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들의 두려움 가운데 하나는 신체를 부정한 ‘수단’ 내지 ‘도구’로 활용했다는 손가락질이다. 일련의 ‘미투’(#MeToo) 운동으로 사회는 한 발 나아갔지만, 피해자들은 ‘꽃뱀’ 아니냐는 시선과 무고 역풍이라는 온갖 2차 가해에 시달렸다. 누군가를 욕보이기 위해 성을 내던질 수 있으며, 이 같은 ‘음모’가 쉽게 성립할 수 있다는 무지와 편견에 맞서야 했다.

자유한국당이 제기한 문희상 국회의장의 성추행 논란은 이 잘못된 편견을 강화했다는 점에서 모욕적이다. 문제가 된 장면을 돌아보자. 24일 문 의장이 한국당 의원 수십 명에게 점거된 의장실을 빠져나가려 하자 “여성 의원이 막아야 돼”라는 외침이 들렸고, 여성인 임이자 의원이 문 의장을 감싸며 가로 막았다. 임 의원이 “손 대면 성희롱”이라고 말하자, 문 의장은 두 손으로 임 의원의 양 볼을 감쌌다. 문 의장이 의장실을 빠져나가기 전까지 임 의원은 양 팔을 벌려 문 의장을 ‘전담 마크’했다.

여성이 몸으로 막아섰다고 신체 접촉이 무조건 용인될 수는 없다. 특히 문 의장이 ‘이러면 성희롱’이라는 제지에 오히려 볼을 감싸는 행위로 대응한 것은, 성폭력 문제 제기를 가벼이 여기거나 비웃음으로 무시하는 가해자 중심주의적 사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여성단체들 역시 “모욕감과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처였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며 “심각한 자기 반성과 성평등 인식 제고를 위해 국회의장으로서 마땅히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당 반발에 ‘자해공갈’이라며 억울함만을 표출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 문희상 국회의장이 24일 국회 의장실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제 개편안 및 공수처 설치법안 등 신속처리안건과 관련해 의장실을 점거하고 항의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 문희상 국회의장이 24일 국회 의장실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선거제 개편안 및 공수처 설치법안 등 신속처리안건과 관련해 의장실을 점거하고 항의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치고 있다. 사진=노컷뉴스

그럼에도 한국당이 제기한 성추행 의혹이 지지를 받기보다 ‘역풍’을 부른 이유는 단순하다. “여성 의원이 막아야 돼”라는 한마디에서 드러난 여성성에 대한 태도다. 남성을 막기 위해 여성의 신체 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 주장을 손쉽게 쓸 수 있다는 인식은 사실상 ‘꽃뱀론’과 맞닿아 있다. 단지 여성이 피해를 주장한다고 성폭력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당 내 수많은 법관 출신 의원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임 의원 논란이 불거진 뒤, 패스트트랙 저지를 위해 점거한 국회 회의실 앞 곳곳에 배치됐던 ‘여성 인간 띠’는 또 어떠한가.

한국당에서 임 의원을 품평하거나 비하하는 발언도 나왔다. 이채익 의원은 “키 작은 사람은 열등감이 있다”며 “문 의장이 서울 법대 나오고 승승장구했다고 못난 임이자 의원 같은 사람을 모멸감을 주고 조롱해도 되느냐”고 말했다. “결혼도 포기한 ‘올드 미스’(old miss)”라고도 말했다. 송희경 의원 또한 “(임 의원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황인데 수치와 모멸감이 어땠을지”라고 했다. 성추행과 전혀 관계 없는 혼인 여부를 들먹이며,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하자가 있거나 미완의 존재라는 인식마저 드러냈다.

‘미투’ 연대를 상징하는 흰 장미를 들고 국회 기자회견장에 섰던 한국당 여성 의원과 당직자들은 ‘문희상 의장 사퇴’만을 외쳤을 뿐, 여성을 소모품으로 내세우는 한국당의 태도에는 침묵했다. ‘더러운 잠’ 국회 전시 논란이 불거졌던 2017년 새누리당 전국여성의원협의회가 개최한 기자회견 당시 “예술을 빙자한 외설, 여성들은 분노한다”는 피켓 옆에 “표창원 네 마누라도 벗겨주마”라는 성희롱 문구가 적힌 피켓이 함께 세워졌던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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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한국당 여성 의원 및 당직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 자유한국당 여성 의원 및 당직자들이 24일 서울 여의도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사진=노지민 기자

“성폭력을 정쟁 도구로 삼지 말라”는 여성 단체들 지적에 한국당은 ‘희대의 막장 성명’이라는 비난으로 대응했다. 전희경 대변인은 27일 “여성의 이름을 앞세워 자유한국당 임이자 의원을 성추행한 문희상 국회의장의 추태를 감싸고 도는 희대의 막장 성명을 냈다”고 주장했다. “좌파 진영의 성추문과 성비위 사건들에는 입을 닫고 때아닌 묵비권을 시전하던 ‘내로남불’ 자칭 여성단체”라는 전형적인 가짜 프레임마저 동원했다. 흰 장미를 들었던 손으로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앞장서 온 단체들을 폄하하는 논평을 쓴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국회에 기대를 버릴 수 없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성폭력 관련 법안들이 있고, 여성 의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통과시켜주길 바라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전 대변인은 “여성의 이름을 앞세워 여성을 모욕하는 단체들은 오늘부터 단체명에 ‘여성’을 사용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논평을 마무리했다. 여성을 대표할 자격과 지위를 더 이상 쉽게 내팽개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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