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을 주무르는 경제학자들

30년에 걸친 군인 대통령 정권이 물러나고 문민 정권이 등장한 것이 1993년 2월 말이니, 올해로 22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22년의 시간 동안에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대체로 가난한 이들과 서민의 삶이 과거보다 더 힘들어졌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놓여 있다.

그렇다면 한국경제 구조의 변화에는 무슨 힘이 작용했을까?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같은 자유주의 경제사상가들은 경제의 변화는 자연발생적인 힘, 즉 자유시장(free market)의 자유로운 작동력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지난 22년간 한국경제에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는 실제로는 자유로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눈앞에 뻔히 보이는 실체에 의해 일어났다. 즉 지극히 정치적인 결정들이 있었고, 그 정치적 결정을 내린 정치인들이 있었다. 정치인들과 대통령들이야말로 한국경제의 심대한 구조 변화를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한편에는 김영삼-이명박-박근혜 대통령, 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당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안철수로 이어지는 대통령 또는 대통령 후보자와 그리고 민주당-열우당-새정련으로 이어지는 민주 정당이 있다.

이들 정당과 정치인들이 지난 22여년간 한국 경제의 구조적, 시스템적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이들은 1994년 WTO 가입, 1996년 OECD 가입, 그리고 1998년부터 진행된 IMF 구조개혁(시장개혁)을 이끌었으며, 또한 2011년에 한미FTA와 한-유럽 FTA 협정 체결을 주도한 장본인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세계화’(김영삼), ‘시장개혁-경제민주화’(김대중과 노무현), ‘시장주의 개혁’(이명박), ‘줄푸세’(박근혜)를 국정 슬로건으로 내건 장본인들이며, 집권 이후 그것을 각종 입법과 정책을 통해 현실에 안착시켰다.

   

▲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위원장

 

 

정치인과 대통령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경제학자들

그런데 과연 이들 대통령과 정당은 그 국정 슬로건을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정치인들의 주위에는 늘 경제학자들이 넘실거렸다. 집권당 또는 향후 집권이 기대되는 야당일수록 그러했다. 경제학자의 논문과 책에 담긴 경제사상은 그리하여 정치인들의 입과 행동으로 나타나 입법과 정책으로 구현되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경제학자 케인스는 1936년에 쓴 『일반이론』의 마지막에서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라고 썼다.

여기 한국 경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세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장하성 교수가 2014년 여름에 펴낸 『한국 자본주의 - 경제민주화를 넘어 정의로운 경제로』(헤이북스)이고, 또 하나는 이병천 교수가 역시 2014년에 출간한 『한국 자본주의 모델 -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 자학과 자만을 넘어』(책세상)이며, 마지막은 이영훈 교수가 엮은 『한국형 시장 경제 체제』이다. 최근에 발간된 이들 책의 저자들은 모두 지난 22년간 우리나라의 정치인과 대통령 및 그 후보들의 머리속에 담긴 경제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학자들이다. 

이들 3권의 책의 저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즉 이들 모두 현재 한국경제가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소득격차와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비정규직과 빈민, 청년 실업자와 노인 빈곤이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그 이유와 원인이 뭐냐는 것이다.

자유시장 또는 신자유주의가 모자라서 빈부격차가 심화? - 뉴라이트의 경제사상

먼저 뉴라이트(New Rights) 진영을 대표하는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엮은 책 『한국형 시장 경제 체제』는 오늘날 한국경제가 처한 난관의 근본 원인으로 ‘자유시장(free market)의 결여’를 지적한다. 뉴라이트 학자답다. 물론 이 책에 참여한 모든 필자들의 시각이 이영훈 교수의 뉴라이트 관점과 일관되게 합치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김낙년과 이근, 김주훈 등 11명이 쓴 논문들을 하나로 엮은 모임집이다. 

이영훈 교수는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자신의 글에서 ‘다양한 자본주의’에 관한 서구의 연구 성과를 소개한다. 그는 자본주의에는 4가지의 서로 다른 유형이 있다고 하면서, 자유시장 경제(영국)와 조정된 시장 경제(독일), 국가주의 시장 경제(1980년대까지의 프랑스), 보상국가 시장 경제(이태리, 스페인 등)는 서로 다르다는 기존의 연구를 소개한다. 여기까지는 제도주의 학파의 국제적 비교연구 성과를 그냥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

이영훈 교수의 글에서 특징적인 것은, 한국경제가 ‘여전히’ 과거 박정희 정부에서 비롯된 ‘국가주의 시장 경제’의 구조적 특징을 보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201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한국경제나, 1970년대 박정희 시대나, 여전히 동일하게 국가주의적 시장 경제라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에 따르면 따라서 여전히 한국경제에서는 자유시장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으며, 그리고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한국경제에서 저성장과 소득불평등 심화, 양극화 심화 같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궁극적 원인은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영훈 교수가 제시하는 한국경제의 개혁 과제는 '자유 시장의 복원'이다. 재벌그룹 규제와 노동규제를 필두로, 시장의 자유를 가로막는 온갖 법적, 국가적 규제를 완화 또는 폐지하여야 하며, 또한 네덜란드 수준의 완전한 무역 개방이 필요하다. 자유로운 인간들이 국가의 간섭과 개입 없이 자유롭게 시장에서 경쟁하고 자유롭게 계약을 체결하여야 하며, 국가의 역할은 공정한 법치 즉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관리하는 심판관에 머물러야 한다.

뉴라이트의 자가당착 - 박정희 향수와 자유시장 사이에서 오락가락

그런데 김영삼-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에서도 매우 강한 정신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영훈 류의 책을 읽다보면 도무지 그 논리를 종잡을 수가 없다. 이영훈 교수의 책이 1960-80년대의 박정희식 경제체제 즉 30년간 지속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의 긍정적 측면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정희 향수’는 60대 이상 노년층만이 아니라 한국 보수파들이 공유하는 정서적 공감대이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유지에 박정희 향수라는 정서적 공감대가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현 박근혜 정부에 청와대와 행정부에서 활동하면서 그 경제정책의 기획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경제학자들의 머리속은 뒤죽박죽이다. 즉 과거 박정희 정부를 이끌었던 경제관념과 그 성과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가당착에 빠진 한국 보수파의 오락가락 경제관에 대하여 나는 장하준 교수와 함께 2012년에 발간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장하준, 이종태, 정승일 공저)의 첫 장에서 비판적으로 지적한바 있다.

