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해마다 찾아오는 조류 인플루엔자(AI) 파동으로 양계농가가 홍역을 치르며 시름을 앓고 있다. 지난해 11월16일 국내 가금농장에서 AI 바이러스가 발견된 후 두 달간 AI 예방적 살처분으로 및 매몰된 닭과 오리 등은 3200여만 마리에 이른다.

국내에 AI 감염 농장이 처음 신고된 2003년부터 지금까지 13년여 동안 AI 발생 현황은 다소 불규칙적이긴 했지만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 연말보다 더 심각한 AI 바이러스 창궐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다. AI는 인체 감염이 우려되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 중국에서는 2014년 이후 17명이 AI에 감염돼 10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게다가 세계일보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농가의 살처분 보상금 및 생계안정 자금 등 직접적인 비용에다 육류·육가공업 등 연관 산업에 미치는 간접적인 기회 손실 비용까지 합치면 AI 피해 규모가 1조 원을 훌쩍 넘어 머지않아 2조 원에 다다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매년 반복되는 AI 파동 사회적 비용만 1조 원

AI와 구제역 등 가축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정부는 방역 체계 개선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그동안의 임시방편들은 근본적 해결 대안도 아니고 실효성도 없었음을 이번 AI 파동이 또다시 확인해줬다.

정부 관계자를 비롯해 축산 전문가들도 국민 건강에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는 가축 전염병을 근본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이 늘 걱정하는 것은 ‘공급량’과 ‘비용’의 문제다. 면역력도 강하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 가축을 키우기 위해선 지금의 공장식 축산이 아닌 동물 복지농장으로의 전환이 필요한데 농가와 소비자의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이유다.

지난 2015년 10월18일 채널A ‘먹거리 X파일’ <동물 복지를 말한다> 편 방송 화면 갈무리.
일찍부터 공장식 밀집 사육을 법으로 금지하고 동물 복지농장으로의 전환을 추진한 유럽연합(EU)의 경우에도 지난해 11월 AI가 발견됐지만 확산 속도나 살처분된 가금류 수 등에서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중앙일보 보도를 보면 2003년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유럽에서 발생한 AI 건수는 영국이 3건, 독일은 8건, 스웨덴은 1건에 불과하다. 이들 국가에서 밀집 사육이 아닌 농장·방목 사육 비율은 영국이 48%, 독일 89%, 스웨덴 78%이다.

유럽 국가에서 밀집 사육 축산물보다 동물복지 축산물 가격이 더 비싼데도 수요가 늘고 있는 이유는 동물의 건강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라고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소비자들은 동물복지 축산물을 구입하는 것이 결국 동물 복지 향상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축산 농가의 수는 갈수록 줄고 있지만 농가당 가축 수는 오히려 늘어 그만큼 밀집 사육 위주의 축산이 이뤄지고 있다. AI나 구제역 파동이 발생할 때마다 축산물 가격이 폭등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인 셈이다.

실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AI 방역으로 국내 달걀 공급이 급감하면서 달걀 평균 소매가(30개들이 특란 기준)는 1만 원에 가깝게 치솟았다. 급기야 23일부터 미국산 달걀이 동네 슈퍼마켓과 대형마트를 통해 판매되기 시작한 데 이어 곧 호수산 달걀도 유통될 전망이다. 미국산 달걀 한 판 가격은 현재 국내 달걀보다 1000원 정도 싼 8000원대에 팔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농·축산물을 수입에 의존할 경우 가격뿐만 아니라 식품 안전성에 대한 우려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번에 수입된 미국산 달걀도 유통기한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도 신선한(안전한) 달걀을 먹지 못할 수 있다.

우리나라 가금·축산농가가 계속해서 지금과 같은 밀집 사육 방식을 고집했을 경우 국민은 이처럼 늘 먹을거리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농가 입장에서도 우리나라가 AI 등 청정국 지위를 지속해야만 농·축산물 수출에서 지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우리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라도 현재의 농·축산물 생산 방식에 대한 일대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농업의 위기를 기본소득 보장과 농민 조직으로 돌파한 뉴질랜드

