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시 청호동은 ‘아바이마을’로도 불린다. 함경도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정착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속초시내에서 갯배를 타고 들어가면 넓은 백사장 위로 펼쳐져있는 아바이마을이 홍준표의 고향이다.

원산에서 방어잡이 어선을 하던 조부는 고깃배 6척을 갖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부친은 HID(북파공작원) 특무상사 출신으로 예편 후엔 속초에서 고기잡이 배들의 ‘브로카’도 하면서 북파공작원들을 관리했던 것으로 홍준표는 기억한다. 유년시절 홍준표의 집엔 방이 스물여덟칸이나 있었는데, 북파공작원들이 돼지를 잡고 수영도 하면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도 북파공작원들과 바닷가에서 놀면서 걸음보다 수영을 먼저 배웠다. “장부가 있었는데 거기 이름들이 다 적혀 있었어요. 빨간 싸인펜으로 그어져 있는 이름들도 있고. 안 돌아온 사람이겠죠. 워낙 어렸을 때니 정확히는 몰라요”

홍준표의 외삼촌은 축구 명문인 영등포공고의 주전선수였다. 홍준표도 ‘국민학교’ 4학년에 주전을 달았고 지역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거나 중학교 코치들이 스카웃을 위해 집에 들락거릴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그렇지만 서울로 이사를 하며 그는 축구부도 없는 중학교에 가게 됐고 “삐딱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 홍준표 전 한통계약직노조 위원장.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중학교 때 친했던 ‘짱’들이 고등학교에 가면서 강북 일대의 신일, 보성, 대일, 동대문상고, 광운전자고 등에 홍준표의 친구들이 자리잡았다. 전부 17명이었기에 ‘세븐틴’이라는 써클을 만들었다.

“거기서 멈췄으면 됐는데, 동네 형님들하고 연계가 됐어요. 조폭이죠. 종암동에 마가렛 호텔을 짓기 전에 나이트클럽 상권을 받으려고 전라도 광주에서 엄청 올라왔다는 거에요. 우리 동네 조폭은 가만있겠어요. 쪽수가 밀리니 연락이 온 거죠. 그래서 월곡동 미아리 텍사스 자리에서 큰 싸움이 있었어요. 나도 많이 다쳤는데, 그 때 블랙리스트가 종암경찰서에 올라간 거에요. (전두환 국보위의)정화위원회가 발족되고 하면서, 당구장에 있는데 형사 둘이 그냥 데리고 갔습니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이틀이 지난 후 남양주 덕소의 예비군 교장으로 끌려갔다. 홍준표는 그곳에서 일주일간 구타를 당한 뒤 다시 강원도 인제군으로 옮겨졌다. 삼청교육대였다. 당시 시국사범과 폭력, 주거불명 등 A~D급으로 분류되어 군에 넘겨진 사람은 약 4만명. 홍준표도 삼청교육대에 28일간 갇혀있었는데, 당시 젊고 건강했던 신체 덕분에 큰 탈 없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열아홉살의 홍준표는, 반성문을 쓰지 못 해 매일같이 매타작을 당하던 문맹자들과 거적에 덮여 나간 사망자들을 기억했다.

“첫날 갔더니 머리를 다 밀고, 옷을 싹 벗겨놓고 한군데 몰아넣어요. 계속 교육을 하면서 뒤에 구호 외치게 하고. 나는 사회에서 정말 필요없는 삶을 살았다, 이후 갱생해서 나가게 되면 조국을 위해 살도록 여기서 정화해서 나가겠다는, 이런 다짐을 시키는 거죠. 보통 상병인 교관이, 나이가 새파랗죠, 데리고 나가서 무조건 몽둥이로... 잠을 안재워요. ‘불이행자’들만 따로 모아놓는 방이 있어요. 빨간 전구다마 불이 있는 거기서 야구 방망이 들고, 계속 똑바로 서서 눈뜨고 명상을 하라고. 막사의 벽을 보고.”