그런데 장하성 역시 자신의 책 『한국 자본주의』에서 “보수 우파의 ‘박정희 향수’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스스로 부정하는 형용 모순이며 시대착오적이다”고 비판한다(그의 책 93쪽). 이병천 역시 자기 책 『한국자본주의 모델』의 제1부에서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은 정작 한강의 기적을 낳은 박정희가 취한 국가주도 경제성장론을 거부한다‘고 비판한다(80쪽).

국가주도 경제는 모두 실패한 사회주의 계획·관치 경제? - 장하성의 고전적 자유주의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개혁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진보적 논의가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나는 장하준과 나처럼,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에 성립되어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경제를 규정했던 국가주도 경제성장 모델이 대체로 성공적으로 작동했으며 그렇지만 외환위기 이후 민주 정부에 의해 한국경제에 급격히 이식된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로 인해 경제성장이 침체되고 더구나 소득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우리는 한국경제가 2000년 이후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과 제도를 무분별하게 도입한 결과 미국 등 신자유주의 국가가 직면하는 경제문제와 동일한 문제를 겪고 있으며,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역전시켜, '큰 국가, 작은 시장'이라는 국가 주도(하지만 이번에는 민주주의 공화국) 경제모델로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이와 대립되어, 장하성과 김상조, 홍종학, 유종일 교수 등은 ‘시장 자본주의 원리를 무시한 국가주도의 계획경제와 관치경제야말로 한국경제의 잘못된 적폐이며, 따라서 시급한 개혁 과제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쟁 환경의 조성이다’라고 주장해왔다. 이것은 1990년대 소액주주운동을 시작으로 재벌개혁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관치금융 해체와 경제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진 흐름이며, 장하성 교수가 깊이 관여해온 흐름이다. 

장하성 교수의 새 책 『한국 자본주의』는 1960-80년대의 30년간, 6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시기를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다를 것이 없는 경제, 따라서 시장 원리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관치경제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빈부격차 심화 등 양극화 역시 ‘그로 인해’ 발생하고 있다고, 즉 그 관치경제의 유산으로 인하여 소득분배가 왜곡되고 재벌에게 소득과 부가 집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장하성의 박정희 개발독재에 대한 비판은 그것이 지나친 나머지, 다양한 유형의 국가주도 자본주의와 계획경제(여기에는 전후 프랑스와 일본, 핀란드, 오스트리아 등도 포함되는데) 전부를 사회주의 계획경제+관치경제라고 단순화시켜 비난하고 있으며, 특히 국가의 산업(육성)정책마저 사회주의 관치경제라는 엉뚱한 비난을 전개하고 있다.   

산업(육성)정책을 둘러싼 장하성의 자가당착

장하준과 나는 여러 책에서 국가(물론 이번에는 독재국가도, 관피아 국가도 아닌 그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공화국)가 주도하여 복지국가를 만들고 또한 박정희가 구사한 것과 유사한, 그러나 보다 현대화된 형태의 산업정책(신산업육성정책)을 통해 한국경제의 미래성장 산업을, 그것도 (시장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서비스업이 아니라 (첨단)제조업을 중심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이영훈과 구자유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장하성은 국가는 산업정책 같은 것은 절대 해선 안된다고 하는 점에서 서로 의기투합한다. 물론 양자는 복지국가와 노동권 보호 같은 사안에서는 서로 대립하며, 이영훈이 복지국가와 노동권 보호 같은 것은 절대로 해선 안된다고 하는데 반해, 장하성은 그것에 대해 긍정적이다.

아무튼 장하성은 『한국 자본주의』에서 산업(육성)정책이란 바로 관치경제이며 그것은 이미 그 몰락으로 실패가 입증된 사회주의 계획경제이고, 더구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낳는 경제적 실체이므로 절대 불가하다고 본다(제2장). 물론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한국경제 새판짜기』(2007)에서 유종일과 김상조, 홍종학이 제시했던 견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반론적으로, 신생 산업을 정책적으로 국가가 육성하는 일체의 경제정책을 산업정책이라 부른다. 따라서 IT와 BT, NT 분야에서의 신산업(신기술)을 중소벤처기업을 중심으로 육성하는 것 역시 일종의 산업정책이다. 그런데 장하성과 김상조, 유종일은 IT, BT, NT 산업과 그리고 중소벤처기업을 국가가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찬성한다. 이병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자가당착이 아닌가? 산업육성 정책 ‘일체’를 관치경제라고 거부하면서, 동시에 ‘특정’ 산업(육성)정책은 관치경제가 아니라며 찬성한다니, 이게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모든 사람은 죽는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일부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세계화’

그런데 이병천의 책 『한국 자본주의 모델』 역시 1970-80년대 중화학공업화로 대표되는 산업정책은 대기업-재벌그룹에 대한 특혜적 지원으로 엄청난 비용을 국민 전체에게 전가했으며 그것이 대마불사와 같은 도덕적 해이를 야기했고 그로 인해 97년 IMF 금융위기가 발생했다고 비판한다(116쪽).

   

▲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 ⓒ 연합뉴스.

 

 

하지만 장하준과 나는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비롯한 여러 책과 그리고 학술논문들을 통해, 김영삼 정부(1993-97)의 세계화 정책과 그 일환인 WTO 가입(1994)와 OECD 가입(1996)으로 이미 박정희식 산업정책과 금융규제(관치금융)은 해체되었으며, 따라서 97년 IMF 금융위기의 발생 원인은 국가주도 경제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섣부르게 해체한 때문이라고, 즉 적절치 못한 금융세계화(금융시장 개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조셉 스티글리츠의 『세계화와 그 불만』(2002년)와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 역시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김영삼 정부도 그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더 했고, 모두가 ‘국가 주도 경제는 나쁘고 시장주도 경제가 좋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박근혜 정부 역시 똑같다. 1994년 WTO 가입과 1996년 OECD 가입, 그리고 1998년 이후의 IMF 개혁, 2011년의 한미FTA 협정이 모두 ‘국가 주도 경제’ 즉 ‘중상주의 해체 만세’라는 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있다.

이러한 흐름을 통칭 신자유주의라 부르며, 실제로 이런 흐름을 명시적으로 바람직한 것으로 주장한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 그리고 한국의 공병호 등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하지만 자유주의의 진보성(진보적 자유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재벌체제와 관치금융이 존속되고 있기 때문에 중상주의는 여전히 강고하다’고 보며, 그것을 해체하고 ‘시장 주도 경제’를 만들어야 비로소 양극화가 해소되어 중산층이 두터운 경제, 누구나 공정·공평한 시장질서가 형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시장이 주도하는 경제’란 바로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경제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열렬히 주창하고 다니는 그것이 아니던가?

