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과 겨울 사이 많은 얼굴들을 떠나보냈다. 빈곤사회연대와 가깝게 지내던 분들이 많이 돌아가셨다. 짧은 뉴스로 빈곤층의 외로운 죽음이 전해 질 때 인터넷의 댓글 창은 안타까움과 추모로 채워지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쉽다. 재산과 소득의 차이에 따라 교육과 건강상태, 사회적 관계망까지 결정되는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죽음은 늘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2008년 나는 종각역에서 거리 노숙인을 만나는 상담활동에 참여했다. 사람들이 긴 박스집을 짓고 잠을 청하는 역사 내 광고판 아래 작은 몸집의 할아버지 한 분이 입주하셨다. 제법 낯이 익은 어느 날 할아버지는 자신을 ‘염 할아버지’로 불러달라고 했다. 빚쟁이에 쫓겨 노숙생활을 시작했다며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영 불편하다며. 몸이 좋지 않은 염 할아버지께 긴급주거지원 등을 통해 거처를 마련하시길 추천해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했다. 몸이 나으면 다시 일 하고 싶다, 남의 돈 받아 살기 부끄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노인들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자료사진
 

염 할아버지는 건강상태가 더 악화된 이듬해 고시원에 입주했고, 부양의무자기준으로 인한 몇 번의 탈락 끝에 가족관계 단절을 인정받아 2010년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다. 서대문 인근 고시원에 살던 할아버지는 지난 해 가을 매우 위중한 상황에서 발견되었다. 할아버지를 상담하던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병원으로 모시고 갔으나 거동이 불편한데 보호자가 없다는 이유로 입원을 거절당하고, 요양병원으로 모셨으나 입원 직후 돌아가셨다.

염 할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시장통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던 할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월남에서 운전을 배워 핸들을 잡기 시작한 그는 인생 대부분의 기간 동안 화물운송 노동자였다. 제일 큰 차를 몰고 전국을 누비고 사우디에도 다녀왔다. IMF이후 염 할아버지는 ‘사장님’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회사에 고용되어 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차가 있어야 운전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환갑도 넘은 나이에 신차를 구입한 이후였다. 그는 신차의 할부금 몇 달치를 갚지 못한 채 허리디스크로 입원했다. 소득은 없는데 새로 산 덤프는 매달 하마처럼 돈을 먹어치웠다. 저금은 수술비와 입원비로 써버리고, 퇴원 후 월세를 내지 못하자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 빚에 시달리던 그는 채 낫지도 않은 허리로 쫓겨나듯 거리로 나왔다.

나는 염 할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신차를 고집했었냐고 물었다. 그는 새로운 차가 적재량이 많고, 일을 얻거나 마진을 남기기도 좋다고 이야기했다. 허리디스크가 발생할 줄 알았다면 모를까, 십년은 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고 했다. 또 나는 왜 보험이나 적금에 가입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며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마땅히 정해놓은 거처도 없고 그 때 그때 옮겨가며 살다보니 딱히 미래를 계획할 생각도 못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적금이나 보험에 가입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생활에 변동이 있을 때 얼마 가지 않아 해약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투자, 덤프트럭 구입은 실패했고, 그는 미끄럼틀을 탄 듯 가난으로 빠져들었다. 염 할아버지도 이런 상황을 염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프고 싶어서 아팠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그의 ‘리스크’(손실)는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었다. 

이것은 염 할아버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난은 생각보다 천천히 다가오며 ‘여기서부터 빈곤입니다’라는 표지판을 세워두고 기다리지 않는다. 16.7%의 상대빈곤율, 11.7%의 절대빈곤율이라는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반복적인 경험’으로서의 가난은 이미 넓게 퍼지고 있다. 전체 가구의 4분의 1이 최근 3년 사이 한번 이상 빈곤선 이하 소득을 경험했다. 정기적인 일자리나 건강한 신체, 안정적으로 살 집이 있다는 것 등 하나의 기둥이라도 남아 있을 때 가난은 아직 ‘염려’다. 그러나 질병, 부채, 실직 등으로 삶이 조여들기 시작하고 감당할 수 없는 위협으로 자라는 순간 가난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노동자들의 리스크는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며, 빈곤의 최종적 국면에서도 국가의 복지는 허약하기 짝이 없다.  

빈곤을 이야기하면 극단적인 빈곤의 모습만이 떠올라 자신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한편 ‘그 정도는 아니어도 나도 가난 때문에 괴롭다’는 이야기 역시 듣는다. 뉴스 한 토막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가난을 염려하는 이들이 연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다. 빈곤의 경계는 모호하며 ‘사건’으로 대변되지만 대부분 빈곤의 발생은 사건이 아니라 종합적인 경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김윤영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

 

 

염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나는 ‘할아버지가 가난해지지 않았으려면 뭐가 좀 나았으면 좋았을까?’ 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매달 월급만 받았으면’ 이라고 답했다. ‘매달 월급’ 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그는 사실 안정적인 삶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여전히 비정규직 노동자가 광고탑에, 해고노동자가 공장 굴뚝에 올라있고,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생활이 어려운 사회에서 과연 우리는 ‘개인적’으로 빈곤하지 않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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