홍준표는 삼청교육대를 나온 뒤 실어증을 얻었다. 고대 옆 돌산에 있는 말바위 옆에 텐트를 치고 두 달 가량을 살았다.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전화국에 다니던 사촌형이 찾아온 게 인연이 돼 82년 10월 고덕 주공아파트 단지에 전화 놓는 일을 하게 됐다. 이때가 스무살이었다.

참, 세상 드럽다

그의 집안엔 고모부나 누나 등 전화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홍준표 역시 천호전화국과 동대문 전화국 등에서 전화 가설과 AS 일을 하면서 먹고 살 만큼의 급여를 받았다. 홍준표와 동료들은 1992년 서울 지역에 전화가설을 담당하던 도급 노동자 600명 가량을 모아 가설공노조를 만들었다. 가설공노조는 당시 건당 약 2천원 하던 임금을 5천원 이상으로 인상시키는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일 년이 채 가지 못했다. 

▲ 홍준표.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95년 한국통신은 정규직 3천명을 명예퇴직시키고 10월엔 도급노동자들을 계약직 형태로 한국통신에 직영화했다. 그러나 직영화 직후인 1996년 한국통신은 당시 약 170만원 가량의 계약직 임금을 평균 94만원 대로 내렸고 반년 후엔 다시 86만원대로 삭감했다. 당시 최고 높은 기량의 특별계약직이었던 홍준표는 220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았는데 다른 계약직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임금도 절반 이하로 갂였다. ‘정규직도 상여금을 반납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너희도 일정한 출혈을 감수해야 하지 않느냐’며 임금을 절반 이하로 후려친 것이다.

외환위기를 지나면서도 ‘나아지겠지’하고 견뎠던 계약직들의 조건은 몇 년이 지나면서 오히려 악화됐다. 정확하게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8년차의 정규직-계약직을 비교해보면 급여는 219만여원과 85만여원으로 3배 가까이 차이났다. 여성 노동자들에겐 더 심했다. 대방전화국 전송기술과에서 4년을 근무한 여성노동자를 보면 1999년에 월 58만원 가량을 지급받았다.

정규직과의 차별은 회사 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공기업의 정규직과 계약직은 말그대로 ‘양반’과 ‘상놈’이었다. 노조 선전국장을 했던 이운재 조합원은 한통계약직투쟁 백서인 ‘517일간의 외침’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통신이 워낙 좋은 회산 줄 알잖아요, 사람들이. 처음에 한국통신에 들어가서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회사는 참 좋은 회사 아니냐, 참한 색시가 있는데 선 볼래?’ 나를 아는 주위사람들이 정규직인 줄 알고… 그런 게 몇 번 있었어요. 몇 번 있었는데 나중에는 계약직인 줄 알고 더 이상 아무 말 없더라구요. 참 세상 드럽다…….”

당시 큰 아이를 초등학교에 진학시켜야 했던 홍준표도 80만원 수준의 임금으론 앞이 막막했다. 아이의 ‘가정통신란’에 직업을 적어야 하는데, 한국통신 직원이라고 쓰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1998년부터 홍준표는 조직에 나섰다. 십수년을 일하며 알게 된 동료들이 곳곳에 흩어져있었다.

“야, 좀 만나자. 바뀔 기미가 안 보인다. 이대론 안 되겠다. 한 전화국에서 난리굿을 쳐도 되지 않고 잘리니까 이슈화하려면 여러 전화국이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야지 않겠냐.”

2000년도 들어 계약직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해 1월22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있는 수정다방에서 동대문, 성북, 월곡, 혜화전화국 계약직 노동자들이 회합했다. 첫 모임에선 ‘손 없는 날’을 택해 ‘3일만 제끼자’는 데까지 의견이 모아졌다. 회사에서도 첩보를 입수했다. 관리자들로부터 계약직 개개인에 대한 회유와 압박이 들어왔다. 개별적 움직임보다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게 맞겠다 싶어 3일 뒤 민주노총 서울본부 박상윤 조직부장과 25명의 한통계약직 기사들이 자리를 가졌다.