중소-영세기업은 천사, 대기업은 악마?

일방적으로 대기업과 재벌을 편드는 이영훈 류의 신자유주의 뉴라이트 학자들과 달리, 장하성과 김상조 같은 구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중소벤처기업을 중시한다. 그리고 산업(육성)정책 일체를 거부하지만, 유독 중소벤처 기업을 육성하는 산업(육성)정책만은 찬성한다. 여기에는 대기업과 재벌그룹은 비효율과 도덕적 해이의 원천이지만, 중소벤처기업은 효율적이고 강건한 경제의 구조적 디딤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과연 대기업과 재벌그룹이 오로지 비효율과 정경유착, 도덕적 해이의 실체였다면 과연 1960년대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고도성장과 그리고 소득불균형 완화라는 현상을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기업은 악마, 중소벤처기업은 천사’라는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과는 달리, 실제의 모든 통계는 대기업 위주의 산업육성 정책이 펼쳐진 1960-80년의 기간에는 빈부격차가 줄어든데 반하여, 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는 25년간 우리나라에서 빈부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중소벤처기업을 중시하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1998년 이후부터는 그것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기업은 악마, 중소벤처기업은 천사라는 선악 이분법으로는 한국경제의 부활을 도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대기업 또는 대자본이 반드시 필요한 업종·산업(대규모 설비와 대규모 R&D가 필수적인 산업)이 있으며 그렇지 않고 중소자본·영세자본으로도 충분한 업종·산업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중국경제의 ‘대굴국기’를 이끌어낸 등소평의 말대로 ‘대기업(검은 고양이)이건, 중소벤처기업(흰 고양이)이건, 좋은 임금과 근무조건의 양질의 일자리(쥐)를 많이 창출 할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전향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장하성과 이병천의 책 역시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 지속적으로 줄어들던 소득격차가 1990년대 중반, 특히 1998년 이후, 즉 민주정부 수립 이후 급격하게 다시 악화되고 있다는 명명백백한 통계적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다. 

민주 정부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빈부격차 심화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는 비아냥거림을 낳았다. 그리고 비아냥거림은 2007년 말 대통령 선거에 이어 2012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정부가 연이어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결국 빈익빈 부익부로 대표되는 양극화가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장하성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이 여전히 덜 완성된 근대화, 즉 덜 완성된 자유주의 개혁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여전히 한국경제에는 과거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의 중상주의(mercantilism)의 유산인 재벌그룹 체제와 관료주의(모피아)의 지배력이 유지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빈부격차 심화와 ‘갑을 관계’ 같은 온갖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시장원리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의 재벌(그룹) 개혁과 모피아 타파를 중심으로 하는 (구)자유주의적 개혁이 한국 경제의 발전 단계 (즉 ‘전근대’ 단계)에 상응하는 진보적 과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몇 달 전에 사민저널에 쓴 글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하지만 한국은 더 이상 개발도상국도 아니며 하물며 ‘전근대’ 국가도 아니다.
[ 참조 : 사민저널 / 한류 열풍과 <왔다 장보리> - 개도국적 진보를 이젠 넘어서자 ]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5년 말에 3만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며, 박근혜 정부와 언론은 우리나라가 곧 ‘3050’ 그룹, 즉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이면서 동시에 인구 규모가 5천만 명이 넘는 나라들에 속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한국의 제조업 수준과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 7위이며, 군사력은 세계 9위이다. 그리고 국내외 연구기관들은 한국의 종합 국력을 세계 9위로 평가하고 있다. 즉 한국은 이미 G10이라 불릴만한 강국이며, 자본주의 7대 강국이다. 한국은 전근대 국가가 아니라 이미 근대화-현대화를 충분히 수행한 나라이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아직까지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에 (즉 아직까지 재벌과 모피아 같은 ‘전근대적’(?) 중상주의 체제가 온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신)자유주의의 원리, 즉 시장 자본주의의 원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관철되고 있으며, 그 결과의 하나가 바로 빈부격차 심화이다.

한국은 G10에 속하는 강국이며, 선진국 초입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것과 함께 빈부격차와 계급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화’와 함께 빈부격차가, 착취가 심화되고 있다.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론』이 다루는 대상은 미국과 독일, 프랑스와 스웨덴 같은 선진국들인데, 그는 20세기 후반부터 그런 선진국들에서 빈부격차가 다시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국들에서 빈부격차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눈 앞에서 발생하는 빈부격차 심화를 ‘전근대적’ 현상이라고 지적하면서 마치 근대화-현대화된 시장 자본주의(시장 주도 자본주의화)를 완성하게 되면(이것이 바로 장하성 등의 요구인데) 빈부격차가 사라질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우리 눈앞에서 매일 매순간 발생하는 온갖 범죄와 충돌, 갈등의 전선은 전근대 대 근대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자본주의적인 갈등선이며, 더구나 시장 자본주의(market capitalism)가 매일 매 순간마다 더욱 더 그 간격을 넓히고 있는 갈등선이다.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 구자유주의냐 뉴딜 자유주의냐?

한편, 한국경제의 현 단계 진보 과제를 구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의 회복에서 찾는 장하성, 김상조, 김진방 등과 달리, 이병천은 『한국 자본주의 모델』에서 한국경제에 지금 당장 필요한 개혁 방향은 구자유주의가 아니라 미국의 뉴딜 자유주의라고 힘주어 말한다. 즉 20세기 초반의 테오도어 루즈벨트(1901-1909년에 미국 대통령)와 1930년대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 시절에 이룩된 미국의 반독점(Anti-Trust) 정책과, 그것을 뒷받침한 미국 민주당의 뉴딜 자유주의야말로 우리나라가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을 이룩하기 위한 사상적 기초라고 이병천은 말한다.
그런데 그것을 구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부르건, 뉴딜 자유주의(진보적 자유주의)라고 부르건, 장하성과 이병천이 각각 주장하는 재벌개혁-경제민주화의 실체적 내용은 똑같다.

[참조] * 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는 다음의 두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사민저널 /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 자유주의냐 사회민주주의냐?
사민저널 / 마르크스와 베른슈타인이 보지 못한 점

   

▲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도 경제성장 모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사진=미디어오늘 자료사진.

 

 

경제민주화가 1차 과제, 복지국가는 2차 과제?

