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차베스?

조선일보 2002년 5월 18일자에 실린 김대중 칼럼은, 그 무렵 IPI(국제언론인협회)(이 단체가 궁금하신 분들은 <http://www.pilhwa.com/read.jsp?no=120>을 참고하기 바람) 총회 마지막 날 상영된 비디오를 소개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언론을 향해 내뱉은 주문(呪文) 같은 독설들을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칼럼 중에 인용된 차베스의 '주문같은 독설'은 이렇다.

   
"우리는 미디어와 싸울 것이다. 미디어의 소유주들은 지옥에나 가라. 그들은 대중매체를 그들 손아귀에 넣고 주무른다." "우리는 개혁의 적(敵)들이 누구인가 확인해야 한다. 대중매체는 반(反)사회적이다." "저들은 거짓의 신문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라. 반복해서 전파하라."

이 정도면 독설이라 할만하다. 베네수엘라의 상황과 '조폭언론에 대한 절독운동을 선동하는' 한국의 상황을 연결시키는 칼럼의 결말은 좀 의아하다. 하지만, 인용된 차베스의 말은 갈 데까지 다 가고 만다.

"내가 몇몇 TV 채널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그 TV들이 주장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문맥으로 볼 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라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 TV 소유주들을 국민 앞에 고발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국가이익의 이름으로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둔다."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이 칼럼에 따르면 그는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무지막지한 독재자임에 틀림없다.

TV에 안 나오는 혁명

며칠 전 <혁명은 TV에 나오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볼 기회가 있었다. 원제가 인 이 작품은 2003 반프 텔레비전 페스티벌에서 사회정치 다큐멘터리 부문에서 최우수상과 국제 텔레비전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는 등 2003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의 다큐멘터리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다큐멘터리는 앞에 인용한, IPI에서 상영된 비디오의 앞 상황을 이야기해준다. 2002년 4월 12일(현지시간 11일) 베네수엘라(Venezuela)에서 일어났던 반(反) 차베스 쿠데타와, 그 쿠데타를 제압하고 차베스가 다시 복귀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흥미롭고 놀라운 것은 이것과 관련해 우리에게 전해진 보도와 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몇 가지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극적인 정치적 사건이 만들어 내는 드라마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민중이 가지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열정이 어떻게 그들의 꿈을 지켜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세 번째 말의 의미 그대로 국민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도 감동적이다.

하지만 나는 '정치와 미디어', 정치의 결정적인 상황에서 미디어는 어떻게 작용하고 반작용하면서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는 게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제목이 함의하는 바이기도 하고, 두 감독이 역사의 결정적 순간에도 상황에 압도되지 않고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이기도 하다. 한 가지를 더 제안하자면, 앞에 인용한 칼럼의 내용과 당시 국내 언론의 보도 내용을 염두에 두고서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미디어가 가지는 현실규정력(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편의상 다큐멘터리의 줄거리를 따라가기로 한다. 

차베스, 언론의 덫에 걸리다

'작은 베네치아'(little Venice)라는 뜻의 베네주엘라는 세계 4위의 석유 생산국임에도 불구하고, 국부는 상위 계층에만 분배되고 80%가 그 혜택과는 거리가 먼 빈민층이다. 먹고살기에 바쁜 그들에게 정치는 언제나 남의 이야기였다. 이들의 정치의식을 일깨운 것은 차베스였다.

1954년 베네수엘라 서부의 한 농촌에서 태어난 우고 차베스는 1992년 쿠데타에 실패한 후, 옥고를 치렀다. 민중의 영웅으로 돌아온 그는 98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99년 헌법을 개헌한 뒤 2000년 임기 6년의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차베스는 국민들에게 헌법(볼리바르 헌법)을 읽고 사고하라고 말한다. 그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것을 적극 활용하도록 참모들에게 강조한다. 그 스스로 국영TV인 채널8에 나와 국민들의 호소를 직접 듣는다.

베네주엘라에는 국영TV인 8번 채널 외에도 다섯 개의 상업방송사들이 있다. 5개의 상업 텔레비전은 모두 막강한 경제권력자들의 소유다. 과거 독재정권과는 달리 완전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한 차베스는 바로 그 때문에 5개의 거대 미디어들로부터 공격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들의 비난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것들이다.

