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리에 상영된 한 TV 예능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한 독립제작사 사장은 주변에서 ‘대박났으니 행복하시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프로그램은 해당 지상파 방송사뿐만아니라 케이블 채널에서까지 재방에 삼방, 4방에 5방까지 ‘틀면 나오는’ 프로그램이 됐다. 해당 프로그램에 붙는 협찬과 광고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짐작컨대 300억원 이상의 수익이 제작사가 만든 프로그램으로 창출됐을 것이라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그러나 ‘대박’을 친 프로그램의 기획부터 제작까지 도맡았던 제작사 사장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이미 프로그램은 제작사의 손을 떠나 방송국의 것이 됐고 제작사는 프로그램 외주제작 계약을 통해 추후 이익에 관한 한 어떠한 권리도 받을 수 없었다. 제작비조차도 실제작비의 3분의 2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만 겨우 받았을 뿐이다. 그나마도 방송사가 지원하지 않는 나머지 제작비에 대해서는 제작사가 직접 협찬을 받아와 충당했다. 

방송사에 항의할 생각은 꿈도 못 꾼다. 해당 관계자는 “이 바닥에서 방송사에 계약 조건을 두고 협상을 하려 하거나 부당하다며 항의하는 일은 앞으로 아예 방송제작일을 접겠다는 선포와 같은 일”이라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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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만들었는데 제작비도 못 건지는 계약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납품하는 독립 PD들과 독립제작사들은 계약관계에서 말 그대로 ‘을’이다. 심지어 계약도 없이 구두로만 프로그램 방향을 논의한 뒤 제작해 방송사에 제공한다. 그렇게 방송사 쪽에서 원하는 방향의 제작과 기획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제작할 프로그램이 방영될 기회 자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 PD들은 독립제작사에 소속된 상태에서 방송사와 프로그램 제작을 계약한다. 즉 프로그램 제작 및 납품계약서에서 갑과 을이 되는 주체는 각각 방송사와 독립제작사가 된다. 방송사 와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독립 PD의 경우는 외주 제작 프로그램 납품 계약의 당사자가 되지 않는다.

독립 PD들과 독립제작사 관계자들은 “외주로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경우 사전 계약 없이 프로그램 제작에 착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입을 모았다. 외주제작 계약은 프로그램 제작 이전이 아니라 제작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구두로만 독립 제작사와 방송사 간 프로그램 기획 논의를 주고 받는다. 편집이 마무리되고 자막을 입히는 마지막 작업이 끝나갈 때서야 계약서를 작성하자며 연락을 해오는 경우도 있다. 제작사가 제작비를 지급받는 시점도 이미 프로그램 방송이 나간 지 20일 가량 지나서다.  

아침이나 저녁에 주로 방송되는 교양 정보 프로그램의 작은 한 코너를 담당해 제작하게 되면 최소 200만원에서 최고 500만원 정도의 제작비가 소요된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하나 제작하면 적게는 2000만원에서 최고 5000만원 정도의 제작비가 투여된다. 그 이상의 제작비가 드는 경우도 있다.

그나마 제작비는 제값조차 받기 어렵다. 독립제작사가 계약서 작성 전부터 이미 제작비를 들여 방송 프로그램은 만들어진 상태다. 방송사가 실제작비보다 적은 제작비를 주겠다고 계약서를 들이밀어도 협상은 불가능하다. 방송사가 프로그램 계약을 맺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제작한 프로그램은 고스란히 제작사의 적자로 남기 때문이다. 

초기 단계부터 해당 방송사에서 방송할 것을 전제로 프로그램 내용과 방향을 기획했던 터라, 다른 방송사에서 그대로 팔 수도 없다. 만약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다른 방송사에 납품을 하려면 그 방송사에서 원하는 방향대로 재가공이 들어가면서 제작비는 추가된다. 타 방송사에 판매하기 위해 영업을 하면서 영업비도 추가된다. 제작한 프로그램을 아예 버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갑’인 방송사가 제시하는 말도 안되는 제작비라도 받게되는 이유다. 

지난달 17일 한국독립PD협회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공동으로 발표한 독립PD 노동인권 긴급실태조사 결과에 의하면 175명의 응답자 가운데 ‘구두계약’을 선택한 응답자가 47.4%(83명)에 달했다. 구두계약 조차 하지 않는 ‘특별한 계약이 없었다’고 답한 응답자도 29.2%(51명)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3년 참여연대가 총 48명의 독립제작사 대표와 독립PD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방송외주제작 분야 불공정 실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방송사들이 취하는 이런 계약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제작비 삭감(62.9%)을 꼽았다. 이들은 방송사들이 방송사의 방송시간 변경으로 대금 지급 자체를 늦게 하거나 추가 제작비가 들어가는 제작 변경을 요구하면서도 제작비는 동일하게 지급하는 등의 문제를 지적했다. 

재주는 독립 PD가 부리고 돈은 방송사가
독립제작사와 독립PD들은 계약을 통해 한번 방송사에 제작 프로그램을 넘기고 나면 어떤 이익도 추후에 보장받지 못한다. 

