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 = 김어준 총수.”

딴지일보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등식에 동의할 것이다. 아니, 적어도 김어준이라는 이름을 들어보기라도 했다면 이 등식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등식의 시효는 작년 말까지다. 이제 딴지일보와 동일 선상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김어준 총수가 아니다.

그의 창업 동지, 김도균 편집장딴지일보를 대표한다. “이제 총수는 대외적인 비지니스에 집중한다. 이전에 총수는 딴지일보 하나만 책임지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사업을 확장해 가는 중이어서 나름대로 바쁘다. 그래서 나에게 편집장의 자리가 주어졌다. 지난 해 말부터 편집장 일을 보기 시작했다.”

김도균씨는 평범한 대학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엽기 발랄한 글들을 써내는 그의 행적에서는 전혀 그런 낌새를 눈치챌 수 없지만 말이다. “남들은 이런 곳에서 일한다고 하면 뭔가 특별한 경력을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난, 아주 평범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그가 딴지일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김어준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통신에서 만났다. 통신에 올라온 서로의 글을 보며 ‘이놈 글 좀 쓰네’하며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형·동생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딴지일보의 창간 멤버이기도 한 그가 지금까지 줄곧 이 일에만 매달렸던 건 아니다. “처음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한 때가 아니었나 싶다. IMF시기에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양복입고 출장 다니고 그랬으니깐. 하지만 그때 매일 같이 총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시 자기와 같이 일하자고. 이제는 사정이 나아져서 월급도 준다고 했다.”

그는 편안한 직장생활이 싫었다고 한다. “월급준다고 해서 다니던 직장 그만둔 것은 아니다. 월급은 다니던 직장에 비해 절반도 안됐으니깐. 그나마 한달 걸러서 주곤 했으니…. 그냥, 뻔히 보이는 앞날이 싫었다. 직장은 편하고 돈도 많이 줬지만 이렇게 편한 곳에 있으면 평생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단계 단계가 뻔히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편안함과 정해진 인생의 길이 싫어 다시 김어준 총수와 호흡을 맞추게 된 그이지만 이제 그 누구보다도 딴지일보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보물이 된 듯하다. “내 인생의 95%는 딴지일보에 투자하고 있다. 집이 20분 거리도 되지 않는데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 들른다. 그것도 옷가지 챙기러.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아직은 이곳에서의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딴지일보의 편집장 김도균씨는 김어준 총수가 만들어 놓은 플러스 요인은 그대로 이어받고,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한다.

“사실, 총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좋지만 일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지는 못한다. 늦어지면 그만이고 안 하면 그만이다. 지금이 그런 시점일 수도 있다. 거기에 내가 할 일이 있다. 딴지일보의 패러디 형식은 처음 시도되는 것이어서 많은 반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 패러디이다. 지속적으로 컨텐츠를 확보하고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한다. 딴지일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다.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금밟기라 생각한다. 조금씩 밟아 나가면서 서서히 영역을 넓혀 나갈 생각이다.”

총수의 끈기 없음과 ‘조폭’적 조직운영에 살며시 똥침(?)을 날리는 김도균 편집장. 스트레스를 행주 빨기로 해결한다는 그이다. 이제 그가 만들어 나가는 딴지일보가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말끔히 닦아주는 행주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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