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 오전 10시15분께 대전월드컵경기장. 세월호 참사로 막내아들을 잃은 두 아버지가 십자가를 메고 800km(2천리)를 걸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무도 지지 않는 십자가, 우리라도 지겠다”며 단원고 2학년8반 고 이승현 군의 아버지 이호진(56)씨와 2학년4반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52)씨가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를 출발한 지 38일 만이다. 전남 진도 팽목항을 거쳐 대전 월드컵경기장까지 하루 20~30km씩 걷는 고된 여정이었다. 이날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부둥켜안았다. 고맙고, 미안했던 그 수많은 순간들을 표현할 말을 찾을 수 없었으리라. 그 시간들을 두 아버지와 함께 걷고 먹으며 밤을 지새웠던 나도 울컥했다.

7월8일 순례 첫날 유가족 순례단은 단출했다. 길잡이도, 의료 지원자도 없이 고작 6명(<한겨레21> 기자 2명 포함)이었다. 오후 4시 안산에서 출발한 순례단은 밤 10시에 가까워서야 첫날 목적지인 경기도 화성시 면목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 앉은 낯선 마을에서 잘 곳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허름한 모텔에 몸을 뉘었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차마 내뱉지 못했지만 나는 묻고 싶었다. <한겨레21> 페이스북에 그 막막한 마음을 적었다. 도움을 주고 싶다면 연락해달라며 내 휴대전화 번호도 남겼다.

그 순간부터 휴대전화는 불이 났다. 함께 걷겠다고, 함께 먹겠다고, 함께 자겠다고 난리였다. 물품을 날짜·지역별로 분류하는 게 자연스레 내 몫이 됐다. 그날그날 일정을 결정하고 공지하는 일도 해야 했다. 시·군 경계가 바뀔 때마다 경찰은 전화해 순찰차를 언제, 어디로 보낼지 물었다. 언론들도 두 아버지와 인터뷰하고 싶다며 찾았다. 나는 순례단의 ‘로드매니저’가 돼 버렸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 아버지와 함께 걸으러 온 사람들은 어느새 각자의 십자가를 찾아 나눠지고 있었다. 신부들은 교통을 통제하고 수녀들은 깃발을 들었다. 노동자와 작가들은 순례단의 짐을 차량에 싣고 앞장서서 호위했다. 아이쿱생협과 한살림은 아침과 점심을 준비했다. 중고생들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웅기군 아버지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들어줬다. 전국에서 함께 걸으러 온 수많은 동행자가 바로 그 시몬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께 내디딘 발걸음은 ‘작은 기적’을 낳았다. 두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길 꿈꾸며 대전 월드컵경기장으로 향해 걸었다. 하지만 당시 교황과의 만남은 물론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성모승천대축일 미사에 참석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유가족 순례단과 함께 걷는 동행자가 500명을 넘고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적극 후원하면서 두 아버지의 꿈은 현실이 됐다.

   
 

8월15일 교황을 만났을 때 두 아버지는 길 위에서 짊어졌던 길이 130cm, 무게 6kg 십자가를 전달하며 “(세월호 참사로) 억울하게 죽은 304명의 영혼과 고통이 함께 있다”고 말했다. 십자가에는 ‘304명의 착한 영혼을 위하여 아이들의 소중한 씨앗이 세상에 뿌리내리기를’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전북지역을 함께 걸은 안도현 시인의 솜씨였다. 교황은 십자가를 바티칸으로 가져갔다.

승현군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례를 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그는 “교리를 배우지 않았지만 2천리 180만보를 한발 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디뎠다”며 세례를 청했고 교황은 흔쾌히 승낙했다. 세례식은 8월17일 아침 7시께 주한 교황대사관에서 열렸다. 

여럿이 함께 걸어 만들어낸 길 위에서, 지난 여름 나는 취재하고 기사 쓰며 행복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