방송사가 내미는 납품계약서에는 독립제작사가 모든 권리를 방송사에 넘겨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있다. 물론 계약서 상에 특약을 통해 제작 이후 권리와 이익 분배에 대한 조항을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계약서를 먼저 방송사 쪽이 만들어 내미는 경우는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지상파 방송사와 독립제작사 사이에 맺은 ‘프로그램 납품 계약서’에 의하면 독립제작사는 프로그램과 관련한 방송권, 복제·배포권, 공연권, 전송권, 자료이용권, 전시권, 2차 저작물 작성 및 이용권 등 모든 권리를 방송사에 넘겨야 한다. 심지어 촬영 원본도 방송사는 모든 권리를 다 가져간다. 일부 ‘협의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상 협의가 불가능한 ‘갑을 관계’하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같은 방송을 만들었는데도 방송작가와 성우, 연기자 등은 프로그램의 재방료를 받을 수 있지만, PD는 재방료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점도 독립 PD들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교양·다큐 프로그램을 주로 만들었다는 한 독립 PD는 “방송작가협회는 힘이 세기 때문에 협상을 통해 방송사에서 재방료를 인정해줬다. 협상력에 따라 누구는 재방료도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에서 2013년에 진행했던 방송외주제작분야 불공정 실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저작권을 누가 소유하는가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방송사의 일방적 저작권 포기 계약서 제시에 의해’라고 응답한 비율(91.3%)이 가장 높았다. 

심지어 프로그램 제작에 방송사가 한 푼도 지원하지 않고도 저작권을 가져가는 경우도 있다. 독립제작사에서 제작을 하더라도 외부에서 프로그램 협찬을 받으면 협찬료는 방송사가 받아서 편성료라는 명목으로 절반 이상을 가져간다. 독립제작사는 나머지 금액을 받게 된다. 방송사가 프로그램 기획과 편성을 담당했기 때문에 계약을 통해 저작권은 방송사의 몫이 된다.  

반면 독립제작사는 프로그램과 관련한 의무를 ‘영구히’ 지게 된다. 방송사가 납품받아 방송이 되고 난 후에도 추후 문제가 생기면 이에 대한 책임은 독립제작사의 몫이다. 

특히 최근에는 초상권 관련해 방송 이후 제작사가 책임지는 상황이 많이 발생했다. 외주제작 비율이 높은 교양·정보 프로그램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많기 때문이다. 인터뷰 대상자들이 방송 이후 초상권을 침해당했다며 방송사에 소송을 걸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보상금 등 책임은 전적으로 독립제작사의 몫이다. 방송사 대신 독립제작사들이 나서서 해당 인터뷰대상자들과 협상을 하거나 손해배상금 등을 물어줘야 한다. 

한 독립 PD는 “우리는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마음놓고 사용할 수 있도록 모든 권리를 확보해줘야 한다. 한 쪽은 영구히 권리를 누리면서 다른 한 쪽은 영구히 의무만 지는 이런 식의 계약이 말이 되냐”고 말했다. 

저작권을 모두 방송사가 가져가는 ‘관행’은 종합편성채널가 등장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일부 종편의 경우 지상파 방송사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을 납품받기 위해 독립PD나 독립제작사에게 ‘프로그램을 만들어주면 저작권을 주겠다’는 식의 영업을 하기도 했다.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하도록 할 테니 대신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방송사 쪽에서 독립제작사에 방송 촬영 원본을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거나, 2차 저작물의 권리 일부를 허용하는 경우들이 생기고 있다. 

지난 2011년 11월 방송3사와 독립제작사협회는 독립제작사가 촬영원본을 활용해 신규 저작물을 제작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MOU를 체결하기도 했다. 당시 체결한 ‘방송사-외주제작사 상생기반 마련을 위한 촬영원본 활용 양해각서’에 따르면 외주제작사는 방송사와의 계약을 통해 촬영원본을 이용하여 신규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기존 콘텐츠를 활용해 2차적 저작물을 작성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지난 2013년 당시 문체부는 ‘방송프로그램 제작·방영권 구매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배포했다. 방송사와 외주제작사 간 구매계약 표준을 제시하고 이를 기준으로 계약을 하라는 지침이다. MOU와 표준계약서를 그대로 지켜 외주계약을 체결하는 방송사는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 박봉남 감독의 영화 '아이언 크로우즈' 스틸컷.

이 때문에 아예 외주제작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사에 납품하는 식의 제작 자체를 거부하고 작품성을 높여 관객들에게 호응을 이끌어 내는 감독들도 등장하고 있다. 방송사의 ‘갑질’없이도 직접 관객들과 만나 작품성으로 승부할 수 있는 경로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만든 진모영 감독도 18년 가량 방송사 외주제작 PD로 활동했다. 방송사를 떠나 영화제작에 뛰어든 이유도 자신의 저작물을 주체적으로 활용하며 연출력으로 승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2009년 박봉남 감독의 ‘아이언 크로우즈’라는 영화는 KBS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인간의 땅’의 2차 저작물이다. KBS가 이례적으로 2차 저작물 저작권을 허용한 덕분이다. 박 감독은 이를 영화로 제작해 암스테르담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중편 경쟁부문 대상을 받았다.

MBC의 한 PD는 “독립 PD들에게는 작품 하나하나가 감독으로서의 경력으로 쌓을 수 있는 자산이 된다. 이런 것들에 대한 활용 권리를 제작한 PD나 제작사에게 허용하는 것도 우리나라의 영상 제작 역량을 강화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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