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사태’ 관련 기고를 청탁받고 원래 썼던 내용을 뒤집어엎고 있다. 이완구 국무총리 때문이다. 그의 사의 표명은 내 예상보다 빨랐고, 덕분에 원고를 날리고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간다. ‘성완종 정국’은 이렇게 급변한다. 이런 정국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니 피로도가 쌓인다. 기존에 취재하던 아이템은 일단 스톱이다. 웬만한 특종 아니면 ‘성완종 태풍’에 휩쓸려 버린다.

이 정도 이슈가 터지면 기자들은 오히려 ‘풍요속의 빈곤’에 시달린다. 뻔히 없는 줄 알면서도 기자들은 습관적으로 서로 “뭐 좀 없냐”고 묻는다. 사실 별 대답을 기대하고 던지는 질문은 아니다. 무언가 ‘한 건’ 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가득한데 딱히 쓸거리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쓸거리는 있으나 결국 기존의 핵폭탄급 보도를 뒤따르는 보도라서 ‘업데이트’하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기사는 아니겠지만 기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쓰는 기사가 기왕이면 큰 폭발력을 갖길 원할 것이다.

주간지 마감은 목요일이다. 4월 10일 그날도 여느 금요일 아침처럼 마감을 마친 상태에서 다음 주 아이템 준비를 구상하며 출근하는 길이었다. 그런데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경향 때문에 난리 났다”는 멘트와 함께 기사 링크가 하나 떴다. 링크를 열기 전부터 성완종 사태 건이라고 직감했다.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에서 봤음에도 내용이 강했다. 제목을 보자마자 입에서 “이게 뭐야”라는 말이 터졌다. 한가하게 다음 주를 구상하는 일은 다음 주로 미뤘다. 아침에 곧장 성완종 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충남 서산으로 내려갔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측근들은 화가 나 있었다. 성 전 회장과 가까운 한 인사에 따르면 그는 자살하기 전 그에게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했다고 한다. 특히 이 총리에 대해선 욕설까지 하며 섭섭함을 토로했단다. 쉽게 말해 “내가 어떻게 도와줬는데 이럴 수 있냐”는 것이다. 정치인들에 대한 기업인의 로비는 일종의 ‘보험’이라고 한다. 물론 그의 로비가 보험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성 전 회장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란 말이다.

   
▲ 이완구 국무총리(왼쪽)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이치열 기자
 

어쩌다 보니 성완종 사태의 주인공이 이 총리가 된 느낌이다. 성 전 회장에게 일격을 맞은 이 총리가 결국 버티고 버티다 사의를 표명했다. 대통령이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약 일주일 정도가 남은 상태다. 대통령과 총리가 모두 없는 ‘국정공백’을 최소화하려면 조금 더 버텨야 했지만 그 시간을 견디는 것조차 그에겐 버거운 일이었나 보다. 이 총리 편을 드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성완종 사태를 취재하며 느낀 점이다. ‘편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여기저기서 안 좋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국무총리 인사청문회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깨진 유리창이론’이 떠올랐다.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두면 지나가는 행인들도 관리되지 않는 건물로 간주해 나머지 유리창도 부담 없이 깨뜨리게 되고, 그 지역 자체가 우범지역이 된다는 이론. 단단한 방탄유리와도 같았던 이 총리의 위상에 금이 가자 그가 권력이 있을 때 잠자코 있던 이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됐다. 정치권·기업인·고향사람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을 보니 ‘이 총리가 오래 버티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이 총리에게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엄민우 시사저널 기자

 

 

정치인으로 살다보면 유리창에 금이 가는 것을 100% 막기는 힘들다. 금이 갔을 때 돌을 던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이 돼야 한다. 이 총리뿐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이것에 취약하다. 언젠가 한 번은 윗사람이 아닌 주변이나 아랫사람들의 평판에 기대야할 순간이 온다. 이때 기댈 곳이 없으면 외로워지고 궁지에 몰린다. 현재의 이 총리는 많이 외로워 보인다. 그는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지만 5월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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