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1947년 인천

1947년 9월16일, 한 미국 젊은이가 인천항에서 터키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의 옆에는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동행했다. 그들은 뭔가에 쫓기는 듯이 두리번거리며 불안해했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이었다. 그는 해방된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 군정에서 정보를 담당한 요원이었다. 공식적인 '군사'(軍史)인 『주한미군사』의 집필에 참여한 역사가이기도 했다.

그는 쫓기고 있었다. 체포 명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옥죄어오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해외로부터 수상한 전보들이 군정청으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FBI인 것 같은데 분명치는 않았다. 운 좋게도 그는 그 전보들을 볼 수 있는 부서에 있었다. 방첩대 요원들이 몇 달째 그를 미행하기도 했다. 그는 좌익의 대변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공산당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배신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배가 이내 기적을 울렸다. 인천항이 가물가물해질 때에야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24살에 한국에 와서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민들의 격동적인 삶을 지켜본 2년이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국을 벗어났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배는 일본에 들르게 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맥아더의 극동사령부가 있었다. 거기에 무슨 조치가 하달되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요원들이 선장에게 리처드 로빈슨을 하선시키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선장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은 우리의 고객이며, 우리는 그들을 터키까지 안전하게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뱃삯을 받았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한참의 실갱이 후에야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다시 한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비로소 뭔가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자기를 꺼냈다. 자료를 가져올 수 없어서 그동안 기록해 둔 일기와 기억에 의존해 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쓰기 시작한 것은 한국에 와서 보고 겪은, 해방 이후 2년 동안의 역사였다.

   
▲ 미국의 배반』(원제는 Betrayal Of A Nation)
"『주한미군사』는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왜곡시킬 여지가 있다. 그 대부분이 '극비' 문서로 분류되어 있는 미군의 공식적인 남조선 점령의 역사는 아주 편견에 가득 차 있고 또한 부정확하게 기술되었다…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공식 하에 명백히 명령을 받은 상태에서 모든 기록들이 서술되었기 때문에 이야기의 진실성은 반감되었다…만약 진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은 곧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무능력하고 타락한 행정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의 남조선 점령 정책을 망쳐놓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배반』(원제는 'Betrayal Of A Nation'), 이 도발적이고 수상한 책은 이렇게 씌어지게 되었다.

금지된 책

리처드 로빈슨을 만나기 위해 시애틀 공항에 도착한 것은 지난 1월8일이었다. 그는 시애틀에서 1시간쯤 떨어진 기그 하버(Gig Harbour)라는 아름다운 마을에 살고 있었다. 내가 가지고 간 짐 속에는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미국의 배반'이 들어있었다. 그에게 그걸 전해 주어야 했다. 인터뷰의 대가로 그가 요구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 책은 1988년에 모 출판사에서 출간했으나 그 출판사는 이미 없어진 후였다. 대형서점 몇 군데에 연락했지만 재고조차 남은 게 없었고, 중고서점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고심 끝에 MBC 도서실의 소장본을 복사하기로 했고, 내가 들고 간 것은 그 복사본이었다.

26살의 청년은 이제 83살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를 만났을 때 내가 받은 느낌은 상당히 호의적이라는 것이었다. 사본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솔직하게 설명을 했다. 그는 그 책을 받아들더니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제목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의 배반(Betrayal of U.S.A)'이라고 일러줬더니 정확한 번역이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원고가 제대로 된 책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 나온 책은 사실 원본 없는 번역본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한국을 떠나는 배에서 쓰기 시작한 그 원고는 미국에서 발간될 수가 없었다. 어느 출판사에서도 출판을 맡아주는 곳이 없었다. 당시가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상태가 고조되어 가는 냉전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또 한반도는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 대치했던 유일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 군정의, 또 미국 정부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그의 책이 출간되기 힘들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원고는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 규정된 '표현의 자유' 바깥에 있어야 하는, '표현의 자유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는 1958년 다시 한번 책을 출간하려고 시도했다. 그가 한국을 떠난 후에 일어난 동강난 한반도에 세워진 두 개의 정부, 그리고 다시 2년 후에 터진 한국전쟁 등을 포함시켰다. 이번에도 그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때는 매카시즘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결국 존 메릴(John Merrill)의 요청에 의해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에 자신의 원고 사본을 기증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뒤늦게, 원고가 씌어진 지 약 40년 만에 한국에서 번역본이 나온 것이다.

책을 훑어보던 로빈슨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내 원고를 도둑질한 거요." 그 책을 번역하겠다든가,  출간하겠다든가 하는 연락이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어찌어찌 해서 한국에서 자신의 원고가 번역,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 이거 본의 아니게 범죄의 증거물을 건네준 게 아닌가 싶어 긴장되었다. 나는 내가 죄지은 듯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책을 가져다 주어 대단히 고맙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는 50년이 넘게 보관해 온 원고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터키로 가는 배 안에서 쓰기 시작한 그 원고였다. 정성스럽게 타자한 원고는 세월의 무게를 말해 주듯 빛이 바래 있었다.

누구의 무엇에 대한 배반인가?

리처드 로빈슨은 1945년 11월 군인으로서 한국에 왔다. 그러나 1년 만에 전역한 후 민간인으로서 군정청에 근무했다. 당시 한국에 있던 미국 주둔군들이 어떻게 해서든 한국을 빠져나가려 애썼던 반면, 그는 전역한 후에도 한국에 계속 남는 길을 선택했다. 한국에 대한 애정과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이제 스물 여섯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아직 어떤 형태를 갖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던 그 맹아기에 한 신생 독립국가의 탄생과 형성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마치 우주의 탄생을 지켜보는 것처럼 설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2년은 자신의 조국인 미국과 미 군정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쌓여 가는 시간이었다.

"미 군정 정책은 한마디로 실패였다. 첫째 한국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으며 두 번째로는 잘못된 사람들이 보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실수를 했다.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실패다. 미국은 어떤 면에서는 한국을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로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은 미국에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의 책에서 줄곧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미 군정의 제일의 목표는 민주적인 통일정부의 수립이 아니라, 소련과 공산 세력에 대한 방어벽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한국민과 미국의 최선의 이해관계를 배신했으며,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게 만들었다."

창밖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물안개가 피어올라 풍경을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세월은 물안개처럼 모든 날카로운 예각을 덮어버린다. 더군다나 반세기도 훨씬 넘는 세월이 지난 다음이라면 어쩌겠는가. 먼지 쌓인 책들이 가득한 세 평 남짓 되는 로빈슨의 서재에서 나는,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에 대해서 저지른 배신과 배반, 그 비밀을 전해 주는 한 노인의 육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곳은 시간이 강요한 은폐를 조심스럽게 거둬내는, 그래서 로빈슨의 청년이 다시 살아나는 마법의 장소였다. (다음에 계속)

   

김환균PD는 87년 MBC에 입사해 줄곧 교양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인간시대>, <신인간시대>, ,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부작 다큐멘터리 <체르노빌, 그 후 10년>, 시리즈 등을 연출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전국문화방송 노동조합 사무처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2004년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준비 하고 있다.
‘올해의 프로듀서상’(95)과 ‘통일언론상 대상’(96, 99)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엠네스티 언론상(<이제는 말할 수 있다-민족일보와 조용수> 2000년), '방송대상'( 2003)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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