장하성과 이병천은 각자 자신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한국경제의 개혁 과제로 (1) 재벌개혁(반독점)을 통한 경제민주화, (2) 복지국가, (3) 유럽식 참여경제를 주창한다. 이 점에서도 양자는 서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1)의 재벌개혁-경제민주화를 구자유주의라고 부를 것이냐(장하성) 또는 뉴딜 자유주의(이병천)라고 부를 것이냐의 호칭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유시장을 교란하는 일체의 국가개입을 반대하는 뉴라이트 이영훈과 달리 장하성과 이병천은 모두 복지국가를 지지한다. 더구나 두 사람 모두 모두, 스웨덴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가 소득양극화 해소와 분배정의 달성에 가장 뛰어나다는 점도 인정한다. 특히 장하성은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분배의 공정성을 지향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450쪽).

하지만 장하성과 이병천에게 있어 복지국가는 일반 서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하는데 있어 가장 시급한 개혁 즉 1차 개혁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벌개혁-경제민주화라는 보다 시급하고 중차대한 개혁 과제에 이어지는 후차적 과제일 따름이다.

구체적으로, ‘함께 잘 사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장하성의 새 책은 그것을 달성하기위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경제개혁 과제로 재벌그룹의 ‘소유지배구조 개선’과 그리고 ‘초과 내부유보금에 대한 세금’과 같이 주로 대기업 및 대기업집단을 겨냥하는 개혁안을 제시한다(제8장).

이병천 역시 그의 책에서, 희망버스로 대표되는 ‘노동 진보’와 그리고 안철수의 삼성동물원 비판으로 대표되는 ‘공정시장 진보’가 하나로 연대하여 ‘경제민주화 동맹’을 구축하여야 하며, 그리하여 무책임 재벌을 민주적으로 길들이는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복지국가 동맹의 구축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278쪽).

그렇다면 왜 경제민주화 동맹이 복지국가 동맹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할까? 그 이유에 대하여 장하성은, 이번 책에서는 아니지만 신문 칼럼 등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말해왔다. 즉 재벌그룹 개혁 등을 통해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게 되면 그간 독과점과 정경유착, 경제력 남용을 통해 지대(rents)를 취득해온 시장 ‘왜곡’(distortion) 현상이 사라져서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고, 공정한 시장질서 하에서는 모두가 공정한 가격(임금과 하청단가 포함)을 분배받는 ‘정의로운 경제’(즉 정의로운 소득분배 = 1차 분배)가 달성되는 까닭에(하지만 나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조세와 국가재정을 통한 소득의 재분배(즉 2차적 소득분배)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재벌개혁-경제민주화(소득의 1차 분배 정의)를 먼저 시행하지 않고 복지국가(소득의 2차 분배 정의)부터 먼저 시행하게 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하성(그리고 김상조)의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신의 입장을 뉴딜 자유주의(미국의 진보 자유주의)라고 달리 부르고 있는 이병천 역시, 실제로는 장하성과 똑같은 논법을 구사하면서 ‘재벌개혁-경제민주화를 먼저 시행하여야만 비로소 그 바탕 위에서 복지국가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장하성과 이병천만이 아니다. 정운찬 전서울대 총장과 김광수 경제연구소장 역시 ‘재벌그룹 개혁 등 경제민주화를 통해 공정한 시장 질서를 구축한다면 공정한 가격 메커니즘(임금 및 하청단가 포함)이 작동하여 공정하고 정의로운 시장분배(1차 소득 분배)가 이루어져 소득 양극화가 크게 완화될 것이고, 그 결과 소득의 재분배(즉 복지국가)의 필요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해왔다.

자유주의의 경제민주화론 - 공정한 시장질서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먼저 경제민주화를 ‘공정한 시장질서’의 구축으로 이해하는 시각, 즉 자유주의의 시각이 있다. 이것은 주로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이해하는 경제민주화인데, 여기서는 경제민주화를 ‘완전한 경쟁적 시장’의 구축과 이를 위한 ‘경제력 집중의 완화·축소’로 이해한다. 이렇게 보는 대표적인 인물이 장하성과김상조, 그리고 정운찬, 김광수, 선대인 등이다. 이들 뿐만 아니라 2년 전 선거에서 안철수와 문재인 후보를 도왔던 김진방, 유종일 등등 일체의 진보·개혁 경제학자들이 경제민주화를 이렇듯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으로 이해한다.

경제민주화를 이렇듯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의 자유주의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경제학자들은 완전한 경쟁적 시장이 구축되었을 경우(이것을 ‘기회의 평등’이라 부르는데) 자본과 노동, 토지와 같은 생산요소의 소유자들 사이에 매우 공정·공평한 소득분배가 달성되며 따라서 ‘불로 소득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관점에서 불로소득은 오로지 시장질서가 ‘왜곡’(distortion)되었을 경우에만 나타나난다. 그런 불로소득을 그들은 ‘지대’(rents)라 부른다.

‘시장왜곡'으로 인하여 지대(불로소득)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경우(불공정거래)가 재벌그룹으로의 경제력 집중과 대기업의 수요독점(그로 인한 하청단가 인하), 노동조합(특히 산별노조)의 존재, 그리고 국가의 경제 개입이다. 따라서 이들은 재벌그룹 개혁을 통해 경제력 집중을 축소시키고, 대·중소기업 상생정책으로  하청단가 인하 압력을 제거하며, 대기업 정규직의 노동조합을 약화·해체시키고 관치경제를 축소·해체(모피아 해체)하는 등이 불로소득 제거를 위해,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이들은  ‘완전경쟁 시장 또는 공정한 시장질서’가 구축되어야 공정·공평한 소득분배가 달성된다고 믿으며 따라서 이러한 내용의 구조개혁 즉 시장개혁(market reform)을 수행되게 되면 누구나 1차 소득분배에서 공정하게 분배받는 까닭에 소득의 2차 분배 즉 재분배(증세와 복지재정)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계 역사 속의 경제민주주의

하지만 경제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1920년대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고 그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 그리고 북유럽 사회민주당들은 - 스탈린의 전면 국유화 및 명령식 계획경제에 대비되는 프레임에서 그것을 체계화시켰다. 여기서는 경제민주주의(Wirtschaftsdemokratie)가 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사회공동체·시민공동체의 권리와 권력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조합이 산업별 및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사용자 측에 맞설 권리,  그리고 대기업 이사회에 종업원들이 자신의 대표(이사)를 직접 선거로 선출하여 내보낼 권리로 이해되었다. 대기업을 사회화(socialization)하는 방법은 국유화만 아니라 이사회  및 회사의 각종 의사결정 권력기구에 종업원 대표가 참여하여 직접적인 ‘노동자/종업원 통제’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거시경제 차원에서는 국민경제의 민주적·사회적·시민적 통제를 위한 각종 공적 기구들(한국은행과 금융감독기구, 공정거래위, 방통위 등등)에 노동조합과 사회·시민의 대표가 참여하는 것을 경제민주주의 일환으로 이해하였다.    