"차베스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추잡한 성적 관계를 맺었다." "차베스는 정신병자", "새로운 변화를 이야기해야 할 순간이 왔다. 물론 차베스를 배제한 변화라는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 기득권층과 상업방송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이 다큐멘터리는 시사한다. 차베스의 개혁 정책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하는 상업채널들이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미국의  입장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이다.

미디어가 조작한 현실

2002년 2월, 차베스가 "베네수엘라의 부는 소수의 것이 아니"라면서 국영석유회사(Petroleos de Venezuela)를 재편해, 정부측 인사를 이사진에 포함시키려 할 때도 기득권층은 더 노골적으로 미국의 힘에 기댄다. 기득권층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반 차베스 진영의 주요인물인 경제인 연합회장 페드로 카르모나(Pedro Carmona)와 노조 지도자 카를로스 오르테가(Carlos Ortega)는 워싱턴을 방문해 부시 행정부와 접촉한다. 미국 CIA 국장 조지 테네트(George Tennet)가 차베스의 개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상업방송들은 꼼꼼하게 챙겨서 방송한다.

이것이 신호였는지 모른다. 베네수엘라의 군 장성 그룹이 CIA의 우려에 동조, 4월 11일 한 장성이 모든 상업 TV에 출연해 차베스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차베스는 하야하라." 그날 경제인연합회장 페드로 카르모나는 역시 TV에 출연해 "국영석유회사를 향한 반정부 시위 행진"을 호소한다.

이제부터 이 다큐멘터리는 미디어가 어떻게 진실을 조작하는가, 그 조작된 진실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시켜 나가는가에 초점이 맞춘다. 다음 날인 12일, 대통령궁 주변에는 차베스 지지자들이 모여 있다. 국영석유회사를 향하던 반 차베스 시위대는 갑자기 "대통령궁으로 가 차베스를 끌어내자"며 방향을 바꾼다. 반 차베스 시위대가 대통령궁에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총격이 시작되고 반 차베스 시위대 중 몇 사람이 쓰러졌다.

차베스 지지자들 틈에 있었던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들은 '총격이 차베스 지지자들이 쏜 게 아니라, 다른 방향에서 저격수들이 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업방송들은 '차베스의 지지자들이 시위군중을 학살했다'고 연거푸 방송했다. 차베스 지지자들이 총을 쏘는 모습을 보여주며, 반 차베스 시위 군중을 향해 쏘고 있다고 말한다. 차베스 지지자들이 쏘는 방향은 보여주지 않는다. 방송되지 않은 촬영 원본에는 차베스 지지자들이 총격하는 방향의 도로에는 반 차베스 시위대가 없다. 그들은 숨어있는 저격자들을 향해서 쏜 것이었다.

상업방송들은 엉뚱하게도 학살의 책임자로 차베스를 몰아세우며, 대통령이 책임지고 물러나라, 모든 군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서 쿠데타를 선동한다. 군 장성들이 차베스 지지 철회를 선언하고 곧 국영방송인 채널 8번이 장악된다. 이제 차베스로서는 진실을 알릴 수단이 사라져 버렸다. 차베스와 각료들은 외부로부터 고립된다. 미디어로부터 차단된 공간, 그 안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상업TV들만 차베스를 공격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진실을 만들어 나간다.'

대통령궁을 찾아온 군인들은 차베스가 대통령직을 사임하지 않으면 대통령궁을 폭격하겠다고 위협한다. 버티던 차베스는 마지막 순간에 체포에 응했지만 사임 요구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각료가 울부짖으며 외친다. "차베스는 사임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백한 쿠데타다.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모든 매체가 쿠데타 세력에 장악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알린단 말인가?

이것으로 쿠데타 세력과 상업방송이 조작해 낸 진실은 공식적인 진실이 된다. 미디어가 말하는 것이 '진실'로서의 힘을 갖는다. 현실은 미디어에 의해서 재구성된다. 무엇이 진실인가? '차베스는 평화적인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학살자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에서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차베스 동조자들의 총격을 받았다'(Their loved ones were gunned down, first by sympathizers of Mr. Chavez…)고 말했다. 국내 언론 보도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시위대는 대통령궁 앞으로 몰려가 격렬한 투석 시위를 벌였고, 친 차베스 군 병력은 이를 유혈 진압'했으며, 차베스는 '군부(軍部)의 퇴진 압력에 굴복, 12일 새벽(현지시각)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조선일보, 2002.4.13)