계약직 노동자들의 기세는 바짝 마른 갈대밭에 불을 놓은 것 같았다. 3월 10일 계약직협의회 임시총회 즈음엔 14개 전화국이 노조 참여를 결정했다. 5월말엔 대전, 충남, 청주, 대구, 구미, 울산, 부산 등 전국으로 확대됐다.

“죽여, 밟아, 묻어, 씨발, 개새끼들아” 

▲ 사진제공=워킹보이스
한통계약직과 비슷한 시기에 투쟁했던 사업장이 이랜드노조다. 이랜드 투쟁이 영화 ‘카트’와 드라마 ‘송곳’의 모티브가 된 이유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따뜻한 연대’가 주는 감동 때문일 것이다. 한통계약직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중의적’(이지영作, 2003년)이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의 몸부림은 대중적 드라마의 소재로는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통계약직은 ‘비정규직 철폐’를 전국적인 단일 구호로 자리잡게했는데, 원래 이 구호엔 “죽여, 밟아, 묻어, 씨발, 개새끼들아”라는 후렴 구호가 따라붙었다. 이랜드에서와 같은 따뜻한 연대가 오히려 극히 예외적이라는 사실은 한통계약직 투쟁 이후의 비정규직 투쟁사가 잘 드러내고 있다.

원래 계약직 노동자들은 협의회 결성 후인 3월초 한국통신노동조합에 가입하고자 했다. 정규직 노동조합인 한통노조의 규약은 도급과 일용직도 가입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통신노조(이동걸 집행부)는 “지금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규약에 이런 가입조항이 있는 줄 몰랐다고도 말했다.

정규직 노조는 규약상으로만 계약직 가입 조항을 두고 실제로는 계약직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계약직들의 노조 설립은 ‘복수노조금지’ 조항에 막혀 반려됐다. 이미 사측의 탄압이 시작된 상황에서 계약직 노조는 고사 위기에 놓였다. 홍준표를 비롯한 중심인물들은 3월 30일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한통계약직노조는 10월에야 합법화될 수 있었다. 9월 30일 정규직 노조 대의원대회에선 계약직을 노조로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혹은 독자적인 계약직노조가 설립될 수 있게 규약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분명 있었다. 반대로 계약직 노조가 고립무원이 될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한 대의원은 “계약직도 안타깝지만 우리 밥그릇을 뺏기면 안된다. 원래는 그들이 이 자리에 있어서도 안 된다”고도 했다. 한차례의 대의원대회가 무산되고, 이어 10월11일 대의원대회 역시 정족수 부족으로 무산될 위기를 거쳐 여러 ‘비상수단’이 동원된 후에야 계약직노조엔 합법화의 길이 열렸다.

계약직 노조가 합법화 되자 사측도 곧바로 칼을 빼들었다. 8명의 간부가 징계해고됐고, 대전전화국에서 38명, 부산과 울산의 계약직 400여명 전원에게 징계와 해고통보 등이 날아왔다. 한국통신은 이미 골칫거리가 된 계약직을 도급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12월까지는 계약직 1만여명 중 6천명을 자를 구조조정안이 세워져 있었다. 도급 전환시 월급 1개월치와 도급업체에서의 고용을 보장하겠다는 사측의 회유를 믿고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쓴 김해, 진영전화국 노동자들은 도급업체 근무 1주일후 “11월말 이후, 고용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선고를 받기도 했다. 1개월치 월급이나 위로금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한통계약직 투쟁은 114안내국으로도 확대됐다. 한통계약직 노조는 2000년 5월부터 114의 계약직 노동자 조직에 박차를 가했는데, 사측의 방해로 조직이 깨지자 방침을 전환했다. 조직을 수면 위로 띄우지 않고 개별 연락을 통해 확산하는 것이었다. 10월 이후 114 계약직에 대한 집단해고가 늘면서 서울의 114계약직 노동자들이 먼저 투쟁에 동참했다.

