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메이지시대 산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한 데 한국 정부가 들러리만 서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언론은 이에 대한 외교부의 자화자찬을 비판 없이 보도하는 데 그쳤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5일(현지시간) 독일 본에서 제39차 회의를 열고 ‘메이지 일본의 산업 혁명 유산(규슈·야마구치와 관련 지역)’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했다. 

유네스코는 “과거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외국인이 자신들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노동을 했다”는 일본 입장 발표문을 주석 형식으로 등재 결정문에 명시했다. 

6일자 언론은 1면 등에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강제노역을 인정했다는 내용의 제목으로 관련 소식을 전했다. 

구체적으로 <‘조선인 강제노동’ 일 세계유산 등재 결정문 명기 합의>(경향신문 1면), <日, 한국인 강제징용 국제사회서 첫 인정>(국민일보 1면), <日정부 “조선인 강제노역” 첫 공식 인정>(동아일보 1면), <日, 징용시설 ‘강제노동’ 첫 인정>(서울신면 1면), <‘日 강제징용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세계일보 1면), <日帝 강제노역 동원, 日 국제무대 첫 인정>(조선일보 1면), <일본 “한국인들 자신의 의사 반해 강제노동한 사실 있다”>(중앙일보, 10면), <일 군함도 등 산업 유산도 등재…‘조선인 강제 동원’ 사실 인정>(한겨레 2면), <日 ‘조선인 강제노역’ 국제회의서 첫 인정>(한국일보 1면) 등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외교부에서 연 브리핑에서 “우리의 정당한 우려가 충실하게 반영되는 형태로 결정됐다”고 평가했다. 

당초 이 결정은 4일(현지시간) 이뤄질 예정이었다. 한·일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하루 연기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일본은 최종등재결정문에 포함된 발표문에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강제 노역했던 일이 있었으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인포메이션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취한다”고 밝히고 나서야 등재를 인정받았다. 일본은 해당 문구를 결정문 주석에 포함시켰다. 

한국 정부의 외교에 대해서도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한국일보는 <‘강제 동원’ 명기 담판끝 극적 타결…韓 전방위 외교전 통했다>고 했고 중앙일보는 <한국, 일본 선공에 허둥대다 막판 ‘역전 판정승’>고 평가했다. 

   
▲ 한국일보 3면.
 

 

언론은 다만 ‘강제 동원’ 표기를 결정문이 아닌 주석에 반영한 데 대해 “한국은 ‘강제 동원’ 표기를 관철시키는 ‘실리’를 얻었고 일본은 결정문에 포함시키지 않는 ‘명분’를 얻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대응은 늦었다. 일본 정부는 올해 1월 8개 현 총 23개 시설을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했다. 한국 정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산하 민간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지난 5월 4일 일본의 23곳이 세계 유산으로 적합하다고 밝힌 이후에야 이를 인지하고 대응을 시작해 ‘늑장 대응’ 논란이 일었다. 

또 일본의 발표문에 포함된 “forced to work”에 대한 해석이 갈리면서 한일 양국 사이에 또 다른 논쟁이 촉발됐다. 당초 한국 정부는 이 문구를 강제 노동 의미를 명확히 한 “force labour”라는 표현을 쓰려고 했으나 협상 과정에서 “forced to work”로 절충해 합의했다. 

하지만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가 끝나자 자국 언론을 상대로 “forced to work”을 단순히 ‘일하게 됐다’고 번역해 제공하면서 물타기에 나섰다. 6일 현재 산케이신문·요미우리 등 일본 언론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한일 양국의 번역 문제를 다룬 공동 기사에서 “forced to work”라는 표현에 대해 “일본은 ‘일하게 됐다’고 번역하면서 기시다 후미오 외무 장관이 ‘강제 노동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국은 국내용으로 ‘강제 노역’으로 번역해 강제성 있는 노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정부는 해당 문구 해석이 논란이 되자 6일 “영문이 정본”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비열한 되치기에 당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하며 지난달 28일부터 본 현지에서 전시회와 세미나 등을 진행한 민족문제연구소는 6일 긴급성명을 내고 “일본의 의도대로 찬란한 세계유산의 하나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 동아일보 2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어 “21개 위원국 만장일치 합의 원칙을 한번도 깬 적 없던 유네스코가 결국 한국과 일본의 의견 표명만으로 등재 심의를 끝내고 말았다. 세계유산위원회 스스로가 이 사안을 정치적 문제로 치부해 갈등을 회피하고 야합을 방조한 것”이라며 “돈과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세계유산위원회의 현실과 역사인식의 저급함에 비애를 느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민족문제 연구소는 또 “한국 정부가 겨우 ‘강제 노동’이라는 문구 하나를 얻었다고 해서 이를 과대 포장해 외교적 성과로 자화자찬 하고 있다”며 “범정부적으로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온 일본과 달리 뒤늦은 대응에 급급해온 한국 정부와 외교 당국의 무능함에 대해서는 두말이 필요 없다”고 비판했다. 

산케이신문은 6일자 보도에서 ‘강제 노동’에 대해 “외무성 소식통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위원회의 일본 측 발언을 재판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국 정부에 몇 번이나 확인했다”며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역사적 평가라는 점을 명시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위원회의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지 못한 것도 외교적 실수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의장국인 독일을 비롯해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은 한-일 간 합의가 없을 경우 표결이 아니라 내년으로 심의를 넘기자는 입장이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논의가 내년으로 넘어갈 경우 일본은 위원국에서 빠지고 한국만 위원국 지위를 유지하게 돼 한국 정부에 더욱 유리한 상황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런 국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전병헌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은 6일 성명을 통해 “이런 점을 빌미로 일본의 그릇된 역사인식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실한 입장 표명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 중요한 지렛대를 우리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며 “의도적인 ‘굴종 외교’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무능”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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