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 아침 출근 길에 편집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냐? 바로 계동 현대사옥으로 가라." 기자 생활 1년도 되지 않은 내게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 자살 사건 취재 임무가 떨어졌다. 그 길은 이어 현대아산병원 장례식장으로 이어졌고, 그 길은 다시 대검찰청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이어져 거의 4년 동안 서초동을 들락날락 하게 됐다. 당시와 비슷한 일이 다시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모양이다. '성완종 리스트', 혹은 '성완종 게이트' 어떻게 전개될까?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번째 포인트
성완종 회장은 증거를 얼마나 남겼을까?

뇌물, 정치자금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이런 은밀한 거래의 경우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의 주장이 완전 반대다. 그래서 어떤 주장이 '신빙성' 있느냐를 가려야 한다. 그런데 준 사람이 죽었으니 신빙성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다만 이런 사건에는 '제3자'가 끼어 있기 마련이다. 정몽헌 사건이 그랬다. 정몽헌에게는 '이익치'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건희의 '이학수' 처럼 재벌들은 '금고지기'를 두기 마련이다. 정몽헌의 비자금 조성부터 전달과정 까지 모두 개입했던 이익치는 검찰에서 모두 불었고, 검찰은 이익치를 바탕으로 수사와 기소 공소유지까지 할 수 있었다.

성완종에게 '이익치'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나온 정황으로 보면 그 정도의 측근 인물은 없는 것 같다. 본인 스스로가 정치에 발을 들여놔 정치인을 만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이런 일은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다만 그 자료는 모두 남겨놨을 것이다. 그리고 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수행이든 측근이든 개입한 사람들이 있다. '보험'(뇌물, 정치자금)을 가입할 때 '증서'(유사시 증빙 자료)를 받아 두지 않는 사람 어디 있겠나. '피의자가 사망했네', '공소시효가 끝났네' 운운하지만 고로 검찰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수사를 할 수 있다.

두번째 포인트
검찰은 어디까지 갈까.

정몽헌 회장에 대한 수사는 당초 '대북송금'으로 시작됐다. 대북송금의 자금원으로 현대그룹을 털다 보니 수상한 돈의 흐름을 포착한다. 상당한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 갔다. 검찰은 누군가의 모든 계좌를 볼 수 있다. 수사 당시에는 CD(양도성예금증서)가 전달 수단으로 유행했는데, 명동 사채시장을 뒤져 현금화 내용까지 모두 추적해냈다. 일단 계좌에서 돈이 나왔으면 그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모두 맞춰야 수사가 끝나는 것이다. 디지털 데이터 복원 능력도 대단하다. 발로 밟아 깬 하드디스크에서도 데이터를 80% 이상 복원해 낸다. 성완종 회장이 리스트까지 만들어 놓은 마당에 검찰이 손만 대면 기소 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유무죄 판단은 대중들에게 '아웃 오브 안중'이다.

문제는 검찰이 그럴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정몽헌 사건 때와 성완종 사건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대북송금' 건으로 정몽헌 회장을 캐다보니 정치권에 뿌려진 수많은 비자금이 드러났다. 송광수-안대희의 검찰은 '대북송금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대북송금 건은 특검으로 넘어가기도 했고) 수사를 확대시켜 그해 겨울 대선자금 수사로까지 나아갔다. 당시 이를 두고 서초동 안팎에서는 두 가지 설이 있었다. 첫째는 취임과 동시에 검찰에 엿을 먹인(강금실 법무장관 임명-검사와의 대화) 노무현 대통령에 엿을 돌려주기 위해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에 나섰다는 것. 둘째는 동교동 계와 인연을 끊고 불법적인 정치자금과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자 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시대적 소명이 투영된 수사였다는 것이다. 지금 김진태 총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시에 따라 자원외교를 털었는데, 털다 보니 이게 다가 아니네. 덮어야 할까 더 캐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피의자가 일을 저질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번째 포인트
이미 이정현이 해답을 내놨다.

2004년 대선자금 수사가 누구의 의지였느냐와 상관없이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손해보는 장사만은 아니었다. 한나라당이 받은 돈은 10배? 100배 정도 됐다. 한나라당에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우며 강력한 어퍼컷을 날렸다. 한화갑 등 동교동 계도 한 방에 날려버렸다. 그리고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의회를 장악한다.

박근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핸들링 할까. 야당 끌어 들여 물타기?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사임하겠다"고 했으나, 지금 새누리당이 야당 붙들고 물타기 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고 MB를 끌어들이는 것도 뻘줌하다. 일단 성완종 회장의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야당과 MB쪽 인사는 나오지 않는다. 성 회장이 생전에 야당에 새누리당 보다 더 많은 로비를 펼쳤으리라 보기도 어렵다. MB 쪽은 아직 모르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실상 2004년 대선자금 수사 때의 반전 카드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이번 악재를 최대한 조용하게 털고 가는 방법을 택하지 않을까 싶다. 그 방법은 과감하게 꼬리를 잘라내는 것. 리스트에 오른 이들이 현직 총리에 광역시장, 전현직 비서실장들이 총망라 돼 있기는 하지만, 사실 마음만 먹으면 못 털어낼 것도 없다. 오히려 '읍참마속' 운운하며 '부패를 용납하지 않는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 시도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이 사건을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됐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따라서 오히려 가혹하게 관련자들을 몰아부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 기조는 이미 이정현 의원이 언급하지 않았나 싶다. 이 의원은 "로비가 통하지 않는 정권이라는 점이 입증됐다"고 했다. 그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끝까지 수사해야 한다고도 했다. 문제는 이완구, 김기춘, 허태열, 홍문종 등 당사자들의 반응이다. 검찰 수사를 통해 이들을 '파렴치범', '배달 사고 양아치' 까지 몰아갈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수모를 감내할 것인가? 난 그들이 충분히 감내 하리라고 본다.

네번째 포인트
MB는 이번에도 '억수로 운 좋은 사나이'로 남을까?

한 가지 변수가 있는데, 이번 사단의 단초였던 '부패와의 전쟁', 즉 '자원외교' 수사, 달리 말해 'MB 털기'라는 당초의 목표를 계속 가져 가느냐의 문제다. 2004년에는 현대그룹 비자금으로 시작했지만 SK, 삼성, 현대차 등등이 마치 릴레이 하듯이 고해성사를 하면서 대선자금 수사로 확대됐다. 현재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측근들을 잘라내고 가벼운 몸으로 MB 쪽을 털어내 반전을 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친박 친이 가리지 않고 동시에 전방위적으로 사정을 진행할 수도 있다. 지지부진한 지지율과 국정운영의 난맥을 칼춤으로 풀어내지 않으리라는 법 없다. 다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박 대통령이 이런 도박을 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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