“그날 나와라, 화장실에 막 써 있고, 막 낙서돼 있고, 서로서로 꼭 나오자 막 이런 식으로 돼 있었고, 실질적으로 12월 4일날 이백 몇 명이 나와서 큰 집회를 했어요”(박은경 조합원, 투쟁백서)

12월초 한국통신이 도급화 공개입찰을 시작하자, 이미 중노위로부터 조정만료를 받아놓은 한통계약직노조는 12월 13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연대를 거부당하다

▲ 2002년 4월6일 한강대교 고공시위. 사진제공=참세상

때마침 정규직노조가 12월18일 파업을 선언했다. 계약직노조는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각자의 싸움에서 벗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단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통신노조가 집결해있는 명동성당엔 이미 서울의 계약직노조 조합원들이 들어와 있었고, 다음날엔 지역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짐을 싸들고 명동에 도착했다. 계약직노조 조합원들은 노조지도부가 예상한 수준을 넘는 900여명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서울로 오는 차비 마련이 쉽지 않은 비정규직들이지만 정규직노조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김밥 1천명 분을 박스에 담았다.

지방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상경한 이날, 명동성당에선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연대집회가 저녁7시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9시가 되도록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한통노조 집행부 입장이 민주노총의 연대집회에 대해 사전협의가 없었다는 것과 계약직노조에 발언권을 주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라고 했다.

900여명의 계약직은 명동성당 밖 도로에 앉아있다가 결국 발길을 돌려야했다. 한통노조 이동걸 위원장은 마이크를 잡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보자. 우리의 현 상황은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없음을 이해해달라’고 했다. 명동성당 안으로까지 계약직 조합원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와아’ 하는 소리가 들렸죠. 한통계약직 동지들이 밀고 들어올 수도 있었죠. 상황이 아주 악화되어서 금방이라도 문제가 될 거 같아. 그래서 내가 나갔습니다. 내가 나가서, ‘동지들 오늘의 기억을 잊지 말자. 하지만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오늘은 함께 하고자 했던 형님들(정규직)의 조건과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한 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을 우리가 이해하고 발길을 돌리자’. 그 얘기를 하면서 눈물이 왜 이렇게 나는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더라고요. 그 때 우리 한통계약직 조합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는 계기도 됐어요.”

▲ 사진제공=구 한통계약직노조 홈페이지
바로 직전 다른 사업장인 데이콤노조 조합원 1500명이 한통노조의 환영을 받으며 연대집회에 참석했던 사실이 계약직 노동자들의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했다.

기댈 곳이 없었다. 한통계약직 투쟁은 점점 격렬해졌다. 12월28일 새벽 6시30분 분당의 한국통신 본사 앞에 버스 여섯대가 도착했다. 계약직 노동자 200여명은 본사 계단을 뛰어올라가 셔터문을 뜯어내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경찰이 진압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었다. 분당경찰서 정보과장은 계약직노조에 “2층은 위험한 곳”이라며 1층 로비에서 대기를 하면 부사장과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협상을 해왔다. 건물 바깥에서 추위에 떨고있던 여성 노동자 60명과 건물 내로 진입한 60명을 ‘교환’하는 것도 합의됐다. 10시10분 회전문을 통해 교환이 이뤄지는 순간 회전문이 ‘딱’ 하고 잠기는 소리가 났다. 경찰이 소화기를 터뜨리며 진압을 시작했다. 경찰의 방패에 찍혀 거의 실신상태가 된 끝에 전화국 점거는 한시간만에 종료됐다.

