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파트너가 급히 필요해서요. 정말 미안~~”
“선착순입니다. 1분 전이여..”
“마감..”

방송사에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한 외주 제작사 PD가 이 프로그램 진행자 프리랜서 F씨에게 보낸 문자다. 이어지는 문자는 더 가관이다. “놀랬구나 미안요. 겁낼 건 아닌데”, “아주 건전한 제안인데~~ 놀랐으면 미안~~”

MBC 시사매거진 2580이 지난 7일 방송사 프리랜서 아나운서, MC, 리포터들이 직면한 노동 환경을 다뤘다. 방송사 프리랜서 진행자와 지망생들 증언과 사례를 토대로, 노동을 착취하고 서슴없이 성희롱을 저지르고 있는 방송계 현장을 고발했다.

<관련 보도 : MBC 시사매거진 2580, “방송하고 싶으면...”>

   
▲ MBC 시사매거진 7일자 방송 <“방송하고 싶으면...”>
 

방송 진행자 자리를 제안하면서 약자에게 던지는 갑의 조건은 충격적이다. 거액의 후원을 조건으로 한 만남, 이른바 ‘스폰’이다. “고위 인사 애인이 되면 계절당 5천만 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프리랜서 방송 진행자 A씨가 겪은 만행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발신번호 표시 제한으로 온 전화 한 통. 자신을 모 신문사 임원이라고 소개한 남성은 방송 출연 제의를 하면서 억대 연봉을 제안했다. 하지만 방송사 투자자를 만나보라는 조건이 달렸다. 

모 임원 : “육체적인 거, 어떤 피지컬한(육체적인) 부분을 전혀 안 받고 가면 말만 하러 갈 거 같으면 안 가는 게 나아요.”
A씨 : “몸을 줄 수 있는 여자를 찾으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모 임원 : “자기가 준비가 안 된 사람인데 괜히 나한테 돌려씌우지 마”
A씨 : “전문 브로커 하세요? 스폰서 제안하는 거?”
모 임원 : “내가 지금 얘기하는데 더 이상 저 화나게 하지 마세요. 오케이?”
A씨 :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모 임원 : “지금 당신 이 바닥에서 일 못하게끔 내가 만들 거니까.”(MBC 2580 中, 통화녹취)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아나운서 학원 원장이 문자 메시지를 통해 현직 방송 진행자인 제자에게 “혹시 스폰 받아볼 생각이 있니”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오래 만나도 안 돼. 길면 1년. 짧게는 6개월. 그리고 정리할 때는 뒤끝없이 깔끔하게.”, “OO대표야. 일단 기간은 6개월 정도 예상하고 1억 정도 예상하면 돼.” 제자는 거부했다.

   
▲ MBC 시사매거진 7일자 방송 <“방송하고 싶으면...”>
 

노동 시장에서 을일 수밖에 없는 여성 프리랜서들은 끊임없는 노동 착취와 성희롱을 당한다. 2580이 프리랜서 방송인을 대상으로 한 자체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가 73명 가운데 58%가 임금 체불을 경험했고, 체불 금액이 천만 원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4명 가운데 1명이 “너네는 개야 시키는 대로 하는 개”, “너도 잘리고 싶냐”는 등의 욕설과 폭언을 들었다. 여성 답변자 가운데 과반이 성희롱을 경험했고, 14%가 신체적 성추행을 당했다. 그러나 다수는 방송사나 외주 PD와의 관계 때문에 문제 제기를 포기한다고 답했고, 근로계약서 작성도 회사가 거부하거나 먼저 요구하기 부담스러워 포기했다고 했다. 

권력을 쥔 이들이 여성 프리랜서에게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 까닭은 이들이 ‘여성’이고, ‘비정규직’이며, 계약된 이상 함부로 할 수 있다는 저열한 ‘노동 인식’에 있다. 남성이 지배하는 노동시장에서 여성은 약자다. 진행자를 부품쯤으로 인식하는 방송사는 이들을 비정규직이나 프리랜서로 채용한다. 

   
▲ MBC 시사매거진 7일자 방송 <“방송하고 싶으면...”>
 

문제 의식은 일부 대형 방송사 노동조합도 공유하고 있다. 언론노조 YTN지부는 지난달 노보를 통해 현재 YTN앵커 23명 가운데 9명이 프리랜서이며 그 중 7명이 여성이라고 밝히면서, “도식이 돼 버린 아저씨-아가씨 커플은 여성을 장식용 꽃쯤으로 여기는 남성 우월주의가 만들어냈다”며 “여성을 소비 대상으로 보는 마초적인 천박함 그 자체”라고 자사의 인사 채용 방식을 비판했다.

왕종명 MBC 2580 기자도 구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왕 기자는 “스튜디오에서 밝은 조명을 받고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주목 받는 아나운서, MC, 리포터들은 지상파 같은 일부 대형 방송사 정규직 빼고는 대부분 비정규직이거나 자유 계약인 프리랜서 신분”이라며 “화려하지만 안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정글 같은 방송계에서 홀로 버텨야 하는 직업”이라고 했다. 

갑질의 만행을 고발할 수 없는 환경에서 프리랜서들은 언제까지 눈물을 삼켜야 할까. 언론노조가 사태 심각성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미디어산업 비정규직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미로찾기’ 사업을 펼치고 있다. 약자 개인이 정당한 노동 권리를 찾기 위해선 동일한 조건에 있는 이들과 연대하여 제 목소리를 찾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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