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EBS PD의 관심사는 ‘강자의 역사’다. 정확히는 강대국을 만든 리더십의 ‘실체’다. 그는 지난해 EBS <다큐프라임> ‘강대국의 비밀’편을 연출하며 몽골‧네덜란드‧영국‧미국의 성공조건을 분석했다. 다큐멘터리 호평에 힘입어 펴낸 책 <강자의 조건>도 4쇄를 찍어내며 인기몰이 중이다. 여느 역사학자보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오늘날 한국사회, 특히 한국의 권력층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어서다. 임기 2년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에게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강자의 조건>에 따르면 강대국을 만든 리더십의 실체는 힘이 아닌 관용과 개방을 통한 포용이다. 관용과 포용은 EBS <다큐프라임> ‘강대국의 비밀’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었다. 이주희PD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도덕적으로 훌륭한 나라는 없다. 강대국에서 제일 중요한 건 리더십이다. 19세기 대영제국 국력의 크기는 로마나 미국에 비해 압도적이지 않았다. 프랑스와 독일도 영국에 뒤지는 국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은 리더십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조정했다. 힘이 세니까 리더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리더십은 어떻게 얻어질까. 각 나라마다 처한 상황은 달랐지만 공통적 요소가 관용이었다. 

   
▲ '강자의 조건'. 이주희 저. MID 출판사.
 

관용이란 무엇일까. 잘못을 눈감아주고, 상대편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관용일까. 이주희PD는 관용을 설명하며 로마인의 예를 들었다. “로마인은 스스로를 소아시아인과 이탈리아 토착민의 혼혈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정체성을 혈통에 가두지 않았다. 관용으로 나아가기 용이한 조건이었다.” 이주희PD는 “관용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문제와 관련됐다”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우리는 단군의 자손, 일본은 천황의 신민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다. 정체성이 협소하다. 제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혈통에 대한 인식이 관용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혈통에 대한 폐쇄성은 다른 사회적 배타성과 연결되며 ‘구별 짓기’로 이어진다. 혈연‧지연‧학연을 따지는 식이다. 박근혜정부 주요인사가 TK출신으로 채워지는 현실은 이 같은 협소한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언젠가 몽골 유목민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농경민족의 후손이고, 유목민은 야만적이고 비문명적인 존재라는 편견 아닌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난 몽골 유목민은 인간적이고 순수했다. 돌이켜보면 농경민족은 폐쇄적인 공동체였고, 낯선 사람이 오면 그를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반면 유목민은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을 떠돌아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반가운 손님으로 바라봤다. 몽골 유목민이 갖고 있던 그런 개방성이 대제국을 만드는 힘이었다.”

이 같은 개방성에 기초한 관용은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다. “낯선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노마드의 자세다. 그게 몽골을 세상에서 가장 넒은 영토를 가지게 했다. 이질적인 것에 대한 개방성이 있어야한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현실적으로 좀 더 나아지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하고, 한민족으로 사고하는 관념이 우리 스스로를 협소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EBS '다큐프라임' 강대국의 비밀편의 한 장면.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을 보면 과거 아버지 박정희 시대에 만났던 사람, 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만 중용하는 폐쇄성을 보인다. 낯선 것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이다. 리더가 이와 같은 폐쇄성을 갖고 있다면 국가운영이 어떻게 이뤄질지는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이주희PD는 관용이 “정체성을 얼마나 협소하게 정의하느냐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의 딸’이라 정의하는 것과, ‘노동자의 딸’이라 정의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관용의 결을 보여주게 된다.

이주희PD는 “한민족이란 정체성이 여러 면에서 한국의 미래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우리는 다문화 가정을 배척하는 문화가 있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은 한국사회에서 타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인이다. 한민족이란 정체성이 갖는 배타성은 조만간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과거 로마 황제 중에서는 게르만 족도, 북아프리카 사람도 있었다. 모두 로마인이다. 이런 사회가 천년을 간다. 관용이 있는 사회가 적은 비용으로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는 네덜란드의 역사를 통해 배울 점이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는 적은 땅, 적은 인구, 합스부르크 왕가의 압제 속에서도 해양패권을 장악했다. 그 힘을 보면 네덜란드인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넓게 정의했다. 네덜란드는 종교자유를 원하는 사람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었다.” 이 PD는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가능하려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질적인 것을 쉽게 받아들이게 되면 혁신에 대해서도 유연해질 수 있다. 스페인에 비해 영국이 더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펠리페2세에 비해 엘리자베스2세가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찔렀다.” 

하지만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당장 청와대부터 엘리자베스2세보다는 펠리페2세를 닮은 것 같다. 변화에 대한 유연성이 떨어진다. 인사 참극이 반복되어도 인사시스템이 개선되지 않는다. 2015년 신년기자회견 당시에는 연설문 문구까지 2014년 신년기자회견을 그대로 배껴와 논란이 일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일방통행의 결과이자, 혁신의 의지가 없는 국정운영의 단면이기도 했다. 

이주희PD는 “강대국이 무너진 공통점은 유연한 개방성을 상실했을 때였다”고 강조했다. 중세시대까지 유럽에 비해 진보했던 중국 문명이 우월감을 갖고 있다 근대세계에 접어들며 어떠한 위기를 겪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권력을 갖게 되면 개방성을 상실하고 우월감을 갖게 된다. 내가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럼 개방성은 사라지고 몰락으로 이어진다.” 대통령 뿐만아니라 모두가 새겨들을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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