“대가리 들지마”

그해 1월 중순, 서울엔 15년만에 기록적 한파가 몰아쳤다. 2001년 1월15일 아침 기온은 -18.6도로 떨어졌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은 상경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분당의 한국통신 본사 앞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바위처럼’에 맞춰 율동을 했다. 이동구 조합원만이 생각에 잠긴 것 마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챈 조합원들이 119를 불렀고 곧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1996년 3월 기존 직장을 그만두고 한국통신 공주전화국에 입사한 것은 정규직으로 일하게 될 미래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산소호흡기, 음식물 호스에 의존하며 재활에 성공했지만 결국 오른쪽 전신마비와 언어장애를 갖게 됐다. 합법파업 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산재 처리도 되지 않았다. 

“(이동구 조합원이)실려갔는데 반신불수 통보를 받고 더 이제 울분이 주체를 못하는 분위기가 됐어요. 한국통신에서도 상황이 이렇게 되니 따뜻한 물을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이동구 동지가 쓰러진 다음날이었거든요. 그 말하러 온 사람은 맞고 돌아갔죠.”


▲ 사진=다큐 <이중의적> @노동자뉴스제작단
다음날 ‘나선(전봇대 위에서 일하는 통신노동자)’ 5명이 한강대교 난간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였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칼바람 속에서 미끄러운 난간을 기어올라간 끝에, 계약직노조는 다음날 한국통신 사장과 면담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나의 입장이다. (도급회사로의)고용승계는 보장하겠다”는 기존 입장만 확인했다.

회사 내에서도 그랬듯이, 비정규직들은 투쟁도 정규직보다 비참했다. 한국통신이 고용한 ‘백두클럽’ 용역깡패들이 청원경찰로 위장해 시위대를 폭행하거나, 이에 항의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진입한 노동자들을 셔터를 내리고 청원경찰과 전경이 집단폭행하는 사건도 있었다. 경찰은 2월 14일 동대문전화국 시위에서 몸싸움을 하던중 박진규 조합원에게 권총을 꺼내 겨누기도 했다.

영하 십도 이하의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스티로폴이나 하이롱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조합원들은 계단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계단에 내리는 눈이 얼어붙지 않도록 열이 올라오는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 억수로 추운데 (계단은)따뜻한 거야. 며칠 거기서 잤다. 하이롱 억수로 얇은 거 하나 깔고 잤거든. 열기가 올라오니까 하나도 안 추워. 며칠간 사람들이 거기서 자니까 (한국통신)본사에서 바로 꺼부리더라”(김영민 조합원, 투쟁백서)

파업 100일이 지났다. 3월25일 한통계약직노조는 구속 결의를 위한 ‘임시총회’를 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본 뒤였고 이대로는 정규직화도, 복직도 점점 멀어질 것이었다. 병원에서 치료중인 이동구 조합원이 휠체어를 타고 총회자리에 나왔다.

다음날부터 노조는 경찰을 따돌리는 ‘오염소독’과 집결 훈련에 들어갔다. 이 무렵 한통계약직 주요 간부들의 집앞엔 경찰이 상주했고 조합원들 주변엔 늘상 경찰이 따라다니던 터였다. 휴대폰도 모두 수거했다. 나흘 뒤인 29일 새벽 3시 목동전화국으로 진입한 한통계약직 노동자들은 지하와 1층로비, 화장실 창문, 계단 등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농성에 들어갔다. 목동전화국엔 국제온라인망이 있었고 노조는 교섭이 실패할 경우 이를 절단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목동전화국을 점거하고 나서야 한통계약직의 투쟁은 방송에 나올 수 있었다.

한통계약직으로서도 ‘최후의 선택’이었던 셈인데, 이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선 점거장소 외부와의 연대가 중요했다. 전화국 밖에서 공공연맹을 비롯한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의 연대시위와 교섭이 유기적으로 이뤄져야 했다. 이 투쟁을 위해 계약직노조는 공공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해놓고 있었다. 공공연맹 및 민주노총 실무자와의 약속도 받아놨다. 그렇지만 공공연맹도 다른 어떤 노조도 이 목동전화국 투쟁엔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점거 3시간 반 뒤 현관 바리케이드가 제거됐고, 곧이어 경찰특공대가 섬광탄을 터뜨리며 진입했다. 다시 한시간이 지난 뒤엔 대부분의 조합원이 옥상으로 밀려올라갔다. 이날 오전 8시반이 되어 진압은 완료됐다.

