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삶 위해 10년 고민하다 지리산자락에 왔다
느린 삶 위해 10년 고민하다 지리산자락에 왔다
[인터뷰] 원유헌 전 한국일보 사진기자, 구례 귀농일기 모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출간

도시 집회 시위 현장에서 큰 카메라를 메고 사다리 타던 그는, 이제 멀리 노고단이 보이는 구례 어느 감나무 아래서 7단 3m 짜리 사다리를 탄다.

올해로 귀농 8년차가 되는 원유헌 전 한국일보 사진기자가 한국일보에 2년 간 연재했던 ‘원유헌의 구례일기’를 엮어 책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를 출간했다. 초여름 햇볕이 뜨겁던 15일 구례공용버스터미널 인근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지난 8년간의 귀농 얘기를 들어봤다.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그는 올해부터 이모작을 시작해서 밀을 베어야 하고 거기에 벼 모내기를 해야 하는 주간이라 바쁘다고 했다. 광명역을 출발한 KTX는 두 시간 만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구례공용버스터미널로 택시를 타고 가서 인근 할인마트에 들러 맥심 노란봉지 커피믹스 100개 들이 한 박스를 샀다. 그의 어지러운 농막을 찾아오는 이웃 농부인 장씨 아저씨와 D동생 등이 애용하게 될 거다. 약속 시간 10시에 터미널에서 그를 만나 그가 책 계약금을 받아 200만원 주고 샀다는 2003년식 흰색 봉고 프론티어 트럭에 올라타 담배를 필 수 있는 인근 카페로 옮겨 얘기를 나눴다. 짐칸에는 진흙투성이 관리기가 실려 있었다.

▲ 농부작가 원유헌 씨가 6얼 15일 자신의 논(전남 구례군 광의면)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가두기 전에, 관리기로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농부작가 원유헌 씨가 6얼 15일 자신의 논(전남 구례군 광의면)에 모내기를 하기 위해 물을 가두기 전에, 관리기로 논두렁 보수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왜 서울을 뜨고 싶었나?

서울 생활이 나랑 안 맞다고, 스스로를 부적응자라고 생각했다. 조직 부적응, 도시 부적응, 굳이 말하자면 자본주의 부적응. 내가 하는 ‘기자’라는 일이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고 생산적인 일인가 라는 회의가 계속 들었다. 물론 가끔 언론이 사회에 도움 될 때가 있긴 하지만 뉴스가 항상 생산되는 것도 아니고 없는 뉴스를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도 많고,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벌어지는 폭력도 있다. 데스크가 일 시킬 때 흔한 말로 ‘맨 땅에 헤딩해서라도 뭔가 찾아오라’고 할 때가 있다. 기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주머니 속에 쟁여 놨던 취재원을 찾아서 뭔가 가져오겠지만 그게 진정한 뉴스인지, 또 그 취재 과정에서 이건 하지 말아 달라 이건 아니다 하는 거를 된다, 맞다로 바꿔가면서 뉴스를 만들어내고... 그런 과정이 나와 잘 안 맞았고, 경쟁해야 되는 것도 싫었다. 아이의 교육과 환경 등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대표 도시? 서울에서 사는 게 맞나 고민했다.

