식대로 통제할 필요가 없다.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일하는 방식은 이에 맞춰 변화하지 못했고 아직 많은 조직이 과거의 방식을 따른다.”(12쪽)

“대부분 조직에는 다양성, 평등, 포용성이 결여돼있다. 표준근로모델, 전통 업무 방식, 보수적인 태도는 많은 잠재 구직자에게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고 일부 조직은 본질적으로 건강하지 않기도 하다.”(18쪽)

어차피 노동자들은 시간을 팔아 임금을 받는다. 똑같은 시간이나 생산성이라면 선택권을 노동자들에게 넘기는 것이 민주적이다. 게다가 유연근무제는 실행하는데 사실상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경영진 입장에서도 비용이 들지 않는 복지제도로 활용할 수 있다. 비용이 들지 않는 복지제도로 자율성까지 보장했으니 직무만족도나 생산성이 오른다는 설명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잠재적인 비용도 줄일 수도 있다. 직원들의 만족도가 올라가면 이직이 줄어들 것이고 이직과 채용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사무공간을 줄이거나 근무일수를 줄이는 것도 비용 감축 효과가 있다. 주4.5일제 혹은 2주9일제, 주4일제 등은 사회적으로 출퇴근에서 겪는 혼잡도와 환경문제를 감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연근무제를 많은 기업이 도입하지 않는 이유는 기존 조직모델과 관리자, 특히 중간관리자의 저항 탓이다. 코로나 확산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직원들이 사무실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정확하게는 부하직원들이 자신의 눈앞에 있어야 한다는 관리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시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저자도 미국의 중간관리자의 사례를 들며 비슷한 지적을 했다. 유연근무를 요청한 직원은 그렇지 않은 직원보다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됐는데 결국 사무실에 출근해 장시간 ‘존재’해 눈에 띄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 

▲ 유연근무제는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는 복지제도라고 평가받는다. 사진=pixabay
▲ 유연근무제는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는 복지제도라고 평가받는다. 사진=pixabay

 

표준근무와 유연근무는 기성복에 몸을 맞춰 입느냐, 아니면 내 몸에 맞게 옷을 제작해 입을 것이냐의 문제와 같다. 이때 관리자와 팀 구성원 간의 관계가 유연근무제 도입 여부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특히 부서 차원의 비공식적 유연근무제의 경우 관리자와 구성원의 신뢰가 절대적이다. “신뢰수준이 높고 관리자와 팀 구성원 간의 관계가 성숙한 조직에서는 비공식적인 유연근무제가 잘 작동하고, 직원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37쪽)

관리자의 역량 문제도 지적한다. “대다수 관리자는 대면 업무를 통해서만 성과관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업무 방식을 원하는 일부 조직원들이 기존 방식으로 일하는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려 한다. 일부 관리자에게 업무방식의 변화는 일종의 위협으로 느껴지기에 방어적 입장이 될 수 있다.(165)”는 이유에서다. 사실 관리자로서 교육은 유연근무제가 아니더라도 대다수 기업이 간과하지만 필요한 과정이다. 

영국은 고용주가 유연근무 신청을 검토할 재량이 있다. 그렇지만 합리적 근거 없이 신청에 동의하지 않으면 평등법에 따른 차별에 해당될 수 있다. 이쯤 되면 한국에서 당연하게 오랫동안 자리 잡은 표준근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 충분할 것 같다. 

책 끝부분에는 유연근무제를 실제 실행할 때 마주할 질문을 제시했다. 코로나19 이후 유연근무제를 위해 관리자, 구성원들이 어떠한 것들을 고민해야 하는지, 어떤 직무에 유연근무가 가능한지, 유연근무제를 잘 수행하기 위한 팁을 실었다. 또 유연근무제를 수행하면서 벌어지는 곤란한 상황들과 해법도 소개하고 있다. 유연함이라는 경쟁력을 확보한 조직이라면 구성원이 함께 고민해볼 법한 질문들이다. 다만 아직 유연근무를 결정할 권한이 정부나 경영진에게 있는 한국 현실에선 어느 정도 노동자들에게 권력의 이동이 진행된 뒤에나 고민할 법한 내용이다.

※ 미디어오늘은 여러분의 제보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news@mediatoday.co.kr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