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3사(KBS·MBC·EBS)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018~2019년 각사 비정규직 고용구조와 스태프·작가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산별협약을 맺었지만 이행은 사실상 ‘방치’ 상태에 놓인 것으로 나타났다. 각 방송사는 2018년 고용구조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개선안을 마련하기로 했지만 KBS만 일부 이행했다. 드라마 제작 스태프와 방송작가 고용·노동구조 개선 협의체도 1~2년 가까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KBS·MBC·SBS·EBS 등 지상파4사와 언론노조는 2018년 첫 산별협약을 맺었다. 산별 노사는 △공정방송 △제작환경 개선 △방송 공공성 강화 관련 18개 조항에 합의했다. 산별협약은 관계법령과 단체협약, 취업규칙에 우선 적용된다. 언론노조가 산별로 전환한 이후 18년 만의 ‘역사적 협약’으로 불렸다.

협약에 따르면 산별 노사는 고용환경 개선 조항(15조)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용구조를 개선하고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2018년 하반기 내 ‘고용구조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조사 대상에 무기계약직과 계약직, 프리랜서, 파견·용역·도급 노동자를 모두 포함하고, 개선방안까지 담기로 했다. 각사 노사가 협의해 전체 일정을 정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마련해 추진키로 했다.

드라마와 예능 분야 장시간 노동 문제도 해결하기로 했다. 장시간 제작 분야 특별대책으로 △드라마 제작 스태프 하루 최대 12시간 노동 원칙 △촬영 연장 시 15시간을 넘지 않도록 노력 △다음 근로일까지 충분한 휴식시간을 보장 △드라마 제작 시 방송사와 제작사가 스태프 노동자들과 촬영·휴게·식사 시간과 휴차 관련 협의 등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특별협의체를 꾸려 제작 구조 개선책도 마련키로 했다.

2년이 지난 뒤 각사는 협약을 어디까지 이행했을까. KBS의 경우 혁신추진부가 2018년 말~2019년 초 연구용역으로 ‘KBS 비정규직 고용구조 및 처우개선 연구’를 진행했다. KBS 사장단은 결과 브리핑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년 가까이 개선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KBS는 실태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언론노조 KBS본부 측은 “사측 이 ‘대외비’를 이유로 자료를 내놓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 ‘저널리즘 J’ 제작진 부당해고 사태와 표준계약서 미작성 논란이 불거졌다.

임병걸 KBS 부사장은 지난해 12월 시청자위원회에서 ‘J’ 논란에 “2년 전에 대대적인 조사를 하는 등 개선하는 방안들의 로드맵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KBS 홍보팀은 통화에서 “로드맵은 부서별로 이뤄지고 있다”며 “회사 차원의 종합적인 개선안 마련을 위한 논의도 함께 진행 중”이라고 했다.

▲지난 6월12일 지상파-언론노조 산별교섭 상견례 모습. ⓒ언론노조
▲2018년 6월12일 지상파-언론노조 산별교섭 상견례 모습. ⓒ언론노조

MBC와 EBS는 사실상 자사 고용구조 실태조사를 시행하지 않았다. SBS는 이듬해 노사관계 악화를 이유로 산별협약에서 탈퇴했다. 언론노조 MBC본부 측은 “2018년에 사내 파견 용역, 도급직 조사를 한 적이 있지만 산별협약에 따른 전사적인 실태조사를 진행한 바는 없다”며 “노사가 관련 일정을 정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했다.

EBS는 “2019~2020년에 걸쳐 방송운행보조, 콘텐츠 기획 등 계약직 업무를 전환심의위원회를 거쳐 정규직 전환했다”고 밝혔으나, 이는 산별협약 이행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에 따른 조치로 보인다. 당시 EBS는 정규직 전환 당시 재시험을 포함한 경쟁채용을 도입해 ‘해고’ 논란이 일었다. 이종풍 언론노조 EBS지부장은 “회 사 차원에서 산별협약에 따른 실태조사를 한 바는 없다고 안다”고 말했다.

방송작가협의체 지지부진, 드라마스태프협의체도 성과 아직

드라마와 예능 장시간 노동 현장도 산별협약과 따로 노는 실정이다.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은 “협약 자체가 현장에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52시간제가 방송사·제작사에 도입됐는데 오히려 노동시간 계측 방식이 바뀌었다”며 “과거엔 스태프가 여의도나 상암동에 집결하는 시간을 노동의 시작으로 쳤다면 이젠 스태프가 모여 버스로 현장에 도착한 뒤 세트를 마련하고 촬영을 시작하는 시점을 노동의 시작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촬영이 최대 15시간이라도 스태프가 새벽 6시 출근, 새벽 2시에 귀가하는 싸이클이 지속된다”고 전했다.

김 지부장은 “방송사는 제작비가 늘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고, 제작사는 촬영 시간이 부족한 상황을 두려워해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제작사나 PD에 따라 중구난방”이라고 했다. 언론노조와 방송3사, 드라마제작사협회,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등 4자는 2019년 4월 협의체를 발족해 표준인건비 기준을 마련하고 표준근로계약서를 도입키로 합의 했지만 정작 2년 가까이 여기에 담길 개선안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방송작가 문제 다자협의체도 공회전하고 있다. 언론노조와 지상파 3사 (KBS·MBC·EBS)는 2019년 산별협약에서 2020년 방송작가특별협의체를 가동하기로 했다. 산별 노사는 협약 13조에 “취재작가, 지역방송작가 등 방송작가들의 권익 보호와 계약서 개선을 통한 표준 계약서 제도의 안착화를 위해 특별협의체를 구성”하기로 조항을 신설했다. 언론노조는 당시 보도자료에서 “경영 여건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송산업 내 노동인권 개선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 모두 공감한 결과”라고 했다.

▲지상파 4사 KBS·MBC·SBS·EBS.
▲지상파 4사 KBS·MBC·SBS·EBS.

방송작가특별협의체는 지난해부터 취재작가와 보조작가, 지역방송사 작가 권익 보호 세부 내용과 표준계약서 안착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성이 명백한 이른바 막내작가의 노동자 인정 여부를 두고 방송사의 입장이 완강해 의견이 좁혀지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협의체는 결국 고용노동부가 방송사 취재 작가를 대상으로 ‘방송작가 근로조건 자율개선’ 위탁사업 보고서를 발표한 뒤 시점으로 회의를 미뤘다. 언론노조 등 각 주체가 노동부 요청으로 사업에 참여했으나 방송사는 응하지 않았다. 노동부 자율개선사업 보고서는 10일 발표된다.

이전 정부에서 공정방송 투쟁에 앞장섰던 인사들이 각사 경영진을 맡으며 호기롭게 산별협약 체결에 나섰지만, 정작 방송사 외면과 산별노조의 의지 부족으로 ‘용두사미’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언론노조와 산하 각사 노동조합이 이행 요구에 더 적극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산별협약은 위반 시 산별노조가 사측에 적극 이행요구하길 넘어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도 협약이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회사는 물론 산별노조도 방송사 비정규직 의제의 중요성을 낮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김 부소장은 “산별노조가 기업노조와 달리 조합원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 노동자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조직 형태라는 점에 미루면 더 무겁게 받아들일 문제”라며 “언론노조와 각사 지본부가 방송 비정규직·프리랜서 문제에 대한 관심도를 스스로 되짚고 사측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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