- 다른 삶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1999년 IMF 여파로 동료들이 돌아가면서 무급휴직 하던 때였다. 부장에게 무작정 휴가계를 내고 아내와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갔다. 오전 내내 걷다가 점심 먹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우리랑 같이 묵었던 외국인들이 그제야 올라왔다. 해 떨어지기 전에 다음 로지까지 가려면 서두르랬더니 그들은 ‘우리는 더 안 간다 오늘 여기까지다.’ 하더니 벤치에 누워서 책을 읽더라.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내겐 충격이었다. 내가 왜 여기서도 바쁘게 가야하나? 뭐가 그렇게 나를 쪼길래 산도 잘 못타면서 힘들게 가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트래킹을 마치고 포카라로 내려왔더니 숙소 주인이 한국 사람이냐고 묻더라. 다른 외국인들은 보통 여기에 한 달 휴가를 오는데, 얼마 전 한국 의사 하나가 20년 만에 휴가를 왔다며 쉬다가 일주일 만에 가더라. 그러려면 여기 왜 오냐? 바쁜 한국 사람들 참 불쌍하다고 했다. 사람 사는 게 그들과 우리의 리듬이 참 다르구나 생각했다. 서울이란 도시에, 조직생활 하면서 스스로 순치된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해에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5살 때, 꿔왔던 작은 꿈을 실현했다. 아이와 함께 6박 7일에 걸쳐 지리산 종주를 성공한 거다.  대피소마다 다 예약하고 하루에 딱 한 구간씩만 갔다. 아침에 천천히 출발하고, 아들이 길 가던 중 벌레를 보고 놀겠다고 하면 주저앉아서 놀며 여유있게 갔다. 그렇게 해도 어떤 날은 오후 2시에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는데 사람들이 다음 산장까지 오늘 가려면 빨리 출발하라고 하더라. 나는 오늘은 더 안 갈 거라고 말했다. 반은 미친 사람처럼 보고 반은 부럽다고 생각하더라. 사는 것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원유헌 씨가 논두렁의 잡초들을 예초기로 베어내는 모습 뒤로 지리산 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원유헌 씨가 뙤약볕 아래서 논두렁의 잡초들을 예초기로 베어내는 모습 뒤로 지리산 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구례군 용방면에 자리 잡은 이유는?

마흔다섯에 구례로 내려왔다. 서울 뜨자고 맘먹은 지는 그 10년 전이고, 마지막 3년은 집중적으로 알아봤다. 뚱뚱하고 다리도 짧아서 산은 잘 못타지만, 지리산을 참 좋아해서 그 주변인 남원, 구례, 산청, 함양 등 많이 알아봤다. 나는 농사를 지어야 하니 농지가 싸야 하는데 지리산 이름값 때문에 비싸더라. 아내에게 "여기는 누구나 좋아하는 ‘장동건’, 지금으로 치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나오는 ‘정해인’ 같은 땅인데 여기가 나를 선택해 줄지는 모르겠어. 꼭 고집하진 말자." 고 했다. 그래서 처음 정한 곳은 진안이었다. 계약 완료 직전에 아내가 ‘그래도 구례였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 말은 들어야 될 것 같더라. 귀농귀촌 결심하는 사람들이 제일 힘든 게 가족 설득하는 건데 같이 내려와 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서 구례를 1년 정도 더 알아봤다. 방송작가였던 아내의 지인이 아버지가 구례에서 마을 이장하시는데 가보라고 했다. 그 이장님이 구례 전역 땅을 알아봐주셨다. 그러다가 마을 근처에 땅을 하나 얻게 되고, 집 자리를 알아보다가 그 마을로 들어가게 됐다. 용방면 사림마을.

- 연고없는 곳에서 적응하는건 어렵지 않았나?

서울을 떠나 생산적인 일이나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일을 찾다보니 농사로 귀결되더라. 귀농학교 다녀보니 나랑 딱 맞았다. 양평 같은 곳은 이미 농촌이라 보기 힘들었다. 내가 여기말로 ‘깨꼬롬’하게 생기질 않은 게 다행인 것 같다.  3대가 구례 살았을 것 같은 사람이, 3대가 서울 사람이라고 거짓말 한다고 했다.(웃음) 여기 사람들이 거리감을 두지 않더라. 내가 서울 사람입네 하거나 말, 태도가 좀 이질적이었다면 힘든 것도 있었을거다. 마을 사람들이 텃세는 없지만, 외부인에 대한 경계는 당연히 있다. 서울에 어떤 구나 동으로 들어가는 거랑 다르게, 나름대로 몇 천 년 동안 농사 지어오면서 형성된 공동체란 질서가 있고, 거기에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 스며들어 왔으니. 잘하려고 애쓰진 않았지만 적어도 깍쟁이처럼 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좋게 봐주더라. 저 양반이 우리 마을 들어온 게 참 다행이다. ‘와줘서 고맙소’ 라는 말도 듣게 됐다.

- 구례일기 보면 참 열심히 해왔더라. 힘도 많이 들었을텐데.

