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면 증후군(impostor syndrome)’이라는 말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지금은 아는 체하며 버티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 실력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불안감’을 의미하는 가면 증후군은 현대인들에게 흔하다고 하지만, 여러 분야를 건너다니며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문제다. 내가 그런 경우다.

학부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한 나는 대학원에서 순수 인문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스타트업에 합류해서 IT 쪽 일을 하던 중에 디지털 미디어에서 일하는 언론인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그들의 제의로 (미디어오늘을 비롯해) 여기저기에 다양한 주제의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서로 다른 분야를 건너다니다 보니 한 분야에서만 오래 일한 분들을 만나면 그분들이 가진 전문성에 비해 많이 부족한 내 지식을 절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가면 증후군이 도진다.

요즘은 다들 통섭의 시대를 외치고, 틀을 벗어난 사고를 요구하고, 비선형적(non-linear) 경력 쌓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동시에 여러 영역에서 일하다 보면 평생 한 분야에서만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과의 부조화, 혹은 문화적 충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창의적인 사고는 그런 문화적 충돌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때마다 감당해야 할 엄청난 학습의 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Carnival of Venice @wikipedia commons.
 

그렇게 새로운 영역에 들어온 전입자(轉入者)가 쉽게 빠지기 쉬운 증세가 가면 증후군이라면, 그 영역에 오래 머물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다. 바로 ‘전문지식 증후군(expertise syndrome)이다. 이 말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트래비스 스와이스굿이 만들어낸 말로,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특정 주제나 방법론 등에 아주 능숙하게 되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상당한 부분을 누구나 알고 있고, 알아야 하는  상식이라고 규정해버림으로써 자신보다 지식, 기술이 떨어지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 이야기를 하기가 불가능해지는 것.
2) 특정 집단 내의 지식이 상식화되어 더 이상 논의되지 않고, 따라서 그 집단에 새롭게 들어온 사람들이 기본적인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가령, ‘빽단’이라는 말이 있다. 대략 ‘시스템에서 관리자에게 보여지는 부분’을 가리키는 단어로, IT 업종에서 주로 사용하지만, 요새는 일반 기업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하는 말이다. 그런데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나 IT와 관련 없는 업체의 직원이 "빽단"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주위의 모든 사람이 끄덕끄덕하는데 나만 모르는 상황. 아무도 눈치 못채게 브라우저를 열고 네이버 통합검색에서 “빽단”을 검색해본다.

그리고 결과 페이지를 위에서부터 훑어 본다. 블로그(도대체 왜 검색결과의 최상위에 블로그들이 있어야 하는가?), 까페, 지식iN 어디에도 안 보이고 맨 밑에 있는 웹 문서 검색결과에 가면 어느 웹사이트 Q&A에 누가 “빽단이 뭔가요?’라고 질문한 것이 딱 하나 눈에 띈다. 거기에 달린 대답도 아주 간략하고 어설프다. 그토록 흔하게 사용되는 용어인데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최대의 검색엔진에서 설명을 찾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말에 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게 바로 전문지식 증후군이다. 특정 집단 내의 지식이 상식화되어서 초보자는 기본적인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상황. 전문지식 증후군은 어느 집단에서나 발병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유독 심하다. ‘빽단’에 해당하는 영어단어인 ‘back-end’를 구글에서 검색해보라. 눈물이 날 정도로 상세한 설명들이 검색결과 페이지에 아름답게 펼쳐진다.

그런 차이가 나는 이유는 검색엔진의 문제, 지식의 체계적 관리 부족, 번역의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문지식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문고리인 용어의 범용화 실패는 특정 영역를 에워싸는 담이 된다. 언론계 하나만 봐도 ‘사쓰마와리’니 ‘도꾸다이’ 같은 용어는 수십 년째 “바꿔야 할 일본문화”라는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여전히 애용되고 있고, 거기에 ‘뉴스룸’이니 ‘버티컬,’ ‘롱폼’ 같은 새로운 미국산 용어들도 하루가 멀다고 수입되고 있지만, 체계적인 정리는 요원하다.

하지만 나는 국어순화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업계용어들은 정화되지 않은 표현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지식의 체계에 편입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받는데 수 십 년이 걸린 나라에서 백단도 아니고 ‘빽’단이 공식용어로 등재될 수 있겠는가?) 업계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지만, 정작 검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빽단처럼 정화되지 않은 단어는 “아름다운 우리말”에서는 서자(庶子) 취급을 받아 체계적인 지식으로 분류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아직도 우리는 지식iN 같은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그래서 체계도 없고 오류로 가득한 지식의 뒷골목을 뒤지고 있다. 초등학생이 적어 놓은 내용을 보면서 개념을 익혀야 하는 우리가 우주의 얕은 지식만으로 만족하는 동안, 세계는 쿼라(Quora)나 위키피디아 같은 뛰어난 도구로 구슬을 꿰고 있다.

우리나라의 그런 토양이야말로 전문지식 증후군 발병에 가장 완벽한 장소다. 바닥부터 들어가서 오랜 시간 머물면서 알음알음으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지식으로 가득한 분야는 이종업종 간 교배를 허용할 리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새로운 사고,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발굴하려면 서로 다른 분야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초보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어를 적자(嫡子)로 인정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