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백한 갑을 관계입니다. 그런데 ‘을’ 지위를 인정받는 것도 참 힘드네요.”

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연기자노조) 사무차장은 27일 서울 여의도 연기자노조 사무실에서 미디어오늘과 만나 “당연한 관계이지만 이를 법적으로 인정받기에는 정말 많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연기자노조는 지난 2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단체교섭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중앙노동위원회와 KBS의 주장을 뒤엎고 KBS와 별도 교섭을 진행할 수 있는 노동자로 인정 받는 판결을 받았다. 

1988년 설립된 연기자노조는 TV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기자·코미디언·성우·연극인·무술인 등이 속한 노동조합으로 방송사와 꾸준히 임금·단체 협상 등을 진행해왔다. KBS가 이 협상을 다시 할 수 없다고 발뺌한 것은 지난해 2012년이었다. 

단일노조 체계에서 복수노조 체계로 바뀌면서 KBS는 연기자노조와 교섭을 차일피일 미뤘다. 연기자노조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교섭창구 분리를 신청했다. 사실상 사용자 위치에 있는 PD 등과 같은 위치에서 교섭을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 한국방송연기자노조가 2012년 12월 서울 여의도 광장 등에서 촬영 거부 선언 출정식을 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지노위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KBS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KBS는 한 발 더 나아가 연기자노조가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할 노동자 자격이 안 된다는 취지로 중앙노동위원회에 판단을 물었다. 이번 판결은 중앙노동위원회와 1심 판결을 뒤집고 연기자노조가 KBS와 교섭할 수 있는 노동자로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25년 동안 인정받았던 연기자의 노동자성이 한 순간 뒤집혔다가 바로 잡힌 판결이었다. 연기자노조가 이전과 달리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 그러니까 연기자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할 경우 출연료는 개인 간 거래로 취급돼 민사소송으로 간다. 이런 상황에선 출연료를 받을 길을 요원해 진다. 

방송가에서 출연료를 지급받지 못하는 건 다반사였다. 문화전문회사 설립이 용인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연기자들이 연기를 하고 방송이 된 후라도 출연료는 한 푼도 못 받는 상황이 발생한다. 

“문화전문회사가 설립되면서 제작 환경은 좋아진 거 같아요. 하지만 연기자 입장에서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는 거죠. 이런 회사들이 유한회사다보니 촬영이 끝나면 사라져요. 출연료는 방송을 기준으로 1~2개월 뒤에 통장에 입금이 되는데 그 사이에 ‘먹튀’해버리는 회사를 구조적으로 만들어 주는 거죠.”

지난해 1월 방송됐던 <감격시대>(KBS2), 2013년 9월 종영된 <아들 녀석들>(MBC) 등도 비슷한 경우다. <아들 녀석들> 제작사는 출연료와 작가료를 떼먹고 잠적했으며 <감격시대>는 연기자에게 출연료를 지급하지 않았다. 각 드라마는 MBC나 외주제작사가 출연료를 60~80% 선에서 지급하는 걸로 끝맺었다. 그나마 연기자노조에 소속된 연기자들만이 받는 ‘혜택’이다. 

송창곤 사무차장은 “방송사가 외주제작사에 잔금을 치르기 전 출연료 완납증을 제출하도록 제도화하고 있지만 안 지켜지는 경우가 더 많다”며 “외주제작사도 현금유동성 때문에 사정이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일한 대가는 받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 연기자 나문희씨가 2013년 6월 한국방송연기자노조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MBC 드라마 <아들 녀석들> 출연료 미지급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미디어오늘
 

 

하지만 노사 관계를 인정받기 위한 준비도 힘들었다. 송창곤 사무차장은 “법적인 판단을 받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구체화된 자료가 없었다”며 “국가 브랜드로도 내세우는 한류의 한 축인데 그 안에 연기자의 지위는 땅바닥에 붙은 것과 다름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재판부는 드라마 촬영 현장 검증을 결정했다. 현장에서 이뤄지는 방송사와 연기자의 관계를 지켜보고 법적인 판단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연기자의 대본 입수 △대본연습-촬영 진행 △촬영스튜디오 내에서의 현장진행자(FD)와 연출감독(PD)의 촬영 지시와 동선 체크 △의상 준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KBS와 연기자가 사용종속관계에 있다고 판결했다. 

고법 재판부는 또 사업장 내에서 현격한 근로조건과 고용형태의 차이 등을 고려해 교섭단위를 분리할 수 있도록 한 노동조합법을 근거로 연기자노조가 교섭단위 분리를 신청할 수 있는 노동자 위치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2심 판결이 났지만 최종심은 아니다. 중앙노동위원회가 2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으로 상고할 가능성도 있다. 대법원의 판결이 고법 판결을 뒤집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희망을 걸어보지만 지금까지 사법부의 판단이 오락가락한 적이 많아 연기자노조도 걱정이다. 

   
▲ 송창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차장. 사진=한국방송연기자노조
 

송창곤 사무차장은 그러면서 “콘텐츠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며 이번 판결에 의미를 부였다. 

“‘부상 투혼’이라고 하는 데, 촬영 중에 다쳤으면 병원에 가는 게 정상아닌가요? 며칠 밤새면서 드라마 만드는 게 더 이상 자랑은 아닌 시대가 돼야 합니다. 좋은 작품을 위해 좋은 연기를 위해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이번 고법 판결이 끝일지, 대법원 판결로 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조금씩 양보하고 대화해서 안전 장치를 만들어 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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