팔씨름 대회 나가면 1등 하곤 할 만큼 힘은 좋다. 그런데 그 근육이랑 농사 근육은 다르더라. 처음에는 내 나름 정한 원칙대로 최대한 탄소발생 줄여보자는 생각에 농기계도 안사고, 내 밭은 괭이로 다 갈아보자 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밭갈고 있는데 이장님이 오셔서 '큰일 날 짓 하지 마소' 하면서 동네 형님에게 전화해 트랙터로 20분 만에 갈아버리더라. 그렇게 해봤던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됐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단기간의 싸움이 아니니까 몸을 아껴가면서 농사를 해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기 보니 나이 80까지도 농사를 지으신다. 물론 그분들도 골병, 흔히 말하는 근골격계 질환은 다 갖고 계시지만 그래도 농사의 장점이란게 어쨌든 정년이 없다는 거다. 대신 농기계가 필요한데 농사를 해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싸다. 농부들의 꿈인 트랙터는 최소 3천에서 큰 거는 억대까지 간다. 농사가 험한 일이다 보니 소모품이 많이 들어가고 수리비도 비싸다. 대부분 농기계가 쓸 만한 것은 일본 등 외국 제품인데 국산보다 4-50% 비싸다. 300만원 이하 기계는 정부에서 50%까지 지원해주지만 그런 품목은 가격이 두 배가 돼서 명목상은 농민 보조금인데 그 이익이 고스란히 기업으로 간다. 농업에 대한 의식이나 사회구조가 아직도 많이 모자라다.

- 귀농할 때 차에서 아들이 울었다는데 그때 아들은 뭐라고 했나.

귀농할 때 아들 선재는 13살로 대안학교인 청계자유발도르프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들에게 ‘네가 이 결정에서 빠져있지 않다. 너를 위해서라도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더해졌다’고 설명은 많이 했다. 반항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않더라. 워낙 친구들이랑 노는 거 좋아하고 그 관계가 전부였는데 부모의 결정으로 거기에서 떠나야 한다다는 걸 힘들어했다. 내색 안하다가 내려가는 차 안에서 울 때 ‘나중엔 이해하겠지 생각하면서도 저 어린 게 심정이 어떨까’ 맘이 많이 아프고 미안했다. 지난해 대학 합격 발표나자마자 예전에 가족 여행 한 번 갈 것 이라고 만들어놨던 돈으로, 한 달간 셋이서 스페인에 갔었다.  그 여행에서 아들이 구례 내려온 거에 만족하고, 엄마아빠가 자랑스럽고 고맙다고 얘기해줬다.

청계학교 친구들 5명 정도는 연락하고 지낸다. 다들 각자 재수, 한국대학 진학, 미국행 등으로 흩어졌다. 미국 간 친구가 구례에 놀러왔었는데 그간 얘기 나누고 나서 ‘걔는 아직 자기가 어떻게 될지, 뭘 해야 할지 모른데. 그 친구가 오히려 더 불확실한 것 같아서 걱정이야’라고 하더라. 올해 초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하던 날 아빠 축구 안 봐요? 하고 아들이 새벽 네 시에 전화를 했다. 친구들이랑 축구 보다가 아빠가 멋있는 농부라고 자랑했는데 애들이 웃어서 열 받아서 싸웠대나? 구례일기 연재할 때 아들이 좋아하는 문학 선생님이 그 글 보고 ‘아빠가 훌륭하신 분이다’라고 얘기해줘서 아들이 좋았다고 하더라. 고마운 일이다.

- 구례 중고등학교 교육환경은 어떤가?

구례동중-구례고 . 교육환경은 대단히 좋다. 무엇보다 애들이 착하다. 도시에서 많이 겪는 학교폭력 이런 게 적고. 아는 선생님이 경기도에서 근무하다 구례고로 왔는데 그 분 얘기가, 학교마다 3위 (교사, 학생, 학부모) 1체 얘기하는데 여긴 그게 다 돼있다고 하더라. 아들 고3때 ‘애들 쫌 있으면 졸업하겠네’ 이런 말하다가 선생님들끼리 울었다고. 참 잘 생활했던, 착하고 이쁜 애들인데 이제 졸업을 하는구나라고. 진학률도 서울 웬만한 일반고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한 학년이 120명 정도로 적어서 다른 학년과도 관계형성이 쉽다. 학교 형이나 동생을 집에 데리고 와서 놀다가 재우기도 하고 아들도 자고 오기도 하고 어울리며, 형제가 없었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공동체를 만들어 준 셈이다. 구례읍내에서는 다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쁜 짓도 쉽게 못하고. 서울 살 때는 잘 몰랐는데 명절 때 전날이나 명절 저녁에 고향에 가면 친구들끼리 만나는 게 큰 행사더라. 그런데 아들이 자기도 나중에 고향에 내려오면 만날 친구들이 있어서 참 좋다고 하더라. 

