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후손들이 알까모르것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

관객 신기록을 날마다 경신하고 있는 영화 ‘명량’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온 대사입니다. 어느 비평가는 감독의 ‘노골적 의도’가 보인다며 거부감을 드러냈더군요. 이형은 어떠셨는지요. 저는 김한민 감독 쪽입니다. 물론, 의도는 보이지요. 하지만 의도 없는 영화 대사가 있기나 한 걸까요. 저에겐 이 부박한 시대에 그 투박한 정직함이 드문 미덕으로 다가옵니다.

제가 그 대목을 평가하는 이유는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호로자식’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아비도 모르는 자식’ 소리 들을 만큼 싹수없는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적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 대화는 우리의 무뎌진 역사의식, 둔감한 사회의식을 단숨에 깨워줍니다.

이순신.

세계 해전사에서 그와 견줄 이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명장입니다. 영화 ‘명량’은 장군으로서 이순신만이 아니라 인간 이순신을 그려내는 데도 돋보였지요.

물론, 이순신의 성취는 혼자만의 업적은 아닙니다. 장군을 도운 숱한 민중이 있었지요. 실제로 명량이 ‘울돌목’으로 불릴 만큼 바닷물 흐름이 빠른 곳임을 이순신에게 가르쳐준 이도 그곳에 터 잡고 오랜 세월 자자손손 이어온 어부였습니다. 이순신이 진격할 때 그 아래서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내 전함의 노를 저은 격군도 민중이었지요. ‘개고생’은 ‘어려운 일이나 고비가 닥쳐 톡톡히 겪는 고생’을 이르는 순우리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바닷물에 산채로 수장됐을까요. 바로 그렇게 우리 선인들은, ‘개고생 아비들’은, 왜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강연 때마다 젊은이들에게 툭 던져온 질문이지만, 이순신을 낳은 조선의 해군은 그로부터 300여 년 뒤 정작 나라가 망할 때 무엇을 했던가요? 이순신과 그를 중심으로 뭉친 ‘개고생 아비들’이 애면글면 지켜낸 조선은 결국 다시 온 왜적에게 ‘정규 전쟁’도 없이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불편하겠지만 우리 진실을 마주합시다. ‘호로자식’들 아닐까요. 물론, 1890년대와 1900년대를 살아간 모든 이를 그렇게 ‘정죄’한다면, 그야말로 ‘호로자식’이겠지요. 골골샅샅에서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으니까요. 문제는 바로 그 의병들을 살천스레 ‘비도’로 몰아친 자들입니다. 누구일까요.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한 귀퉁이에서 ‘단물’을 빨아먹고 있던 권문세가들이고, 그들을 대변한 언론인들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독립신문이 의병을 ‘의병’으로 보도하지 않았지요. 독립신문은 의병을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무리’라는 뜻의 ‘비도’로 기사화했습니다. ‘비도 7놈을 죽였다’는 따위로 서슴없이 ‘놈’으로 몰아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바로 그 신문의 창간기념일이 지금 우리가 기념하는 ‘신문의 날’입니다.

이형. 생각해봅시다. 과연 이순신은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그가 온 몸으로 지켜낸 나라가 300여 년 뒤 바로 그 적들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을. 그것도 모자라 다시 분단된 채 남과 북이 300만 명을 서로 죽이는 전쟁을 벌일 사실을. 휴전 뒤에도 내내 적대시해오는 꼴불견을. 그나마 남쪽은 다시 동서로 나누어 명량의 개고생 한 후손들을 암암리에 차별하는 오늘을. 장군이 민중과 더불어 눈부시게 승전한 울돌목 바다 바로 옆에서 폭우는 물론 바람조차 불지 않던 청명한 날에 수백 여 명의 청소년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실을. 그 진상을 규명하자는 일에 권력이 언구럭부리며 유족들을 조롱하는 오늘을.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 울돌목. 명량의 그 바닷소리에서 2014년 오늘, 영화 명량이 1500만 명을 돌파하는 지금, 이순신의 피울음, 장군의 통곡을 듣는 까닭입니다.

참으로 못난 후손들이지요. ‘아비도 모르는 자식들’이라는 1590년대 어느 민중의 ‘예언’이 적중해온 셈입니다.

이형. 명장의 심장이 멎은 뒤 400여년이 흘렀습니다. 나라가 동강 난 이 꼴 되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순신을 죽였던가요.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숱한 인재를 질시하고 모함해온 역사의 귀결이 아닐까요.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이념과 지역, 세대 차이를 떠나 모든 영역에 걸쳐 ‘이순신’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라가 기우는 소리,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소리, 자살하는 비정규직·실직자들의 최후 소리, 저 육중한 진보세력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소리’들은 또 어떤가요. 그 또한 울돌목의 피울음 아닐까요.

   
▲ 손석춘 언론인
 
더구나 일본의 아베 정권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국립 서울대의 교수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장서서 전파하는 나라에 우리 ‘후손’으로 살고 있습니다.

청천하늘 잔별처럼 많았을 개고생 민중의 통곡을 담아 꾹꾹 눌러 다시 쓰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개고생 한 걸 후손들이 알까모르것네.”
“모르면 호로 자식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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