농업 선진국으로 알려진 호주와 뉴질랜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넓은 농경지 등 천혜 자원을 가지고 있고 수출 위주의 농업 구조이지만, 소농들도 관행농업(화학비료와 농약 등을 이용하는 농업)을 고집하지 않고도 농민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물론 이들 국가는 기본소득 보장과 무상의료 등 우리나라보다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갖추고 있다는 근본적인 차이도 있다. 하지만 이런 풍부한 자원과 정부 정책의 차이가 농업의 지속 가능성까지도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호주 멜버른 아보츠포드 수도원 건물 마당에서 열리는 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Slow Food Melbourne Farmers’ Market). 사진=대산농촌재단 제공
뉴질랜드는 1950~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과의 안정적인 양모 교역과 정부의 적극적인 수출 지원, 보조금 지급으로 농업이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과 함께 주 수출국이었던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으로 수출 판로가 막히면서 농업이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국가 전체 수출의 절반 이상을 농림업에 의존하는 뉴질랜드 경제 구조상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 수출 감소를 동시에 껴안고 갈 수가 없었다. 1950년대 미국의 88% 수준이던 국민 1인당 GDP가 1980년대 초까지 50%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뉴질랜드 농업은 정부 보조금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에 뉴질랜드 농민연합이 농가 보조금을 축소하고 물가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정부의 농정 개혁을 지지하고 나섰다.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뉴질랜드는 농업 수출국이므로 보조금을 줄이거나 상당 부분 폐지하는 대신 수입 규제 철폐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출 판로만 회복될 수 있다면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뉴질랜드 정부는 농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농가 회생 프로그램과 탈농 지원 프로그램 등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부분 농가에 부채 재조정과 탕감이 이뤄져 농업 부문에서 발생한 총부채의 20%가 탕감됐다.

아울러 1988년에는 탈농 지원 제도를 도입했다. 부채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농가가 탈농을 원할 경우 정부에서는 기존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확대 적용해 새집과 자동차, 가구 등을 제공하며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결국 뉴질랜드는 시장 경쟁 질서에 내몰린 농업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의 농업보조 정책 대신, 농민단체와 협력해 품목별 협동조합 등 농민들이 자생력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도록 위협 요소를 줄이는 쪽의 정책을 편 것이다.

저렴한 유기농 인증 제도, 농산물 판매 수익은 2배로

뉴질랜드에서는 식품 안전과 환경 보존에 대한 국민 인식도도 높아 유기농 운동도 활발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유기농업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뤄 신선한 식품의 안정적 공급과 미래를 위한 생물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데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사과와 키위 등 유기 과일을 비롯해 유기 견과류, 가공식품에 대해서도 수요가 높아지고 있어 일반 생산물에 비해 비싼 가격임에도 소비자의 저항이 적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남부 농장 지대인 외이우쿠 지역에 위치한 네이처 앤 프레시(Nature&Fresh) 유기농장주 마크(37)씨는 6년 전 유기농(organic) 매거진을 통해 유기 농산물 인증 소개 글을 접하고 관행농에서 유기농으로 전환한 가족농이다.

호당 평균 경지 면적이 189헥타르(한국은 1.5ha)인 뉴질랜드에서 농장 규모가 약 4ha(4만 제곱미터)에 불과한 소농이지만 마크씨의 농장은 ‘OFNZ(Organic Farm NZ)’라는 저비용의 유기 인증을 받아 과수 작물인 마카데미아 너트를 내수 시장에 판매하고 있다. 마진율이 낮은 슈퍼마켓에 납품하지 않아도 기념품점 등 소매와 직거래로 관행농 생산물보다 2배의 가격을 받고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위치한 네이처 앤 프레시(Nature&Fresh) 유기농장은 돼지와 닭들을 방목해서 키우고 있다. 사진=대산농촌재단 제공
이 농장에선 돼지와 닭들도 방목해서 키운다. 토양과 물, 비료 제조부터 과수 재배와 가축 사육 방식 등 모든 게 친환경적이다. 깨끗한 농장에서 자란 돼지와 닭들은 번식과 산란으로 그 자체로 농가에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기농으로 과수 작물을 재배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마크씨는 “돼지와 닭들이 과수원을 돌아다니면서 돼지가 나무에서 떨어진 마카데미아 너트 껍질을 깨면 닭들이 쪼아 먹어 쥐들이 득실거리지도 않는다”며 “닭들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달걀은 회수해서 먹기도 하고 인공부화기로 3주간 부화해서 병아리로 키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마크씨의 농장엔 마카데미아 나무가 800그루 정도가 있는데 연간 한 나무에서 8kg가량의 너트를 수확한다. 3대 가족이 살아가기에 농가 소득도 부족함이 없는 편이다.

마크씨 농장이 받은 유기 인증 기관인 OFNZ는 뉴질랜드의 농림수산부 지원으로 만들어 곳이다. 이 기관은 뉴질랜드의 소규모 자영농의 유기농 인증을 주로 담당하고 있으며 다른 유기 인증 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용도 저렴하다. 농장을 운영한 지 3년이 지나야 OFNZ가 지정한 분석 전문 연구소에 분석을 신청할 수 있는데 비용은 호주 달러(NZD)로 200달러(약 17만 원) 이내다.

