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만 안 죽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해고된 스태프가) 서너 시간 자고 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직도 사람이 죽는구나. 사람이 죽게 내버려 둬선 안 된다는 생각에 왔다. 근로시간에 관한 한, 밤샘에 관한 한 양보할 수 없다. 양보해서도 안 된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를 연출하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기획했던 이은규 전 드라마국장(PD)은 27일 ‘KBS 미남당 스태프 집단해고’ 사태를 고발하는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그는 “스태프들의 영상에 대한 열정이 아니면 (드라마) 노동판은 굴러갈 수 없다. 이를 오히려 악용하고 최대한 빨아먹는 시스템은 범죄소굴”이라며 “그것을 바꾸려 몸부림 치는 사람을 억압하고 자르면서 지켜온 것”이라고 했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를 연출하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기획했던 이은규 전 MBC 드라마 PD
▲MBC 드라마 전원일기를 연출하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기획했던 이은규 전 MBC 드라마 국장. 사진=김예리 기자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7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미남당 제작발표회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것’을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7일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미남당 제작발표회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것’을 주제로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KBS 월화드라마 ‘미남당’ 첫 방영과 제작발표회가 예정된 이날, 영화·드라마 스태프 노동자들과 전·현 제작 관계자들이 서울 상암동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 모였다. 이들은 ‘미남당 제작발표회에서 이야기되지 않는 것’을 주제로 드라마 스태프가 노동자로 인정 받고도 노동법 위반에 문제 제기하기도 어려운 현실을 증언했다. 간담회는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이 주최했다.

‘미남당’의 기술팀 스태프 10여명은 지난달 미남당 제작사인 피플스토리컴퍼니 등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가 재계약을 거부 당했다. 이들은 촬영 기간 적게는 3~4시간 자고 하루 15~16시간 일해왔다고 말한다. 제작사와의 계약서는 하루 13시간 노동, 출근일 사이 휴게시간은 8시간을 명시했다. 그 자체로도 근로기준법 위반이지만 이마저 지켜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스태프에 따르면 미남당 현장엔 ‘집단해고’ 사태 뒤에도 장시간 노동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편집기 앞에서 앉은 채로 죽었다”


미남당 제작사 측에 노동법 준수를 요구했다 잘린 스태프 A씨는 “해고 당한 뒤 두 개의 드라마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문제 제기를 위해)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다”고 했다. 그는 “사실 저희가 문제 제기한 미남당의 현장은 평균치의 드라마 현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현장에서 미남당이 하듯 찍고 있다”고 했다.

▲KBS가 27일 첫 방영을 예고한 월화드라마 미남당. 미남당 홈페이지 갈무리
▲KBS가 27일 첫 방영을 예고한 월화드라마 미남당. 미남당 홈페이지 갈무리
▲박찬희 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박찬희 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그는 “이번에 (변화를 일으키는 데) 실패하면 다른 현장의 스태프들은 더욱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고 겁 먹을 것이다. 현장에선 이미 (문제제기 스태프에)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겠다는 얘기가 돈다고 한다”고 우려했다.

MBC 드라마 전원일기를 연출하고 커피프린스 1호점을 기획하고 MBC 드라마국장을 지낸 이은규 전 드라마 PD는 “죄의식이 있다”며 운을 뗐다. 그는 “(90년대 초반) ‘걸어서 하늘까지’(드라마)를 할 때 92일 촬영하며 일주일에 6일 반을 촬영하고 하루에 18~19시간 촬영했다”고 했다.

“(촬영 당시) 유달리 추위 탔던, 전체 스태프에서 중 가장 어린 스크립터 막내가 있었다. (2016년께) 이한빛 PD 사건이 있기 얼마 전, 새벽에 출근하는데 목욕바구니를 들고 쫄래쫄래 오길래 ‘잠을 못자고 일해야 하니 샤워하고 오는구나, 안타깝다’하고 헤어졌다. 그러고서 몇 달 있다가 그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주말연속극을 새벽까지 편집하다, 편집기 앞에서 앉은 채로.”

이 PD는 “그런 촬영을 하면서 내가 반쯤 죽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얼마 뒤 이한빛 PD 사건이 나자 견딜 수 없어 PD들을 향해서도 제도적으로 바꾸자고 했지만, 현재까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미니시리즈 장르가 시작되며 장시간 가혹한 노동이 발생했다”며 “4부에서 8부로, 16부로 자면서 맹렬한 진통을 겪었다. (장시간, 장기간 노동을) 똑같은 지게와, 똑같은 사람의 힘으로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스태프와 담당자가 분노하고 괴로워하지만, 이것을 결정하는 이들은 업무현장에 와 본 적이 없는 방송 경영진”이라고 했다.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7일 KBS 드라마제작사 몬스터유니온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7일 KBS 드라마제작사 몬스터유니온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모든 문제는 스태프를 노동자로 보지 않아서 시작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스태프들에게 노동법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고 했다. 윤 변호사는 “미남당 제작사와 스태프가 맺은 계약서를 보면 ‘일당’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간다. 근로시간과 수당, 연장근로와 야간근로에 대한 표현도 없이 모두 합친 것”이라며 “건설노동자들도 일당제를 적용받는데, 철저히 기본 근로시간과 기본급, 연장근로를 따로 적어 계약한다. 법원이 이를 표기하지 않은 계약서의 일당에 ‘기본급’이라고 봤기 때문”이라고 했다.

윤 변호사는 “(노동부와 법원은) 감독급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를 근로자로 판단했다”며 “이런 상황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으니 법 위반 상황이 남발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한빛 PD가 사망한 뒤 근로기준법이 바뀌었다. 이전엔 근로시간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지만 특례 조항에서 드라마가 빠지면서 최대 52시간 노동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남당 현장에 그립팀으로 잠시 참여했던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박찬희 위원장은 미남당 제작사의 문제의식이 심각하다고 우려했다. 박 위원장은 “영화 제작 현장에선 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4대보험을 적용받는다”며 “드라마 현장에 가면 계약서에 불합리한 내용이 적혀도 스태프가 말할 수 없는, 눈치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 너무 많았다. 미남당의 경우 근로시간을 지키려는 노력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했다.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7일 KBS 드라마제작사 몬스터유니온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드라마제작 현장 불법계약근절 및 근로기준법 전면 적용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공동행동’은 27일 KBS 드라마제작사 몬스터유니온 앞에서 1인시위를 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해고 사태에 ‘KBS 제작 드라마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하는 KBS의 책임에 대한 지적도 이어졌다. KBS 시청자위원으로 활동하는 언론개혁시민연대 권순택 사무처장은 “KBS는 KBS가 건드리기 쉬우니 계속 그러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지만 실제 촬영 스태프가 KBS 드라마에서 불법 상황이 심각하다고 증언해 (지난해) 고발까지 이르렀고, 미남당 사태도 그런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했다 윤 변호사도 “KBS는 제작사가 아니라 법적 책임이 없는 것처럼 회피하지만 실제 KBS 드라마(에 대한 제작사들의) 계약서를 보면 통일돼 있다. 제작사가 임의로 했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권 처장은 “KBS가 이대로 미남당을 편성한다면, KBS의 촬영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를 용인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라며 “KBS가 불법 노동이 이뤄지는 제작사는 더 이상 (계약 상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한빛센터는 이날 미남당 시청 거부 선언을 제안하고, 미국 스태프노동조합에도 연대요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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