미디어 쿠데타

도대체 참된 진실은 무엇인가? 왜 시위가 쿠데타로 발전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우발적이었는가? 4월 12일 6시부터 상업방송들은 자신들의 전과를 자랑하면서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그 내막을 폭로(?)하고 만다. 4월 10일 장성의 '하야' 발언은 사회자의 집에서 이루어졌으며, 코스타리카를 방문하려던 차베스를 국내에 묶어두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 다음 우선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하고 절정에 이르렀을 때 군대를 출동시킨다…. 우연한 사건의 진전인 것처럼 보였던 쿠데타는 미디어가 군부와 공모한, 철저히 계획적인 것이었다. 차베스가 체포된 뒤, 한 각료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의 신이 승리했다." 죽음의 신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를 장악했기 때문이고, 그 미디어들이 진실을 조작했기 때문이다.

거리에서는 차베스 지지자들의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상업방송들은 "나라 전체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방송한다. 검열이 시작된다. 차베스 지지자들을 TV에 등장시키지 말라는 것이 지침이었다.

그날 오후, 경제인 연합회장 페드로 카르모나가 대통령에 취임하고 차베스의 각료들을 전원 해임한다. 차베스의 개혁 정책들이 폐기된다. 미국 정부는 대변인 논평을 통해, "차베스 정부가 초래한 일"이라고 말한다.

미디어의 힘과 민중

이제 모든 것이 끝나버렸는가? 아무리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의 외피를 뒤집어 쓰고 힘을 얻기 시작하는 순간, 참된 진실은 패배할 수밖에 없는가?

<혁명…>은 참된 진실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차베스의 복귀는 극적이다. 그것 역시 미디어에서 시작된다. 차베스의 각료들이 해외의 케이블 방송을 통해 차베스가 사임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린 것이다. 사실 케이블 방송의 힘은 5개의 상업방송 채널의 힘에 비교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 힘의 부족은 진실의 힘과 민중들의 차베스에 대한 열망에 의해 채워진다.

차베스가 사임한 게 아니라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가며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한다. 수천 명의 차베스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대통령궁을 포위해 버린다. 오후 2시에 차베스의 경호대가 대통령궁 탈환 작전에 돌입하자 카르모나가 도망가 버린다. 볼리바르 헌법에 의해, 부통령 디오스다오 카베요(Diosdao Cabello)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 와중에도 쿠데타 세력들은 CNN 방송에 "소요가 좀 있긴 하지만 우리는 완전히 장악"했다고 말한다.

외신을 인용한 국내 언론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도했는가? "군부의 추대로 과도정부 수반에 올랐던 카르모나는 취임 27시간 만인 13일 밤 '의회는 대통령직을 카베요 부통령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며 자진 사임했다."(조선일보, 2002.4.15)

국영방송 채널 8번이 다시 탈환되고 저녁 8시에야 비로소 상황을 제대로 알릴 수 있게 된다. 대통령궁 경호대장은 군부에 호소한다. "군대를 재편해서 민중의 지원을 받으라." 상황을 알게 된 하사관과 병사들이 차례로 차베스 지지를 발표하면서 군의 쿠데타 주도 세력은 고립된다. 다음 날 새벽, 3개 특공대에 의해서 구출된 차베스가 돌아온다. 차베스는 결코 들뜨지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한다.

"여러분이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민중들이 역사를 만든 겁니다…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길 바랍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은 반대하라고 하시오. 하지만 여러분은 헌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 이후

베네수엘라의 상황은 여전히 소수의 차베스 반대파와 다수의 차베스 지지파들로 나뉘어 있다. 외신들은 여전히 차베스의 '독재'를 부각시키는데 열중이고 우리도 덩달아 따라간다. 우리는 끊임없이, 미국에 기댄 베네수엘라의 거대언론들이 제공한 틀(frame)에 따라 베네수엘라와 차베스를 보고 있는 셈이다. <혁명…>은 그 틀이 전혀 거짓이거나, 적어도 일방적일지 모른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김환균 / MBC PD

   

김환균PD는 87년 MBC에 입사해 줄곧 교양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인간시대>, <신인간시대>, ,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부작 다큐멘터리 <체르노빌, 그 후 10년>, 시리즈 등을 연출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전국문화방송 노동조합 사무처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2004년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의 프로듀서상’(95)과 ‘통일언론상 대상’(96, 99)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엠네스티 언론상(<이제는 말할 수 있다-민족일보와 조용수> 2000년), '방송대상'( 2003)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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