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사에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작품들이 꽤 많다. 일제강점기 시대 조선영화의 예술성과 배우의 스타성을 아우른 <아리랑>(1926년, 나운규 감독 겸 주연)이 그렇고, 배우 탕웨이와 감독 김태용의 오작교가 된 리메이크 영화의 원작 <만추>(1966년, 이만희 감독)가 그렇다.

필름이 영화를 담던 옛날에는 개봉관에서 지방 동시상영관까지 도는 동안 몇 년씩 걸리기도 했고, 상영과정에서 낡은 영사기에 걸려 스크래치 투성이가 되고 나서도 남은 필름들은 밀짚모자 테두리 장식으로 재활용되곤 했다. <오발탄>(1961년, 유현목 감독)처럼 국내에는 검열 때문에 필름이 사라졌는데 외국영화제에 출품했던 자막본을 찾아 복각하게 되는 건 아주 큰 경사다.

그런 큰 경사가 올해 두 번이나 있었다. 그것도 둘 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당대 사회 현실을 담은 작품들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아동영화인 <수업료>(1940년, 최인규 감독)와 한국흑백영화 가운데 최고의 흥행작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 김수용 감독)가 각각 중국과 대만에서 발굴된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니 참말로 맑았습니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 있을까요?”

읽기만 해도 이 글을 쓴 사람이 얼마나 슬픈 상태에 있는 지 가슴 울컥하게 만드는 주인공은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하늘’은 보통 꿈, 희망, 미래를 떠오르게 하는 대상인데, 열한 살 아이가 흐린 하늘도 아니고, 비오는 하늘도 아닌 참으로 맑은 하늘을 보며 그곳에도 ‘슬픔’이 있을지를 생각하며 일기에 적었고, 그 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바로 <저 하늘에도 슬픔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1965년, 컬러영화도 있고, 흑백영화도 있던 시대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잿더미가 되었던 나라가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먹고 살기 힘들던 그 때, 이윤복이라는 아이의 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가뜩이나 가난한데 노름에 빠진 아버지의 학대에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린 상황에서 맏이인 윤복이는 푼돈이나마 벌어서 동생들을 보살피며 살아가기 위해 구두닦이로 나서고, 여동생은 다방에서 어른들에게 껌을 팔아 보태지만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 형편이었다.

   
▲ 영화 <수업료>(왼쪽) 스틸컷과 <저 하늘에도 슬픔이>(오른쪽) 스틸컷
 

그 힘들고 서러운 마음을 일기에 털어놓은 윤복이의 일기를 읽은 학교 선생님이 나서서 출판을 하게 되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김수용 감독도 이윤복의 일기가 출판되자 그 사연을 읽었고, 흑백영화로 만들어 1965년 국제극장에서 개봉해 서울에서만 관객 28만 5천여 명을 불러 모았다. 이 기록은 흑백영화로는 역대 최고로 기록되지만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오랫동안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대만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중국영화로 분류돼 있던 ‘추상촌초심’(秋霜寸草心)이라는 영화가 바로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디지털로 복각되어 ‘한국영상자료원 창립 40주년 기념영화제’에서 상영될 수 있게 된 것이 올해 봄의 일이었다.

이어서 또 다른 영화가 발견되었다. 중국전영자료관에서 최인규 감독의 1940년 작품 <수업료>를 찾게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에 나라도 잃고 부모도 잃은 고아의 이야기를 담은 최인규 감독의 세 번째 작품 <집없는 천사>가 2004년에 발굴되었고, 한국영화사에 기록된 최초의 아동영화인 <수업료>도 10년만에 발굴됐다.

<수업료>가 개봉되었던 1940년 무렵에는 관객수가 정확한 수치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시 ‘공전의 활황’을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걸로 미루어 볼 때, 이 영화가 식민지 조선 관객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업료> 역시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마찬가지로 영화의 원작이 된 것은 <경성일보>의 ‘경일소학생신문’ 공모에서 조선총독상을 받은 소학교 4학년 학생의 작문이었다. 부모는 행상을 떠나고 할머니는 병치레하는 수원에 사는 소학교 학생이 수업료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자, 평택에 있는 큰집까지 혼자 걸어가 수업료를 얻어온다는 내용이다.

하루 전부터 떠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새벽부터 길을 떠나 우마차도 얻어 타고 주막집에서 물도 얻어먹으며 숲속 길을 홀로 멀고 먼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는 장면에서 아이는 앳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일본 군가인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를 부르는 아이는 그 당시에는 일본이 조국인 줄 알아야한다고 배웠을 것이고, 무서울 때 군가를 부르면 일본이 지켜줄 줄 알았을 것이고, 식민지 조선의 관객들은 어린아이가 수업료를 구하기 위해 먼 길을 걷다가 그렇게 일본 군가를 부르는 장면을 보며 독립을 이루게 되면 다시는 아이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밥 먹듯이 끼니를 거르는 아이가 설날, 집세를 내지 못해 시외의 움막집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보던 1960년대 관객들도 가정 폭력과 가난 때문에 아이들이 공부가 아니라 생계를 걱정하는 세상이 다시는 없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살만큼 살게 된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수업료를 걱정하고, 먹을 것을 걱정하는 아이들이 있다. ‘무상교육’과 ‘무상급식’이 마치 불온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여전히 아이들은 공부할 기회에서 밀려나고 있다.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다음의 팍팍한 세상도 아닌데, 아이들에게 교육과 급식만큼은 나라가,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보장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수업료>나 <저 하늘에도 슬픔이>가 영화사에 남는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 되지 않아야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늘을 보며 슬픔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세상이 되어야한다. 하필 이 시기에 이 영화들이 발굴되어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실화를 바탕으로 가난과 불행 때문에 고통 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영화를 통해 이제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역사의 가르침이 아닐까?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