 

▲ 목동전화국 점거투쟁 후 끌려나오는 노동자들. 사진=다큐 <이중의적> @노동자뉴스제작단

“엎드려 이 새끼야” “대가리 들지마”  

머리를 들면 곤봉이 내리꽃히는 수모 속에서, 목동전화국 점거는 5시간반만에 198명 전원 연행으로 끝이났다. 홍준표는 양천경찰서에 끌려간 뒤 면회를 온 노동, 민중운동 대표자들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다. 

“공공연맹, 민주노총과 밀도 깊게 몇 차례 논의하고 진행을 했어요. (외곽지원이 안 된)이유는 아직도 모릅니다.”

가명으로 현장에 돌아간 민주노총 부위원장

홍준표는 강릉교도소에 14개월간 수감돼 있었다. 한번은 장마로 교도소의 전화회선이 마비되는 일이 있었다. 수감자들은 오래 기다려 왔던 가족들과의 단 3분간의 통화를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한국통신에서도 ‘특기량’급 기사였던 홍준표는 교도소 관리계장에게 면담 요청을 해 수감자들에게 전화 통화를 선물했다. 홍준표는 교환방식으로 돼 있던 강릉교도소의 구식 전화를 몇 달간 공사해서 키폰 시스템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홍준표 위원장의 구속수감 이후에도 한통계약직노조는 8차선 도로 위 광케이블 고공시위와 국회의원회관 옥상 농성, 전국 순회, 산개잠수 투쟁 등을 이어갔다. 그러나 1년 반 동안 지속된 격렬하고 긴 투쟁으로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홍준표가 수감되고 한달여뒤인 2001년 5월엔 한승훈 조합원이 오랜 투쟁과 생활고가 낳은 건강악화로 유명을 달리했다. 

정규직노조의 철저한 외면은 민주노총 공공연맹 내에서도 한통계약직 투쟁을 고립시켰다. 공공연맹의 최대노조였던 한통노조는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사전집회에 계약직노조가 참여할 경우 대의원대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한통계약직 투쟁은 2002년 5월12일 이틀간의 해산총회를 끝으로 517일만에 마무리됐다. 노조 해산을 조건으로 도급업체에서 3년간 고용을 보장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 한통계약직노조 해산총회와 수련회. 사진제공=참세상
해산총회를 앞두고 강릉교도소의 홍준표에게 편지가 왔다. 조합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편지지 위로 조금씩 번지며 흩어져내렸다.

2002년 5월18일 홍준표는 석가탄신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그해 8월 홍준표는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됐다. 고인이 된 서울본부 박상윤 사무처장과 재능교육 정종태 지부장 그리고 주봉희, 이남신, 박대규 위원장 등이 선거를 함께 준비했다. 목동전화국 점거 당시 연맹, 민주노총의 어떤 ‘엄호’도 없었다는 사실이 비정규직 부위원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민주노총은 홍준표 부위원장 시절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조직활동가 학교를 만들어 수백명의 활동가를 배출했고 총연맹 예산의 3분의 2를 비정규직 관련 활동에 투입하기도 했다.

홍준표는 이후 ‘홍준기’라는 가명으로 한국통신 화곡전화국 도급노동자로 다시 들어갔다. 임기를 끝내면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동지들을 가끔 만난다든지, 소주 한잔 하면 어느 누구 하나 투쟁에 대한 후회를 가진 동지를 본 적이 없어요. 그런 점에서 정말 치열하고 강고한 투쟁이었지만, 진 싸움은 아니었다. 그것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의 밑천으로 마음속 깊이 다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언제 그렇게 한데 잠을 자보고 언제 그렇게 경찰과 맞서 싸우고, 관철되지 않는 주장을 부르짖어 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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