여기서 농사 짓는 친구 아들이 순천고 다니는데, 기숙사 있으면서 영어가 딸리니끼 과외를 좀 받았으면 좋겠다 하기에 친구들에게 물어봐서 같이 받아라 했는데. 친한 친구들인데도 누구한테 과외를 받는지 어느 학원이 좋은지 말을 안해주더라는 거다. 서울은 이미 그렇더라고. 그래서 '돼지엄마'라는 말이 나온 거고. 구례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 공교육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교육을 잘 시키는 것보다 나쁜 교육을 안 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학교를 가서도 잘하지 않아도 된다, 약한 사람 괴롭히지 말고 여자들 잘 보호하고, 나중에 커서 과거를 돌아봤을 때 후회할 만한 짓은 하지 말고 살라'고 가르쳤다.

이번에 선재가 대학 진학하면서 독립했다. 이제 스무살인데 학비(등록금, 교재비)는 줄테니 의식주 생활비는 벌어서 쓰라고 했다. 부모가 돈을 지원하게 되면 자꾸 간섭하고 싶어지고 중요한 결정도 부모를 따라야 할테니 독립해보고 힘들면 그때 지원요청 하라고 했다. 한 학기 지났는데 해볼만 하더라. 고등학교 때도 돈이 크게 들진 않았지만, 학원 하나 보낼 때 들던 2-30만원이 안들어가니 더 낳아졌다. 등록금은 목돈이라 퇴직금에서 떼놨던 게 있고 지금은 부부가 먹고 살면 되는 정도다.

- 귀농할 때 아내는 어떻게 설득했나?

귀농은 내가 먼저 얘기했다. 아내가 보기에 내가 직장생활을 너무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려가자는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고. 여기 오면 더 행복하게 해 줄 걸로 믿었더니 그것도 아니라며 불만이 많다. (웃음) 아내는 EBS에서 방송작가로 일하며 ‘하나뿐인 지구’, ‘부모’ 등 제작에 오래 참여했었다. 지금은 피아골에 있는 연곡분교 보조교사로 일하며 심리학쪽에 관심을 갖고 서울 오가며 치유글쓰기를 하고 대학원도 준비 중이다. 아직도 아내는 서울을 그리워한다.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자주 보고, 자주 통화하지 않으면 못 견디더라. 친구문제만 해결되면 구례 같은 곳은 서울 변두리 정도로만 생각하면 된다. 30분 거리에 순천도 있고 남원도 가깝다. 순천은 일산 정도의 도시다. 백화점 극장 등 문화시설이 다 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귀농에 별 문제 없다. 없는 사람 살기에는 겨울에도 따뜻한 남쪽이 좋다.

▲ 귀농8년차 농부에게도 질퍽질퍽한 논에서 관리기로 논둑 보수 작업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작은 바퀴가 푹푹 빠지자 큰 바퀴로 갈아 끼우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귀농8년차 농부에게도 질퍽질퍽한 논에서 관리기로 논둑 보수 작업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작은 바퀴가 푹푹 빠지자 큰 바퀴로 갈아 끼우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구례일기 보면 ‘나라가 작정하고 막으려는 게 농업인 것 같다’고 했는데, 문재인 정부의 농업 정책은 그 전보다 개선된 것이 있는지?

없다. 기억에 남는 게 있나? 문재인 대통령 입에서 농업, 농민 나온 적이 거의 없다. 공약에는 있었겠지만 공약도 기억나는 게 없다. 광역단체 등 지자체에서 보조금 주면서 친환경 단지를 늘리겠다고 하는데 (박준영 도지사 때 늘리긴 늘렸다.) 친환경 할 의지가 없는 사람한테도 지으라고 한다. 그러면 일단 보조금 받고 하다가 걸리면 ‘나 못해’ 하고 나가떨어진다. 결국 친환경 농지는 늘렸지만 친환경 농사가 진행되는 건 아니다. 전혀 구체적인 고민이 없다. 

