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많은 문서 기록이 여전히 은폐되어 있어, 우리는 샌티의 역할이 문지기, 조정자, 차단기였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CIA는 차단막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상적인 금융 업무의 상당 부분을 샌티에게 하청을 주었고, 그는 베일에 싸인 필리핀 억만장자역을 기꺼이 수행했다. 검은 금이 필리핀에서 홍콩, 취리히, 부에노스아이레스 혹은 런던 등지의 은행들로 옮겨져야 했을 때 기적확인서, 화물운송장, 보험증서 등 우리가 갖고 있는 문서들은 금이 클라크공군기지에서는 미군 비행기로, 수빅만에서는 미 해군 배로, 마닐라국제공항에서는 케세이퍼시픽 등의 항공편으로, 해안에서는 아메리칸프레지던트 정기여객선(American President Lines)을 통해 운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산조직은 목적지까지 금괴를 수행하면서 안전을 책임졌다. 전후에 마피아가 최초로 개입하게 된 것은, 앞서 서술했듯이 이탈리아 공산당의 집권을 저지하려는 CIA 노력의 일환으로 다량의 샌티의 금이 바티칸은행을 비롯한 이탈리아 은행들로 옮겨졌을 때다.

매번 새로운 계좌가 개설되었고, 그때마다 샌티의 이름이나 그의 가명이 계좌 소유주로 등재되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가명을 사용해 종종 “이름 없는 사람”으로 통했다. 이 은행 계좌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샌티 자신의 코드와 그가 랜즈데일에게서 배운 어구들을 조합한 적절한 은행 코드, 패스워드, 다량의 문서가 필요했다.

표면적으로는 샌티가 이 계좌들의 명의자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자산 과 파생상품들 은 미국연방준비은행, 뱅크오브잉글랜드, 일본은행, 스위스은행 등과의 비밀 귀표 협정을 통해 여러 나라 정부들에 의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샌티는 이 계좌들을 관리해준 대가로 관리수수료를 넉넉하게 받았다. 이 수수료는 각 계좌의 순자산 중 일정 비율로 받았을 것이고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 10억 달러 계좌의 관리수수료가 연 1퍼센트라면, 이는 연 1천만 달러의 소득을 낳고, 0.1퍼센트라 하더라도 연 1백만 달러의 소득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계좌가 수십 개나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초 샌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거나 그럴 것이라고 추측된 계좌들은 총자산이 5백억 달러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 계좌들이 그의 개인 재산이라면, 그는 세계 최고의 부자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국제적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가 1973년 그가 죽기 바로 전 해 CIA 한 분파의 손님 자격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으며, 죽을 바로 그 당시에도 여전히 CIA의 피고용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마닐라와 카바나투안시의 큰 저택에서 여유 있는 생활을 했으며, 마닐라 힐튼호텔에 스위트룸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리어제트기(Lear Jet)나 페라리 같은 것은 결코 사지 않았다. 그는 은행가와 비밀 탐정들 외에는 필리핀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며, 심지어 마닐라에서도 사회적으로 저명하지 않았다. “마닐라의 미스테리한 억만장자”에 대한 기사를 쓴 사람도 없다. 그의 일은 매우 복잡하고 은밀한 냉전의 시나리오 속의 한 요소였을 뿐이다.

그들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CIA 혹은 미 재무성 문서들과 관련 은행들의 내부 문서들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샌티가 어떻게 이 계좌들의 명의자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유추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그런 위치를 차지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필리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파악하기 쉽다. 샌티의 돈 중 일부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마르코스는 대통령이 되려고 20년 동안이나 준비했고, 결국 1965년 성공을 거둔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좬마르코스 왕조좭에서 상술했듯이, 그는 인도차이나 전쟁이 확대되는 동안 CIA와 펜타곤을 위해 일했다. 마르코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그의 선거운동 팀원 전원이 한때 랜즈데일을 위해 일했던 인물들이었다.

마르코스는 “새로운 막사이사이” 미국의 똘마니 로서 그 자리에 밀어 올려졌다. 마르코스는 자신이 홍콩, 도쿄, 타이베이, 싱가포르, 시드니 등지의 은행에 있는 샌티의 계좌를 자금원으로 하여 뇌물을 살포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다른 동남아시아 지도자들에게 마케팅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백악관에 심어주었다. 이 뇌물들은 하룻밤 사이에 푼돈처럼 낭비될 수 있는 현금 형태가 아니라 보유자에게 큰 계좌에 대한 이자 수취자격을 부여하는 금 표시증서를 포함한 파생상품의 형태를 취했다. 그는 수취인이 얌전하게 구는 한 이자를 빼먹을 수 있었으며, 그 사람에 대한 효용 가치가 없어지면 그 증서는 “57년물”에 대해 자민당이 했던 것처럼 위조로 선언될 수 있었다.

마르코스는 대통령이 되자 미국의 인도차이나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의 지지가 공짜는 아니었다. 그는 미국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말라카낭궁 내 자신의 위치에 대한 보장을 받아냈다. 그는 1986년 레이건 행정부와 더불어 권좌에서 밀려나기까지 백악관의 애완견이었다.
그의 첫 번째 4년의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에 그에 관한 여론이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멜다는 주말 쇼핑 행각에 수백만 달러를 사용한 일로 조롱을 받았다. 그녀는 1968년 뉴욕에서 자신의 딸 이미(Imee)와 함께 한 번의 주말 쇼핑에 330만 달러를 썼다. 동시에 그녀는 맨해튼시티뱅크에 큰 계좌를 개설했는데,33) 그곳 세무서 서류는 샌티도 커다란 현금 및 금괴 계좌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리핀 대통령의 급료는 쥐꼬리밖에 안 되는데도 마르코스가 외국 은행 계좌에 수십 억 달러를 숨겨두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소문은 나중에 진실로 밝혀졌다.

1969년, 나쁜 여론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는 부정선거를 통해 또 한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필리핀 헌법에는 대통령을 세 번 연임할 수 없었다. 마르코스는 헌법 수정에 실패하자, 1972년 그와 국방장관 후앙 폰스 엔릴레는 계엄령 선포를 정당화하고, 그럼으로써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에 대한 허위 선전을 전개했다. 이 선전의 정점 중 하나가 반대당에 테러를 가하고 로저 로자를 침묵시키기 위한 미란다 광장에서의 수류탄 공격이었다.

교활한 마르코스는 샌티를 설득하여 우산조직의 부책임자에 앉혔다. 샌티는 25년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데 진력이 나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마르코스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힘의 균형이 마르코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 원인은, CIA 위계 조직 안에서 지도급으로 부상한 새로운 인물들의 변덕성 때문이었다. 이 사람들은 OSS에서의 전쟁 경험, 차이나 카우보이로서의 좋았던 시절에 대한 기억, 모두가 더러운 음모에 개입된 냉전의 전사였던 전후 CIA 형성기의 기억을 공유하지 않았다. 노장파(Old Guard)는 샌티와 직접 안면이 있었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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