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

다시 <암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웬만하면 톰 크루즈 주연의 <미션 임파서블 : 로그네이션>에 관해 쓰려 했지만, 이 영화에 대해 하고픈 말이 많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리즈물에 대한 경탄이나, 전 세계의 주요 도시를 로케이션하며 눈요기 거리를 선사하는 홍보 방식에는 눈길이 가지만, 영화 자체의 매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시리즈의 초반이 더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모든 시리즈가 그런 것처럼) 시리즈가 더해갈수록 톰 크루즈는 몸을 던지며 노력하지만, 시리즈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더 <암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금 극장가에는 <암살> 이외에 할 말이 많지 않다. <암살>은 스크린과 담론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담론마저 <암살>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 진보 매체이든 보수 매체이든 <암살>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행이 원인이 되어 풍성한 담론을 불러왔을 것이다. 아니, 엄청난 속도의 흥행은 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과 관계가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다.      

내가 <암살>을 둘러싼 여러 담론 중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의외로 평론가들의 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기존 최동훈 영화에 비해 캐릭터는 전형화 되었고 대사의 맛은 떨어지며, 내러티브는 반전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만 한다고. 홍콩 느와르 컨벤션을 영화 속에 진열하고 있어, 훗날 전지현이 총 쏘는 영화 정도로 기억될 것이라고 혹평하는 이들도 있다. 영화의 평가는 비평가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나는 정말 궁금했다. 정말 그런 것일까?  

   
▲ 영화 <암살> 포스터
 

먼저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암살>은 순 자본이 180억 원이 투자된 상업영화라는 점이다. 이런 대자본이 투입된 영화에 예술적인 실험을 할 수 있는, ‘간 큰 감독’은 없다. 투자된 자본을 회수할 수 있을 정도의 실험을 행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실험을 하기는 어렵다. <암살>은 분명 <범죄의 재구성>처럼 긴박감 넘치는 편집과 톡톡 튀는 대사의 묘미,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는 음모의 순간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이것을 최동훈 영화의 후퇴라고만 보아야 할까? 혹자들은 <암살>이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 눌려 최동훈의 장점이 살아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 머물러 단순하고 반전이 없는 영화가 되었다고도 한다. 정말 그러한가?

내가 보기에 <암살>은 ‘지나치게(!)’ 잘 만든 대중영화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영화는 예술영화의 상대 개념인, 상업성에 치우친 영화라는 말이 아니다. 대중영화라는 말은, 대중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을 영화적 내용과 형식 속에 잘 담아 불특정 다수의 관객과도 쉽게 소통하는 영화를 말한다. 그래서 정말로 어려운 것은 난해하고 실험적인 예술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깔끔한 대중영화를 만드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잘 만드는 곳은 단연 할리우드이다. 취향과 감성이 전혀 다른 전 세계의 관객들을 상대로 소통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미션 임파서블?)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암살>을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지배하는 지극히 단순한 서사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잘 만든 대중영화는 선과 악의 대립 구도가 명확하다. 선의 편에 선 주인공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적대자가 등장해 주인공은 임무 수행에 어려움을 느낀다. 임무를 수행하면서 협력자를 만나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적대자를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주인공은 나약한 여성 아닌가! 이것은 할리우드의 유명한 시나리오 닥터인 로버트 맥기의 진단인데, 그의 의견은 지금 할리우드에서 교과서처럼 작동하고 있다.

   
▲ 영화 <암살> 스틸컷
 

<암살>은 지나치리만치 이 원리에 따른다. 안옥윤과 속사포, 황덕삼이 암살을 하러 경성에 오지만, 밀정 염석진은 이미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했고, 염석진도 곧 경성으로 온다. 경성은 일제 헌병과 군인이 수시로 지키고 있는 곳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암살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속사포는 하와이 피스톨에 의해 피격된 것으로 보이고, 염석진은 일제 경찰이 되어 그들을 잡으러 온다. 어떤 것도 하기 어려운 상황,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을 단지 친일과 반일의 대립 구도라고 평하는 이는 시나리오에 대해 고민을 깊이 하지 않은 이들이다.

서사의 흥미는 반전에 있다. 적대자가 동조자로 돌아서면서 결국 임무를 완수하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적대자가 동조자로 돌아설 때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앞부분에서 복선을 깔아둬 자연스럽게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암살>은 그 부분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 상하이에서 안옥윤과 하와이 피스톨이 만나 부부 트릭을 쓰는 장면, 경성으로 오는 차안에서 하와이 피스톨이 계속 안옥윤의 사진을 보는 장면이 후의 전환을 위한 복선이다. 두 사람 사이에 적당한 멜로적 로맨스까지 장착해 관객을 더 쉽게 사로잡았다. 이렇게 보면 서브 플롯까지 만만치 않아 영화의 서사 구조는 매우 탄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암살>의 서사는 잘 만든 대중영화의 서사를 따르고 있지만, 흥미로운 지점도 많다. 가령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상황, 쌍둥이라는 설정은 서사의 해석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서사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고질적인 가부장적 문화의 문제이며, 최동훈이 자신의 영화에서 꾸준히 재현했던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 두 문제를 동시에 매끄럽게 풀어낸 최동훈의 영화는 단연 <암살>뿐이다.  

마지막 암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실제 반민특위는 친일부역자들에 의해 해체되었고 친일분자 처단은 실패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최동훈이 한 선택은 판타지적 욕구의 만족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현실적 상황과는 다른, 영화적 환상(현실의 퇴행) 속으로 빠져 버린 것일까? 나는 이 장면이야말로 대중영화의 미덕이자 관객들의 현실적 욕구의 반영이며, 최동훈이 대단히 명민한 감독이라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무죄로 풀려나온 염석진이 미치코를 따라왔다가 막다른 골목의 빈민가에서 명우에 의해 암살당한다. 영화적 상황으로 보면, 눈치 빠른 염석진이 안경을 쓴 안옥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암살 요원으로 선발한 그 안옥윤을 미치코로 오판할 가능성은 적다. 그러나 염석진을 처단할 안옥윤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치코의 패션이 아니라 안옥윤의 패션을 한, 미치코 행세의 안옥윤이 이 장면에 등장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염석진이 처단될 때, 총에 맞은 염석진의 육체는 나무 울타리를 벗어나 갑자기 허허벌판으로 내던져진다. 분명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지만, 이때 보이는, 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적삼의 풍경들. 이것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이들의 제단 앞에, 그들의 혼이 펄럭이는 그 제단 앞에 밀정이자 그들을 팔아먹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여전히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염석진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ritual)이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영화적 필연성은 충분히 있고, 관객의 기대를 정확히 읽어내는 최동훈의 놀라운 감식안을 이 장면에서 느낄 수 있다.   

말이 길어졌다. 단언컨대, <암살>은 최동훈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이다. 기존의 거대한 흥행을 기록한 천만 관객 동원 영화를 보면 <암살>처럼 매끄럽지 않다. 심지어 봉준호, 윤제균, 강제규, 강우석의 영화도 그렇지 않다. 그들의 영화는 대부분 비극적 정서를 아버지의 부재와 결합해 눈물을 자아내게 만들었지만, 스타일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일차원적으로 단순했다. 그러나 <암살>은 다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다가 대중들이 원하는 지점에 정확히 머문다. 때문에 <암살>은 새롭지는 않지만 흥미롭고 매끄러우며 무엇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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