이렇듯 경제민주주의를 총자본에 맞서는 총노동·사회공동체·시민공동체의 권리와 권력, 그리고 사회적·민주적 통제로 보는 시각에서는 자유주의에서처럼 불로소득을 ‘시장왜곡’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지 않는다. 일체의 불로소득은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아무리 공정한 시장질서가 확립되어 중소벤처기업 위주의 경제가 된다 하더라도 그 덕택에 경제권력을 휘둘르게 된 중소벤처기업 사장님들이 예컨대 종업원 월급을 자발적으로 올려주고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조합 인정에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자유주의적 재벌그룹 개혁에 따라 예컨대 삼성그룹이 축소·해체되고 그 결과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이 그룹에서 분리·독립된다 하더라도, 그 회사들의 신규 주주와 경영진이 자발적으로 종업원 임금과 하청단가를 인상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실제 자유주의 경제학자와 그 정치인들은 그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단한 착각이다.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이에 엄청난 심연이? 

삼성과 같은 재벌그룹들의 심각한 폐해를 부인하는 이들은,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학자들을 제외할 때, 없을 것이다. 재벌그룹 개혁의 필요성은 누구나 동의하며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향, 어떤 내용의 재벌그룹 개혁이어야 하는가?

먼저 앞서 말했듯이, 1960-80년대 30년간의 군부 독재 시기에 국가 주도, 재벌 주도 경제성장과 함께 소득격차와 빈부격차가 상당히 완화되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반면에 1998년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시점부터 양극화와 함께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벌어졌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구자유주의 또는 뉴딜 자유주의로 포장된 그간의 민주정부에 의한 재벌그룹 개혁은 그 양극화와 전혀 무관할까?

장하성은 자신의 책에서 자신이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인수위에 비공개 참여하였으며, 사실상 그 정부의 재벌그룹 개혁과 금융개혁(관치금융 타파)을 자신이 주도하여 설계하였다고 자랑스럽게 그 비밀 작업을 밝히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공공부문 개혁, 노동시장 개혁 등 4대 시장개혁을 추진했다. 그리고 장하성과 김상조 등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재벌그룹 개혁과 금융개혁은 ‘구자유주의’(고전적 자유주의)에 따른 정당한 개혁’이었다고 본다. 이병천 역시 그것은 뉴딜 자유주의의 정신을 따르는 정당한 개혁 조치였다고 본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재벌그룹 체제와 관치경제로 대표되는 ‘전근대적’ 경제구조, 즉 박정희식 ‘중상주의’와 ‘절대왕정’의 경제적 유산들이 지배하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빈부격차 심화 등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서구가 이미 2백년 전에 달성한 ‘근대화’의 과제, ‘제대로 된 자본주의’를 만들어나가는 과제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진보적 과제라고 본다.

장하성과 함께 <경제개혁연대>에서 활동해온 김상조 교수는 『한국경제 새판짜기』(홍종학, 유종일과 공저)와 『종횡무진 한국경제』 등의 책에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회경제적 개혁 과제는 바로 서구가 이미 2백년 전에 달성한 ‘고전적 자유주의’의 실현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영국의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의 중상주의를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던 아담 스미스와 그리고 19세기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 미국의 헨리 조지로 대표되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정치경제학이 오늘날 한국경제의 개혁을 위하여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된다.

중상주의 타파 + 고전적 자유주의는 철의 역사 단계 법칙?

고전적 자유주의가 한국경제의 현 단계에서 여전히 진보적 유용성을 가진다고 말하는 장하성과 김상조, 홍종학, 유종일 등은 마치 ‘모든’ 나라는 반드시 1. 중상주의 단계에 이어 2. 자유주의 단계를 거쳐야만 하고, 그렇지 않고서는 제3의 단계인 스웨덴식 복지국가 단계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한다. 즉 세계 각국의 역사는 반드시 자유주의(자유 시장)의 단계를 거치면서 중상주의 체제를 철저히 해체한 이후에야 비로소 제3의 역사 단계인 복지국가를 향한 시동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경제는 1960-80년대의 30년간에 걸친 중상주의(박정희식 국가주도 경제와 재벌체제)를 거쳤는데, 따라서 1990년대 중반부터는 마땅히 자유주의 단계를 거쳐야 했고, 따라서 1998년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취한 시장 개혁은 -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 고전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정당한 개혁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시장 개혁이 미진했던 까닭에 - 바로 그 이유로 인하여 - 여전히 재벌그룹과 관치경제의 핵심이 해체되지 않아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그런 까닭에’(?) 빈부격차 심화와 비정규직 증가, 하청단가 인하, 금융위기 같은 시장경제 왜곡 현상이 지속된다고 그들은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오늘날 우리 국민들이 겪고 있는 빈익빈 부익부, 비정규직 증가, 가계부채 증가 등 온갖 경제 문제들이 발생하는 원인은 신자유주의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박정희 식 중상주의 체제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주의적 경제개혁, 즉 재벌그룹 축소와 모피아 타파, 토건주의 타파 같은 과제가 (그걸 그들은 경제민주화라고 지칭하는데) 복지국가를 향한 노력보다 시간순서상, 그리고 논리순서상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순위 과제로 제시되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경제민주화(그것도 자유주의의 맥락에서 이해된 협소한 의미의 경제민주화)이고, 복지국가는 2순위 과제로 밀려서 천천히 해도 되는 일로 된다. 

