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시봉>이라는 영화 제목을 처음 보면서 나는 복고를 노린 발 빠른 영화가 한편 만들어졌구나, 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1970년대의 대표적인 음악감상실인 쎄시봉을 소재로 무슨 내용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쎄시봉에서 활동한 유명 가수들의 이야기에 간간이 대중가요를 넣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쉬울 수도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무척이나 어려울 수도 있다. 이미 영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형화 되니(음악이 등장하는 러브스토리?) 쉬울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형화를 넘어서야 하니) 어려울 수도 있다. 

김현석 감독은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반 무교동을 주름 잡던 쎄시봉의 인기 스타들, 즉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의 이야기에, 이루어지지 못한 첫 사랑의 안타까움을 버무려 놓았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 영화 <쎄시봉>은 향수를 자극하는 아련한 아픔의 영화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강한 클라이막스가 없는, 밋밋한 사랑 영화에 지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신기하게도, 또는 당연하게도 <쎄시봉>은 김현석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기존의 그의 영화와 묘하게 맞물리면서 그 정점에 있다. 무슨 말인가?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1970년대 특정 장소를 빌린 <광식이 동생 광태>이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0년대의 <스카우트>의 현장이며, 2000년대의 <시라노;연애조작단>이다. 여기에 그의 데뷔작 까지 보태면, 개화기부터 최신까지, 각 시대의 불가능한 첫 사랑의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는 공통점과 만나게 된다. 물론 순간순간 시대적 상황이 영화 속에 재현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야기의 보조재에 머물 뿐 그것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결국 <쎄시봉>도 이 자장 안에 있다.

   

▲ 영화 <쎄시봉> 포스터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은 스포츠 영화의 틀을 가지고 왔고, <스카우트>는 야구와 5.18을 코미디로 버물려 놓았으며, <열한시>는 스릴러와 SF적 상황을 결합해 놓았다. 이제 <쎄시봉>에서는 음악영화를 시도한다. 이 현란할 정도의 장르 질주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첫 사랑의 불가능이 남긴 아련한 아픔이다. 지독하게도 그 아픔을 직시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변주해내는데, <쎄시봉>에서는 한번 어긋난 사랑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물의 슬픔을 직시한다. 

내가 이 영화가 김현석 영화의 정점이라고 한 것은 간단하다. 그가 이제까지 재현했던 20대의 사랑을 뒤돌아보는 인물을 통해 그 시절을 더 깊이 직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며, 그렇게 직시한다고 하더라도 아픔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최승자의 말을 빌려보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이 40대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김현석의 카메라는 20대 사랑의 아픔 현장에만 있었지만, 드디어 이 영화에서 (다른 영화와 달리) 다른 인물이 연기하는 20년 뒤의 모습, 즉 40대를 등장시킨다(가령 20대는 정우가, 40대는 김윤석이 연기한다). 이 단절과 연결을 강조하기 위해 김현석은 마치 두 편의 영화를 만든 것처럼 다른 후반부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 영화의 핵심은 후반부이다. 

   

▲ 영화 <쎄시봉> 스틸컷

 

 

정말로 이상하게도, 영화의 주인공은 송창식이나 윤형주, 이장희가 아닌,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오근태란 인물이다. 물론 조영남이나 송창식, 김세환과 달리 이 사람은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고, 영화 자막에서도 직접 그 사실을 밝힌다. 그의 상대역은 누구인가? 쎄시봉의 모든 가수들이 사랑했던, 귀엽고 발랄하고 당찬 여성, 그 시절 그 공간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녀의 모델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는 이 여성도 민자영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결국 영화는 1970년대의 쎄시봉을 배경으로 하지만 정작 가상의 두 인물의 어긋난 사랑과 아픔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굳이 1970년대 쎄시봉을 영화적으로 재현할 필요가 있었을까? 김현석은 낭만적 사랑의 환희와 지독한 사랑의 아픔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 1970년대의 쎄시봉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에는 다소 예상할 수 있는 시선으로, 쎄시봉의 분위기를 재현하고 캐릭터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에 깊은 관심을 쏟다가 이내 다소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 즉 촌놈이 사랑하는 세련된 서울 여성의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영화는 조금씩 힘을 잃는데, 그 힘을 당시 대중가요로 복원하려 한다.  

감독이 선곡한 대부분의 노래는 사랑에 빠진 인물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그중 가장 깊이 영감을 받거나 사랑했던 음악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와 “웨딩 케잌”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원치 않는 사람에게 떠난 사랑에게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첫사랑의 애절함을 그린 노래들인 것이다. 이 노래와 영상과 내용의 조화 또는 조화하려는 감독의 노력. 영화는 보편적인 사랑의 정서와 가요의 낭만성으로 포장되다가 이윽고 아픔의 정서로 나가면서 살짝 시대정을 흘리기도 한다. 사실 여기까지 영화는 나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 영화 <쎄시봉> 스틸컷

 

 

이 영화가 나에게 다가온 것은 영화는 후반부이다. 딱 한 장면에서 멍해졌다. 전반부와 달리 오근태와 민자영만 등장하는 후반부에서 결국 두 사람은 20년만에 LA에서 만난다. 그것도 공항에서. 영화의 반전인 비밀을 알게 된 자영은 근태를 따라가 기어이 ‘그’ 말을 하고 만다. 못 들은 척 돌아섰지만 탑승구에서 몇 걸음 옮기다가 자영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저앉아 통곡하듯 우는 근태. 그 모습이, 한번 어긋난 사랑을 바라만 보면서 스스로 자신을 버린 채 살아가는 인물의 그 후회와 회한이 나에게 깊이 다가왔다. 이 정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는 좋은 시절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그 시절에 품었던 사랑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시절,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엇갈림은 결국 평생의 방향을 결정해버리고 인간은 그 결정을 되돌리지 못한다. 때문에 되돌리려고 매달려서도 안 된다. 아프지만 참고 살아가야 한다. 왜? 다시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으므로. 돌아온다고 해도 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이므로.

이제까지 많은 영화를 보아왔지만 사랑의 아픔을 진솔하게, 40대의 시선에서 그린 영화를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적어도 <쎄시봉>은 그 정서를 차분하게 그리지만 울컥,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40대가 한번 정도 볼만하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의 안타까움을 먼 발취에서 돌아볼 수 있는 나이, 이제는 인생을 사색할 수 있는 나이에 볼 만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나에게 <쎄시봉>은 잘 만든 음악 영화라기보다 엇갈린 사랑의 아픔을 40대의 시선으로 돌아보게 만든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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