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이 밝았다. 역으로 보면, 2015년의 영화들을 돌아봐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2015년 흥행을 이끌었던 영화들은 대개 두 패턴으로 명확히 구분된다. ‘정의’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스크린 속에서 ‘상상적 해결’을 보여준 영화들이 한 편에 있고, 다른 편에서는 죽음을 ‘추모’하며 신파적 ‘눈물’을 자극하는 영화들이 존재했다. 전자에는 <베테랑>, <암살>, <내부자들> 등의 영화가 포함되고, 후자에는 <연평해전>, <국제시장>, <히말라야>, <사도> 등이 속한다. 흥미롭게도 이 7편의 영화가 흥행 순위를 나란히 차지했다. 정의와 눈물, 상상적 해결과 추모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영화의 무엇을 본 것이고, 왜 본 것일까?

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는 정의를 구현한 두 편이었다. 민족의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는 친일이라는 소재를 매우 극단적인 방법으로 다룬 <암살>, 재벌의 파렴치한 비리를 끝까지 추적해 결국 처벌하고야 하는 <베테랑>은 공히 천만 영화에 등극했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언론, 재벌, 정치의 ‘삼각편대’를 무척이나 시실적이면서 비판적으로 그린 <내부자들>이 이 흐름에 동참했다.

세 영화는 영화 밖 현실을 영화 안에 정밀하게 그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현실적이다. 영화 안과 영화 밖이 행복하게 만났다고 할까? <내부자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그러나 상상할 수 있는 현실을 그려 결국 고발한다. <도가니> 이후 등장한 ‘무비 저널리즘’이 현실을 고발하는 것에 그쳤다면, 세 편은 극적 긴장감 속에 진행되다가 결국 판타지적 해결로 맺는다. 여기서 드러나는 전혀 다른 해결 방식. <도가니>나 <부러진 화살>은 영화 밖의 현실적 패배가 영화 안의 서사적 패배로 재생되어 사회적 이슈를 불러왔지만, <암살>, <베테랑>, <내부자들>은 영화 안에서는 승리하지만 영화 밖에서는 패배하고 말아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다만 영화적 이슈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영화의 비판적 기능이 살아났다고 하야 할까? 상상적 해결을 통해 환상으로 달아나버려 현실과 유리되었다고 해야 할까? 문학평론가 오길영은 “예술 또한 현실의 외부에 있지 않고 현실의 한 부분이므로 그런 상징적 해결을 통해 현실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밀하게 그려지던 현실적 설정이 상상적 해결로 치닫게 될 때 느끼는 아쉬움은 강하게 남는다.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판타지적 성격도 여기에 한몫 했을 것이고, 장르의 특성상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15년의 관객들은 위 세 편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여기서 어설픈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만약 영화 안에서도 패배했다면 우리는 희망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때문에 영화만의 상상적 해결을 그린 것이 아니라 관객이 원하는 해결을 그렸다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찾기 어려운 해결을 영화 안에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단지 판타지적 해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욕망의 반영이라는 것이다. 과거사, 재벌, 정치/언론/재벌 문제가 판타지로라도 해결되길 관객들은 강력하게 현실적으로 원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세 편의 다른 축에는 죽음을 눈물로 추모하는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연평해전>, 일 세대 실향민의 고난을 그린 <국제시장>, 동료의 시신을 수습하러 에베레스트로 떠나는 <히말라야>,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던 사건을 극화한 <사도>. 이들 영화의 핵심 소재는 죽음이다. 북한과의 전투에서 병사들이 죽고, 북을 떠나면서 아버지는 사라져버리고, 산행에서 동료가 죽었으며, 아들을 아버지가 죽였다.

   
 
 

각 영화는 죽음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지만 그것이 목표하는 지점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눈물을 통한 카타르시스 효과. 그래서 죽은 이들을 그리워하고 눈물을 짓게 만드는 것이 가족인 것은 이상하지 않다. <연평해전>에서 죽은 세 병사들의 가족을 등장시켜 그들을 통해 눈물을 자아내게 만들고, <국제시장> 역시 아버지를 처음부터 사라지게 만듦으로써 평생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히말라야>는 어떤가? 산악대원이라는 ‘유사 가족’이 시신으로 남은 동료를 구하러 가고 그 현장에 고인의 아내가 찾아와 눈물을 자극한다. <사도>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머니와 아내, 자식이 개입하면서 눈물의 정서가 작동된다.

이 영화들은 공히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지금 이 시점에서 눈물을 자극하는 영화에 이토록 강하게 공명했는지. 가장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이 각박한 세상에서 눈물을 통해 짧게라도 치유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될 것이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일차원적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볼 것이 있다. 네 영화 모두 주인공이 남성이라는 점이고, 죽는 이도 남성이라는 점이다. 그뿐인가? 주변에도 숱한 남성이 존재하며, 심지어 반동 인물도 남성이다. 남성들은 의리를 중심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며 때론 죽을 고생을 하고 실제 죽는다. 이를 가족들이 지켜보면서 눈물의 정서를 만들어낸다. 실로 ‘남성 신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시대의 어떤 징표인 것 같다. 갈수록 삶이 각박해지는 이 시대에, 한 집안의 가장인 남성의 헌신과 희생에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들의 삶과 자신의 삶이 깊이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직장인인 남성들을 점점 더 사지로 몰고 있는 신자유주의 현실의 반영이 아닐까? 그들이 죽어가는 현실을 영화가 재현한 것이 아닐까?(<사도>는 이와 좀 다르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 물음. 두 그룹 사이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정의를 화두로 내세우면서 상상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영화들은 ‘사회’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고, 죽음의 정서를 강조한 영화들은 ‘개인’의 희생과 헌신에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보면 결국 두 영화들은 사회 안에 있는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단지 방점을 찍는 곳이 다를 뿐이다. 한쪽에서는 어떻게 하더라도 사회 구조를 고쳐야 한다고 말하고, 한쪽에서는 구조에 희생된 개인을 추모했다.

2016년의 영화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2016년에는 재난영화와 스릴러가 유난히 강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그렇다면, 재난을 함께 극복할 가족의 헌신과 희생이 등장하고, 국가 기관이 개인의 복수를 해주지 못해 개인이 스스로 복수하는 모습을 과거영화처럼 다시 스크린에서 만나야 할까? 결국 우리가 믿을 것은 개인과 가족뿐이라는 것을 2016년에 스크린을 통해 보게 될지, 아니면 이를 대신해줄 공동체와 사회 보장망이 등장할지 유심히 지켜보자. 영화는 현실적 욕망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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