이런 잘못된 시각이 지난 2012년의 총선과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안철수 캠프와 문재인 캠프의 선거 전략으로 그대로 나타났다. 안철수 후보나 문재인 후보나 모두 순환출자 규제와 출자총액제한 같은 재벌개혁, 그리고 금융시장에 미치는 관치금융 즉 모피아 관료들의 영향력 축소를 대통령 선거의 최우선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안철수와 장하성은 2015년의 현재 시점에서도 그와 비슷한 내용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중상주의적 정부개입은 20세기 선진국에도 만연

장하성과 김상조, 유종일, 홍종학 등의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마치 중상주의적 국가개입은 선진국들에 있어 18세기까지만 존재했고 그 이후 19세기에는 오직 고전적 자유주의가 지배한 양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장하준 교수가 쓴 『나쁜 사마리안』은 장하성과 김상조 교수처럼 말하면서 개발도상국들에게 (금융)시장개방과 자유무역의 장점을 설득해온 ‘나쁜 사마리안들’ 즉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WTO와 OECD의 주류 경제학자들에 대한 비판서이다. 그리고 장하준 교수가 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같은 책들 역시 ‘중상주의적 국가 개입’(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개입 산업정책)이 18~19세기 유럽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서방 선진국에서도 광범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경쟁적 시장(공정한 시장질서)의 효율성을 찬미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 경제학 책들의 주장과 달리 세계역사의 실제 기록들은 18세기 영국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비판한 영국)에서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선진국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중상주의적’인 국가개입 즉 적극적인 산업·기업 육성 정책을 활용하여 선진국으로의 도약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19세기 중후반 독일 비스마르크의 후발공업화가 대표적인 그런 사례이고, 또한 20세기 초반 일본의 세계열강으로의 성공적인 부상 역시 마찬가지 사례였다. 게다가 1950년대 이후의 프랑스의 드골주의와 후발공업화도 그런 사례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킨 독일의 아데나워 우파 정부 역시 그 사례이다. 1950년대 이래 국가(민주주의공화국) 주도의 경제성장을 통해 오늘날의 부국으로 떠오른 오스트리아와 핀란드도 비슷했고, 하물며 복지국가 스웨덴 역시 이러한 ‘중상주의적’ 산업 육성 정책을 과거 1백년간 수행한 끝에 선진공업국으로 도약한 셈이다.

따라서 중상주의 → 자유주의 → 복지국가라는 3단계 역사 발전론이 철의 법칙처럼 한국경제에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 허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해서는 2012년에 번역 출간된 라이너트의 책 『부자 나라는 어떻게 부자가 되었고, 가난한 나라는 왜 여전히 가난 한가』(도서출판 부키)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 책이 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통해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공기업 사영화에 대한 조건부 찬성

한편 장하성은 그의 책 『한국 자본주의』에서 개방된 경제 하에서 민간업체들과 시장에서 경쟁하는 공기업들의 사영화 즉 포스코와 담배인삼공사(KT&G), 그리고 한국통신(KT)의 민영화는 잘한 일이라고 본다. 다만 전기와 철도, 가스와 같은 자연 독점 산업에서까지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한 것은 잘못된 일이었고, 특히 비정규직을 양산한 노동시장 유연화는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과도한 민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신자유주의의 과잉’이라고까지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해 부분적으로 비판적인 그의 새 책은 독자로서 읽기에 몹시 기분이 좋다. 15년 전에 김대중 정부가 한참 시장개혁-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공기업 사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진할 때 장하성 교수가 저런 목소리를 높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제나마 장하성 교수가 과거의 과도한 사영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저렇게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을 보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과연 장하성이 ‘정당한 개혁’이라고 말하는 재벌개혁 및 금융개혁은 1998년 이후의 소득양극화와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아무 관련이 없을까?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재벌그룹 개혁과 금융시장 개혁 과정에서 대기업과 은행들이 줄줄이 해외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대의 대기업들과 은행들의 소유지배구조와 경영이 뉴욕과 런던, 홍콩에 본사를 둔 펀드들과 투자은행의 영향 하에 편입되었다. 이른바 펀드 자본주의 또는 주주자본주의가 나타난 것이다. 금융개혁의 결과 은행들은 기존의 산업대출, 대기업 대출을 대폭 줄이고 가계금융과 주택담보대출을 크게 늘였다. 그 결과 경제 전반에 있어 생산적인 산업투자가 침체되고 반면에 부동산 거품과 함께 신용불량자가 급증했다.

잘못된 방향의 재벌그룹 개혁의 결과 30대 재벌그룹 중 절반이 해체되어 사라졌고, 그 상당수 계열사들이 해외 초국적 기업 또는 해외 사모펀드에 매각되었다. 해외 매각된 기업들은 연구개발투자와 국내외 설비투자를 더 늘리지 않으며 또한 정규직 채용을 늘리지 않고 있다. 해외 매각되지 않은 경우에도,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의 결과로 대다수 상장 기업과 금융회사들은 하나 같이 ROE와 ROA, 주주이익 환원율(주식배당 + 자사주 매입), 주가상승을 중시하는 이른바 주주중시 경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경영상 지극히 곤란한 처지에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이들 상장 기업과 금융회사들은 정규직 종업원들에 대하여 희망퇴직·명예퇴직과 정리해고를 상시적으로 행하고 있고, 그러한 인건비 절감 덕택으로 주당 기대수익 증가에 기뻐하는 주식시장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 개미투자자들(소액주주들)의 환호성이 이어지고 있다. 과연 이 모든 것을 정당하고 ‘정의로운 시장개혁’, 구자유주의 또는 뉴딜 자유주의에 따른 좋은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주자본주의 비판은 곧 자본주의 비판? 

게다가 장하성의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매우 괴이쩍은 논리가 있다. 주식자본은 곧 주주자본주의라는 것이다(제3장). 따라서 그는,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곧 주식자본(회계상 자기자본)에 대한 비판이며 따라서 주식자본(자기자본)을 부인하는 주장이고, 그것은 곧 회사 제도 자체에 대한 부인, 즉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부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독일의 공동결정제(종업원 대표의 이사회 참여) 대기업들과 유럽의 협동조합 법인들, 그리고 워크아웃 기업들(채권은행이 부채의 출자 전환을 통해 지배하는 기업)도 주식자본을 회계상 가지기 때문에 따라서 주주자본주의 기업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한국전력과 같은 국영기업들 역시 회계상 자기자본(주식지분 또는 출자금)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주주자본주의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회계상 자기자본(주식 또는 출자금)을 갖는 일체의 법인체’는 그 본질상 주주자본주의라는 어거지 논리를 전개한다. 비상장 주식회사와 협동조합, 국유기업을 포함하여 일체의 법인격 즉 회사(corporation)는 그 본질적 실체상 주주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장하성의 논법에 따르자면, 과거의 소련과 동독 경제, 그리고 오늘날의 북한과 중국 경제 역시 본질적으로 주주자본주의 경제이다. 세상에!

월스트리트와 여의도 증권가가 ‘정의로운 자본주의’의 주연?

