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 재검토위원회가 출범한지 벌써 5개월이 다되어간다. 적지 않은 시간과 예산이 투여되었지만, 국민적 토론이나 공론화는 시작도 못하고 있다. 지역주민이나 시민단체 등 주요한 이해관계자들의 재검토위원회 참여가 배제되면서 사실상 보이콧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재검토위원회는 이해당사자들에게 지역실행기구 등 재검토위원회 산하 기구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애초 잘못 끼운 단추를 바로 잡기는 요원해 보인다.

한편 언론에서는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고가 포화직전이라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한수원에 따르면, 월성 핵발전소의 임시저장고는 2021년 11월 경 포화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임시저장고 증설기간 19개월을 고려하면 올해 안에 임시저장고 증설 여부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고가 증설되지 않을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핵폐기물 임시저장고가 없어 핵발전소를 멈추는 일이 생긴다. 사용후핵연료에서 나오는 방사선은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폐핵연료를 보관할 임시저장고가 없으면, 새로운 핵연료를 원자로에 장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핵폐기장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정부나 핵산업계는 ‘더 이상 핵폐기장 건설을 늦출 수 없다’며 핵폐기장 증설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중저준위핵폐기물 문제가 대표적이다.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추진 당시 정부는 중저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고가 2000년 포화될 것이라며 시급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활성단층이 발견되어 굴업도 핵폐기장이 백지화된 이후에는 압축 기술 발달로 10여년 이상 저장 기간이 늘어났다며, 2010년 포화설로 말을 바꿨다. 이후 정부는 2008년 중저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고 포화를 주장하며 또다시 핵폐기장 부지 확보를 추진했으나, 정작 2015년 경주에 중저준위핵폐기장이 준공될 때까지 ‘핵폐기물 대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 핵폐기물. 사진=gettyimagesbank
▲ 핵폐기물. 사진=gettyimagesbank

고무줄처럼 포화시점이 늘어난 것도 문제이지만, ‘포화’, ‘임박’, ‘대란’ 같은 용어로 지역주민을 압박했던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이런 용어는 핵폐기물이 보관된 지역주민들에게 ‘너희가 조금 더 갖고 있어라’는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핵폐기장이 들어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법적으로도 불가능할뿐더러 대도시에서 대규모 반대운동이 벌어질 것을 좋아할 정부는 없다. 오죽했으면 1994년 주민이 채 1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섬 ‘굴업도’에 핵폐기장을 건설하려고 했겠는가? 인구가 적은 지역, 이미 핵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은 지금도 핵폐기장 유력 부지로 거론된다. 하물며 이미 핵발전소에 임시저장고가 있는 상황에서 임시저장고 증설을 계획하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에 ‘포화’, ‘임박’ 같은 단어가 계속 나오는 것은 결국 ‘기존 핵발전소 지역에 핵폐기물을 더 보관하라’는 이야기와 같은 말이 된다.

수십 년째 핵발전소와 함께 살고 있는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핵폐기물은 골치 덩어리이다. 특히 사용후핵연료처럼 방사선 준위가 높고, 오랜 기간 동안 보관해야 하는 핵폐기물의 경우 더욱 골칫거리이다. 당장 해체 절차에 돌입한 고리 1호기의 경우, 핵발전소는 해체되지만 조만간 설계수명 50년짜리 사용후핵연료 임시저장고가 들어설 예정이다. 고준위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확정되지 않는다면, 고리 핵발전소 부지에는 계속 고준위핵폐기물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핵폐기장 부지 확보가 계속 어려워진다면, 50년 뒤 또 다른 임시저장고를 고리 핵발전소 부지에 건설할 가능성마저 열려있다. 고리 1호기는 설계수명 30년을 마치고 10년 수명 연장하여 40년간 운영되었다. 하지만 고준위핵폐기물은 이보다 더 오랜 기간 동안 고리 핵발전소에 부지에 남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누가 지역주민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논쟁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최근 울산 북구 주민들은 경주 월성 핵폐기물 임시저장고 증설 반대 서명을 받고 있다. 울산 북구는 월성 핵발전소에서 7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임시저장고 증설 논의에 참여조차 못하고 있다. 경주 시내가 월성 핵발전소에서 20~25km 정도 떨어져 있음을 생각할 때 불합리한 일이다. 하지만 재검토위원회는 이렇게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논의에 참여시키기보다는 최소한의 지역주민들만을 대상으로 공론화를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다.

▲ 탈핵시민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9월18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천막농성 5주년을 맞아 전국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 탈핵시민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9월18일 오전 서울 세종대로 광화문광장에서 월성원전 인접지역 이주대책위원회 천막농성 5주년을 맞아 전국 동시다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연합뉴스

같은 사안이라도 누구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지는 매우 중요하다. 문제를 바라보는 서로의 태도와 처지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고준위핵폐기물처럼 이해당사자가 다양할 경우 문제 인식부터 해법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극소수 기사를 제외하고 고준위핵폐기물을 둘러싼 우리 언론의 기사는 천편일률적이다. 사업자가 제공한 정보와 의견만 기사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핵발전소를 지을 당시부터 예견된 임시저장고 포화시점이 왜 이제 와서 또 거론되는지, ‘임시’라는 표현이 과연 걸맞는 것인지, 왜 다른 행정구역 주민들이 반대운동을 펼치는 지 등에 대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인류 최대의 난제(難題)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고준위핵폐기물 문제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주민들의 목소리가 더 풍부하게 소개될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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