이 농장에선 퇴비도 지렁이 오줌액을 사용해서 만든다. ‘Tiger worm’이라는 지렁이를 풀과 함께 욕조 크기의 퇴비 통에 넣어 두면 3주 만에 양이 두 배로 늘어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과수와 채소의 비료로 쓰이고 남는 것은 주변 농가에 팔기도 한다.

유기농·슬로푸드·농민시장 ‘상생·협력’하는 호주의 소농

농·축산물의 60%를 수출하는 호주도 정부의 낮은 농업보조금과 함께 일찍부터 농장의 규모화가 진행된 곳이지만 가족농과 유기농에 대한 인식과 기반이 꽤 탄탄해 나름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다. 호주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유기 농경지를 보유한 유기 농산물의 중요 수출국으로 유기농 생산자 수도 꾸준히 증가 추세에 있다.

호주 멜버른 교외 벡스터 지역 등 약 60ha 면적에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페닌슐라 유기농장(Peninsula Fresh Organic)의 웨인 쉴드씨도 스스로를 소농이라고 부른다. 웨인씨는 이 농장에서 키운 당근·무·시금치·대파·호박 등 다양한 채소를 도매시장과 팜샵(Farm Shop), 농민시장(Farmers’ Market)에 내다 팔고 있다. 전체 매출 중 5%는 싱가포르와 홍콩 등으로 수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농산물 도매시장은 유기 농산물에 대해 제대로 값을 쳐주기는커녕 되레 하품(下品) 취급을 하는데 호주 멜버른 지역만 하더라도 퀸 빅토리아 마켓에 유기농산물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다. 페닌슐라 유기농장에서 생산된 채소 60%가 이 같은 도매시장에서 판매된다.

호주 멜버른 페닌슐라 유기농장(Peninsula Fresh Organic)의 웨인 쉴드씨가 화염방사기로 잡초를 태우고 있다. 사진=강성원 기자
웨인씨도 9년 전까지만 해도 관행농으로 채소를 재배했지만 농약이 작물과 함께 가족의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음에 심각성을 깨닫고 유기농으로 전환했다. 현재는 빅토리아주 파머스마켓 회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유기농과 로컬푸드에 대한 애착이 크다. 농민시장이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아니지만 7년 전부터 인근 농민시장(슬로푸드 멜버른 파머스마켓 등 5군데)에 꾸준히 참가해 왔다.

웨인씨는 농민시장에 계속 나가는 이유에 대해 “수익성은 농장에서 운영하는 팜샵이 더 좋지만 직접 손님을 만나고 도시에 있는 사람들의 피드백을 들으며 물건을 팔 수 있어서 좋다”며 “슬로푸드 마켓에도 유기농가가 가장 많고 대규모 수천 헥타르 대농을 빼곤 중소농가가 농민시장에 참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웨인씨는 “유기농업이 인건비 때문에 생산비용 높을 수 있는데 갈수록 농약과 비료 값이 올라가는 추세라서 지금은 더 유기농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며 “멕시코인에게 유기비료 만드는 방법을 배운 후 농장에서 직접 단백질에 우유, 당류 등을 섞어 유기질 퇴비를 만든다”고 말했다.

한국의 유기농부들이 소비자들을 위해 제공하는 채소 꾸러미 사업 역시 웨인씨 농장에서도 하고 있는데 인근 소비자들의 호응이 높아 5년 안에 규모를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꾸러미 종류는 30·40·50달러(AUD)로 다양하게 포장돼 소비자가 원하는 꾸러미를 주문한 후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다.

웨인씨 부부가 운영하는 팜샵에선 주변 소농들이 생산한 농산물도 같이 판매하고 있다. 소농들이 함께 모여 농민시장을 열고 다른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사고팔기도 하면서 상생·협력의 농업 공동체가 형성돼 있었다. 이들은 또 생산자와 소비자들 간 소통과 교류의 장을 넓힘으로써 유기농·로컬푸드에 대한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호주의 소농들이 계속 삶의 터전을 유지해 나가는 비결이다.

※ 미디어오늘은 농업·농촌 지원 공익사업을 펼치는 대산농촌재단이 지난해 11월22일부터 12월1일까지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진행한 ‘상생·협력과 지속 가능성의 농업’ 연수에 공모해 동행취재 기자로 선발됐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소농·가족농이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펼치는 다양한 노력과 사회적 협력 시스템을 살피기 위해 구성된 연수에는 재단 관계자와 농업인 등 20명이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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