장하성의 주장은 억지 논리의 극치를 보여준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서 주주자본주의를 검색하면 장하성의 논법이 얼마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주주자본주의(또는 주주가치 자본주의: shareholder value capitalism)과 다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주자본주의란 우리나라에서 ‘주주 중시 경영’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그것은 (1) 상장된 주식회사를 전제로 하며, 또한 (2) 그 상장 주식이 매우 활발하게 증권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주주-지배주주 또는 지배적 경영자가 아니라 포트폴리오 투자자들 즉 증권시장에서 거래를 일삼는 소수주주들(minority shareholders: 이사회를 지배하지 않는 펀드와 개인투자자들)의 이익을 가장 중시하는 것을 그 고유한 가치(values)로 삼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주주자본주의를 옹호하건 비판하건 관계없이, 주주자본주의를 관철하는 핵심적인 두 메커니즘으로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와 그리고 적대적 M&A(기업지배권에 대한 적대적 공격)을 지적한다. 전자는 한국에서 장하성 교수 등이 10여 년 전에 재벌개혁 방식으로 내세운 소액주주 운동으로 구현되었고, 후자는 2003년 SK그룹에 대한 소버린 펀드의 공격, 2006년 KT&G에 대한 미국 칼 아이칸 펀드의 공격으로 구현되었다.

2006년 이후 장하성 펀드(미국계 투자은행인 라자드가 조성한 기업지배구조 개선 전용 펀드)가 수행한 샘표식품, 남양유업 등에 대한 기업지배권 공격 역시 주주행동주의와 적대적 M&A 위협이 동시에 결합된 전형적인 주주자본주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미의 주주자본주의를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월스트리트이다.

장하성은 자신의 책에서 론스타와 소버린, 장하성 펀드와 같은 사모펀드의 활동이 “먹튀가 아니다”라고 구구절절이 항변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제4장). 

한국의 재벌그룹과 금융시장은 많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구조개혁의 주역이 과연 론스타와 소버린, 장하성 펀드와 보고펀드 같은 사모펀드들과 그리고 공모펀드(소액주주들!)의 펀드매니저들이란 말인가? 그리고 장하성이 그의 새 책에서 희망하는 ‘정의로운 자본주의’를 이룩하는 새로운 역사의 주체, 새 시대의 주연 배우가 사모펀드와 공모펀드를 운영하는 펀드매니저와 그 투자자들이란 말인가?

배당 성향이 줄고 있으므로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다?

장하성은 그의 새 책에서 반복해서 말하기를, 한국에서는 지난 10년간 기업들의 배당 성향이 지속적으로 줄었으며, 따라서 주주자본주의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업들의 내부유보금이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반면에 노동임금과 배당소득은 줄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들의 현금배당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주주자본주의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그의 논리에는 한 가지 빠진 점이 있다. 게다가 경영대 교수로서 대학에서 재무·금융·회계를 가르치는 그가 몰랐을 리 없는 까닭에 고의성이 엿보이는 지점이다. 즉 기업들이 주가 관리(주가 부양)을 위해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자사주 매입(그리고 소각)과 그리고 그 액수가 그의 책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주주자본주의 하에서 현금배당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사주 매입과 그 소각이다. 왜냐하면 회사가 자기 돈(사내유보금)을 투입하여 자사주를 매입할 경우 주식시장에서 거래되는 총유통 주식이 줄어드는 까닭에 주가가 상승하고 그 결과 소액주주들(공모펀드 + 재테크 개미투자자들)이 환호한다. 더구나 그렇게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까지 해버릴 경우에는 총발행 주식의 양이 감소하는 까닭에 대주주와 소액주주 양자 모두의 지분율까지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까닭에 누이(소액주주) 좋고, 매부(대주주) 좋은 일이 된다. 

실제로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가 월스트리트를 우리나라의 기업지배구조 및 금융시장의 미래로 제시하며 기업지배구조 및 금융산업 개혁에 나서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기업들이 현금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 형태로 기업의 법인 소득을 주식투자자들에게 적극 분배해왔다. 순이익에 대비하여 현금배당에 자사주 매입(소각)을 합한 총액을 ‘주주이익 환원율’이라고 부른다.

의도적으로 대주주가 없고 소액주주가 판치는 방향으로 사영화된 KT와 KT&G, 포스코 같은 과거 공기업들의 주주이익 환원율은 연 50%에 달하고 있다. 당기 순이익의 절반을 주식 투자자들에게 분배(소득의 1차 분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성전자 등 100대 글로벌 상장회사들이 모두 비슷한 수준에서 주주이익 환원율을 맞추면서 주주 중시 경영(즉 주주자본주의)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2003~2008년 기간 중에 상장사 720개의 매년 순이익 80~100조 원 중에서 그 40~50%인 연 30~50조 원이 현금배당 + 자사주 매입·소각에 사용되었다. 주식 투자자들과 재벌총수 일가들은 그만큼의 불로소득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 이후, 그리고 최근의 글로벌 경기침체로 인한 수익성 저하로 인해, 상장기업들의 주주이익 환원 비율은 약간 줄었는데, 하지만 여전히 당기순이익의 30% 내외를 현금배당 + 자사주 매입(소각)의 형태로 주주(소액주주 + 대주주 + 재벌일가) 이익으로 환원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매년 30~50조 원의 액수가 주주이익 환원이 아니라 종업원(비정규직 임금인상과 신규 청년 고용) 임금의 형태로 총노동측 소득으로 추가될 수 있다면, 불로소득을 크게 줄일 수 있으며 더구나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를 크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대기업들이 쌓아놓은 높은 사내유보금에 과세하겠다고 발표했다. 경기가 좋지 않으니 대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을 더 적립하지 말고 주주배당, 종업원 임금인상, 생산적 투자 증대에 나서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 발표 이후 주주배당 확대를 환영하는 국내외 투자자들의 환호소리만 요란할 뿐, 임금인상이나 투자 확대에 관해서는 감감 무소식이다. 그런데 장하성 교수가 그의 새 책에서 자랑스럽게 언급해놓았듯이, 대기업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를 처음으로 제안한 것은 장하성과 김진방 등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제안이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최경환 총리가 그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내유보금 과세보다는 차라리 법인세 실효세율 인상이라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이 더욱 좋았을 것인데도 말이다.

정의로운 자본주의와 경제민주화 동맹의 주역이 펀드매니저?

