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은 말한다. “이날 경연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과 영의정 윤자운(尹子雲)이 영사(領事: 경연관의 우두머리)로서 빈청에 있었다. 둘은 예전에 사신으로 가서 즐거웠던 일, 평양(平壤)과 황주(黃州) 기생의 미모에 대한 평가, 그녀들을 희롱한 일 등을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때가 국상기간인데다 가뭄까지 더해 백성이 굶주리는 실정인데도 김질 등은 재난 해결과 백성을 구제할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서로 음란한 말만 하였으니 장차 저 대신들을 어찌 쓸 것인가?” 성종 1년(1470년) 5월19일자 사신의 논평이다. 왕이 공부하는 자리인 신성한 경연에 나와서 한다는 말이 음담패설이었으니, 붓을 쥔 사신이 얼마나 한심했기에 쓸모없는 재상이라고 일갈하며 실록에 남겼을까.
김질과 윤자운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부원군(府院君)’이라는 명칭은 왕비의 아버지나 공신이 받던 작호(爵號)이다. 그렇다. 김질은 공신이었다. 조선 개국 1등 공신 김사형의 증손자였던 김질은 원래 세조 2년(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과 함께 상왕(노산군, 단종) 복위 도모에 참여했었다. 하지만, 실패를 우려해 그 사실을 장인이던 우찬성 정창손에게 말했고, 둘은 세조에게 성삼문 등을 밀고하여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게 했다. 사육신은 억울하게 역적의 죄명을 쓰고 사지가 찢겨지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손들까지도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김질과 정창손은 승승장구했다. 김질은 세조 즉위공신인 좌익공신 3등에 추가되었고, 성종 즉위공신인 좌리공신에 오르면서 상락부원군이 되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 정창손은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지만,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협조했다. 게다가 그의 고종사촌형이었던 홍원용이 세조의 손윗동서이기도 했다. 그는 세조 즉위 좌익공신은 물론이고, 충신 남이 장군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성종 즉위 좌리공신을 거쳐 성종 연간 영의정에까지 올랐지만, 사후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 되었다.
영의정 윤자운의 조부 윤회는 집현전 부제학 출신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집현전 학사였던 신숙주를 손녀사위로 들였다. 신숙주의 처남이자 윤회의 손자였던 윤자운도 집현전 부수찬 등 요직을 지냈지만, 매부 신숙주와 함께 수양대군 편에 섰다. 김질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공신에 봉해진 뒤 성종 1년(1470년) 55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라 한명회 등과 함께 국정을 도맡았다. 김질과 윤자운 모두 불의한 권력 편에 서서 갖은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이다.
최 의원의 출신지이자 지역구가 경북 영주이다. 바로 예의와 염치, 명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비정신’을 지역의 정체성으로 알리고 있는 곳이다. 그도 그럴것이 영주는 조선왕조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이 퇴계 이황의 청으로 소수서원으로 사액된 곳이고, 단종을 보살피던 금성대군이 친형 세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가히 선비의 고장이라고 이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