지방선거에 군수후보로 나온 사람과 토론을 했다. 농사가 몇 차 산업 이라고 생각하나? 국방은? 하니까 머뭇거리더라. 나는 농업이 국방과 비슷하다고 본다. 농업은 경제적 잣대로는 해결 안 된다. 독일, 오스트리아는 농업자격증이 있으며 그들에게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준다. 국민들이 농민 생각하기를 우리 먹거리를 보장해주는 사람들로 알며, 그것은 군인이 나라를 지켜주는 거랑 똑같은 거다. 아무나 농사를 못 짓고 농약도 처방 받아야 살 수 있다. 농민의 아들은 농민이 될 수 있지만, 귀농하려면 교육을 2, 3년 받고 자격증을 따야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300평 이상 농지만 있으면 농민이 된다. 쌀이 남는다고 해서 쌀 재배면적 줄이고 논도 밭작물 재배로 돌리면 지원금 주고 하는데. 나중에 큰 일 날 거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식량주권에 대해 심각한 고민이 없다.

- 장씨 아저씨가 '자네 나이에는 농업정책에 문제가 있으면 나라에 외칠 건 외치고, 데모할 건 해야 할 때'라고 하시는데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어떤가?

내가 서울, 조직 떠나서 내려온 것은 깊은 산 속 스님처럼 살겠다는 건 아니었다. 서울에서도 언론노조 지부 사무국장 할 때는 깃발 들고 집회도 나가고 했는데, 그때랑은 다르게 조금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게 있다. 귀농 초기 농민회에 들긴 했다. 뭐라도 하다 온 사람 같으니까 사람들이 활동 좀 해라했는데, 안 나섰던 게 내가 아직 농민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 상태에서 글을 좀 써준다, 작업을 좀 도와준다 하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일단 내가 진짜 농민이 되고 나서 농민과 관련된 걸 느껴야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작년 밥쌀 수입 반대, 농업 정책 규탄을 외치며 농민회원들과 버스타고 서울 올라갈 때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갔다. 그러고 싶었다.

- 그 날, 백남기 농민이 쓰러졌다. 

기자 시절 퇴근 버스 타던, 한국은행 쪽에 도착해서 행진하고 시위 대열에 동참했다가 밤이 늦어 버스는 구례로 가고 D동생이랑 몇 명 남았다. D가 '나도 최루액 맞더라도 열심히 시위해야겠다' 해서 한참 하다가 지쳐서 빠져나와 지하철 탔는데 타자마자 스마트폰에 백남기 농민 속보가 뜨더라. 너무 놀랬다. 지금도 거기서 일찍 빠져 나온 것에 대한 채무감 그런 것이 있다.

▲ 예초기 작업을 마친 원유헌 씨가 휴식을 위해 차를 세워둔 논 옆 길가로 걸어가고 있다. 안면보호 헬멧속으로 구슬땀이 흘러내린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예초기 작업을 마친 원유헌 씨가 휴식을 위해 차를 세워둔 논 옆 길가로 걸어가고 있다. 안면보호 헬멧속으로 구슬땀이 흘러내린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책 반응은?

두 가지 기억난다. 하나는 연재 다 마치고 받은 이메일인데 제목이 “고맙습니다. 덕분에 귀농 접었습니다.”였다. 내가 바라던 반응이기도 했다. 무작정 낭만적 생각으로 귀농하는 사람들은 말리고 싶다. 다른 한 분은 미국에 사는 칠순 할머니인데, 고향이 순천이라며 먼 타향에서 구례일기 읽는데 농사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좋았다고 하셨다. 한국 가면 들를 테니 보자고 했는데 정말 구례까지 일부러 버스타고 택시 타고 오셨더라. 열심히 사는 모습 멀리서나마 계속 응원하겠다고 했다. 일하다가 아플 때 먹으라고 애드빌이라는 진통제도 한 통 주고 가셨다. 영광이다. 제일 듣기 민망한 것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기자’라고 부를 때다. 작가라고 부르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도 불편하다고 얘기했다.

읽은 사람들 평이 다행히 괜찮다. 읍내 동갑내기 자동차공업소 사장이 좋은 물건 나왔다고 소개해줘서, 농사에 꼭 필요한 트럭을 200만원에 큰맘 주고 샀다.  대만족이다. 트럭은 승용차와 달리 폐차해도 100만원은 받는다.

- 책에 생각이 많아졌다 했는데, 무슨 생각인가?