장하성에 따르면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에서의 근본 모순은 노동자 대 자본가(여기에는 소액주주와 대주주 모두가 포함되는데) 사이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리는 세계 속에서는 한편에는 노동자와 펀드(그리고 펀드 매니저) 그리고 소액투자자(재테크 개미투자자)가 하나의 이해관계 일치 동맹군으로 형성되어 있고, 다른 한편에서 그들에 맞서서, 법인기업으로서의 대기업(내부유보금을 과잉 축적하고 있는) 특히 재벌계 대기업들이 있다. 이 양자 간에 벌어지는 이해관계의 적대적 대립이 그가 그리는 세계에서의 근본적인 모순이다. 

그러므로 장하성의 새 책에 따르면, 노동운동과 주주행동주의 운동(소액투자자들과 펀드매니저)은 하나로 연대하여 ‘경제민주화 동맹’을 형성하여 대기업 특히 재벌그룹 대기업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견해가 이병천의 책에도 등장하는 바, 이병천은 ‘희망버스’로 대표되는 ‘노동 진보’가 경제민주화-재벌개혁으로 대표되는 ‘공정시장 진보’와 연대하여, ‘경제민주화 동맹’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주자본주의와 총수 자본주의의 야합과 결탁

모든 자기자본(주식자본) 회사의 존재를 주주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장하성의 어거지 논리에 비한다면, 이병천은 주주자본주의를 그 온당한 의미에서 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즉 그는 재벌가문 일가 역시 주주자본주의의 수혜자이며, 펀드들과 재벌 일가의 이익은 일치한다고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한편, 장하준과 나는 함께 공저한 책들에서 누누이, 요즘 들어 재벌가문 일가가 산업자본가에서 금융자본가(금융자산가)로 환골탈퇴하고 있으며 또한 주식 배당과 자사주 매입 소각 역시 대주주 일가 즉 재벌가문 일가의 이익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누이(총수) 좋고 매부(일반 투자자) 좋은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이병천과 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병천은 재벌가족(대주주)와 대기업그룹(법인기업, 대기업)의 분리 가능성을 부인한다. 즉 예컨대 이건희 일가와 삼성그룹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그에 반해 나는 “이건희 일가 없는 삼성그룹”, “김우중 없는 대우그룹”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으며, 그것이 몽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최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본다. 이에 관해서는 내가 1년 전에 펴낸 『굿바이 근혜노믹스 - 정승일의 단도직입 경제민주화론』을 읽어보기 바란다.

신자유주의는 한국 경제를 위한 보약?

고전적 자유주의를 주창하는 장하성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모호한 인식과 태도는 한국 경제와 한국 기업을 전체적으로 분석하는 데 심각한 왜곡 요인이 되고 있다. 그는 굳이 신자유주의라는 용어 대신 ‘시장 근본주의’라고 부르면서, ‘시장 근본주의는 문제이지만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한국 경제에 보약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주주자본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총수 자본주의가 문제이며, 오히려 월스트리트 식의 펀드 자본주의(공모 펀드 및 사모펀드, 헤지펀드)가 주도하는 경제를 만둘어야 한국 자본주의에서 ‘경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자기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한국 경제에 주주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엉뚱한) 이유로 한국경제에서 신자유주의가 관철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한다. 그렇지만 주주자본주의는 오늘날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관철시키고자 하는 여러 원리의 하나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는 여러 양상과 모습으로 나타난다. 규제완화와 함께 부자감세,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 복지와 사회서비스의 사영화,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화, 자본 이동의 세계화 등 다면적인 모습을 취한다. 그리고 그 양상과 모습의 총체를 학자들은 신자유주의라고 일반적으로 통칭한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1998년 이래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에 깊숙이 편입된 한국경제에서도 상장 대기업들에 있어 전형적인 주주자본주의 현상이 관찰되고 있으며 노동시장 유연화와 함께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대립도 극심해지고 있다. 공공서비스 사영화와 지속적인 부자감세, 금융 및 유통서비스업의 규제완화 등 선진국의 신자유주의 일반에서 나타났던 모습들도 예외 없이 그대로 지난 20년간 나타났다.

그리고 자유주의의 경제 원리가 고착되면서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이 급격히 확대되고, 부와 학력의 대물림 현상을 포함하는 세습 자본주의(세습 귀족제)가 전개되고 있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론』에서 지적한 자본주의의 불평등 경향이 한국 자본주의에서도 그대로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도처에 존재하며, 어두운 운명처럼 청년들의 삶을 지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지난 2백년간의 세계 역사가 명명백백하게 보여주듯이, 인간 불평등을 치유할 해법은 결코 ‘보다 많은 시장의 자유(free market)'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 불평등의 교정은 오직 그것을 교정하고자 하는 사회정의(social justice)를 향한 열정에 가득 찬 사회공동체와 정치(국가)공동체의 집단의지, 공동의지, 일반의지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5천만 국민들이 서로 ‘함께 어울리는’(=social) 하나의 운명공동체로서 결속한 우리들의 사회공동체와 국가공동체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하여 시장경제에 강력하게 개입하는 개입주의(interventionism)가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원리적으로 시장의 자유(freedom of market)와 대립한다.  

그런데 아담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시장의 자유’를 찬양하는 장하성 교수의 고전적 자유주의 논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가당착의 대혼란에  빠진다. 그는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는 시장 경쟁으로부터 초래된 자본주의의 본질적 결함 때문만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시장의 힘은 불평등을 만들어 낸 요인 중 하나일 뿐 유일한 요인이 아니며, 오히려 시장을 조정하고 실패를 보완하는 역할을 포기한 정부가 불평등을 악화시키는데 기여한 것이다”(580쪽)라고 말한다.

즉 한편으로 그는 국가/재벌 주도 경제(즉 그가 말하는 중상주의)의 폐해(불평등 심화)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가는 시장경제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하면서(즉 더 많은 자유시장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는 ‘시장을 조정하고 실패를 보완하는 역할’을 더욱 강화하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뒤의 요구는 국가(민주주의공화국)의 적극적 경제적 역할을 주문한 것인데, 하지만 그것은 국가(민주주의공화국)의 시장개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앞의 요구와 충돌한다. 앞말과 뒷말이 다른 장하성 교수의 자가당착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결론적으로, 장하성 교수의 새 책에는 한국 경제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글로벌 대불황의 시대를 타개할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가 해법으로 제시하는 ‘경제민주화 동맹’ 역시 그다지 ‘정의로운 자본주의’로 이 나라를 이끌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나의 까탈스러운 ‘지적질’에 불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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