어떻게 하면 길게 갈 수 있는가? 이다. 귀농한지 만 7년 지났고 8년차에 접어든다. 미세조정을 하는 시기다. 조금 더 수입을 늘릴 수 있는 방법, 조금 더 일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한다. 이제는 근육도 농사용으로 바뀌는 것 같다. 처음엔 하루 일하면 몸 져 누웠는데, 지금은 힘들다 느낄 정도지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다. 농사를 지어서 흔히 말하는 일억 수입? 그런 건 꿈꾸면 안 된다. 매출 1억이면 3-4천 남고 그정도 돼야 성공했다고 얘기하는 건데 요즘은 많이 버느니 적게 쓰자라고 맘 먹는다. 

그리고 꼰대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많이 한다. 요즘 들어 특히 귀농 관련이나 이런 걸로 물어올 때, 누굴 가르치려 드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만 7년 했답시고 내가 아는 게 전부인양 얘기하고 이건 맞다 틀리다 얘기 할 때 좀 더 조심스러워져야겠더라. 여기 노인이라는 연배의 분들이 마인드가 젊다. 내가 아직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자신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도 많고 해서, 도시의 그 나이 대 분들보다는 권위주의가 적다. 나도 내 칠순 잔치에서 동네 어르신들한테 술 따라 드리는 마을 분들처럼 됐으면 좋겠다. 52살이면 회사다녔으면 부장 근처 갔겠다. 내가 젊었을 때 신문사에서 보던 부장들의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다 털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서 말 하거나 글을 쓸 때도 조심하게 된다. 생긴 건 어쩔 수 없지만 (웃음) 마음이라도 덜 늙었으면.

▲ 원유헌 작가가 구례일기를 모아 펴낸 책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사진= 르네상스
▲ 원유헌 작가가 구례일기를 모아 펴낸 책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 사진= 르네상스

-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은?

쌀 회원제다. 쌀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서 소비자들이 1년 내내 먹고 싶어하는데 내 생산량으론 일 년에 1-2번 보낼 수밖에 없다. 책에도 썼지만 꿈이 있다면 내셔널 트러스트 제도를 쌀농지에 적용하는 거다. 내가 농지를 많이 살 돈이 없으니 회원 한 명이 한 구좌 사면 (논 2-300평) 15년 간 못 찾아간다. 그 돈으로 내가 농지를 사서 쌀농사 지어서 쌀로 주거나 농지 임대료를 주는 거다. 줄어가는 쌀 농지를 보전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땅에서 농사로 나오는 수익이 은행 이자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래도 나는 할 생각이 있지만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머뭇거리고 있다.

- 귀농 초기에 세운 3원칙은 잘 지키고 있는지?

사람이 편하기 위해 비닐을 쓰는 멀칭(mulching : 농작물의 뿌리 보호, 잡초 방지, 온도 유지 등을 위해 짚이나 비닐 등으로 덮는 것) 안하겠다. 사람이 못 먹는 나쁜 농약을 안 넣겠다. 사람을 사서 쓰지 않겠다. 이 세가지 원칙이었는데 그 중 하나를 금년부터 못 지키고 있다. 이웃인 85세 간전댁 할머니가 오셔서 몰래 우리 밭 풀을 메주시는 것을 막으려는 거다. 우리 농장과 할머니 댁이 2km 떨어져 있다. 와서 도와주십사 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트럭으로 모셔오는데, 건강이 걱정돼 너무 자주 도와주러 오시면 안된다고 하니까 몰래 걸어오신다. 여름에는 풀 메다가 쓰러지실까봐 걱정이다. 그래서 재활용 가능한 제초매트를 쓴다.

- 서울 외 지역에서 농부로 살면서 언론, 미디어가 농업을 다루는 데 아쉬운 부분은?

현실 그대로를 반영하고 부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종편과 지방방송의 ‘인간극장류’ 프로그램 제작진이 나를 찍으러 오겠다고 연락을 몇 번 해왔다. 대번에 200만원 드릴 수 있다는 얘기하더라. 그래서 내가 ‘나도 사진기자를 했었는데 지금 그림도 안 좋고 그래서...’ 하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저희가 다 할 수 있다고’한다. 그러면 ‘연출 안 해도 되면 오라’고 하니까 못 오더라. ‘인간극장’ 이런 데서 우연히 어떤 친척이 찾아오고 그런 게 다 우연히 되겠냐. 만들어서 보여주려고 하는 거는 안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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