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금수공화국 (禽獸共和國)

서해훼리호의 변침(變針) ①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추풍령(秋風嶺) 언저리에서 갈라져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노령산맥(蘆嶺山脈)이 곡창지대인 전북 김제시와 정읍시의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서해와 만나는 곳이 변산반도(邊山半島)다.
노령산맥이 변산반도에 다다르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 등줄기엔 김제의 모악산(母岳山), 정읍의 내장산(內藏山), 부안의 변산(邊山)도 솟아 있다. 그 광활한 젖가슴에서 ‘징게 맹경 외애밋들’의 황금 들녘을 촉촉이 적셔 온 만경강과 동진강도 흘러나온다.

낭주골 부안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변산반도는 ‘바깥 변산’과 ‘안 변산’으로 나뉜다. ‘변산반도’라는 지명을 잉태한 변산은 그 옛날 풍수지리 전문가들이 훌륭한 피난처로 정해 놓은 우리나라 ‘십승지지’ 가운데 한 곳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엔 “변산의 바깥은 소금을 굽고 고기잡이에 알맞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이 많아 농사짓기에 알맞다”고 적혀 있다. “주민들이 산에 오르면 나무를 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일을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고 덧붙였다.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있어 넉넉한 땅 변산반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변산반도의 끝머리엔 채석강(彩石江)과 적벽강(赤壁江)으로 유명한 격포항(格浦港)이 자리잡고 있다.

채석강은 격포항 오른쪽의 닭이봉 아래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한 절벽으로 특히 유명하다. 억겁의 세월 동안 바닷물이 빚어 켜켜이 쌓아 놓은 퇴적암층을 일컬어 ‘채석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당나라의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기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전해 온다.

닭이봉 아래로 걸어서 내려가면 파도와 세월로 깎아내고, 까마득한 날의 전설로 다듬어 놓은 채석강의 절경이 펼쳐진다. 그 기암괴석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작지만 아담한 격포해수욕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1999년 12월31일, 정부 행사인 새천년 맞이 해넘이 축제가 열렸다. 이날 20세기 마지막 해넘이 축제장에서 채화된 ‘영원의 불씨’는 갈대의 일종인 띠풀로 만들어진 띠배에 점화 되었다. 이 날 띄운 띠배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인 위도띠뱃놀이 때 사용하던 띠배를 본떠 만든 것이었다.

천년의 액을 가득 실은 띠배는 영원의 불씨로 지핀 불꽃이 닿자마자 활활 타올랐다. 잠시 뒤, 차가운 겨울바다로 흩어져 내리는 묵중한 어둠을 한입 두입 베어 물기 시작하는 칠산바다 위로 서서히 사라졌다.
약 2년 뒤인 2002년 10월9일 해 질 녘, 칠산바다 한 복판에 떠 있는 고슴도치 섬 위도(蝟島)로 가는 바닷길의 해걷이바람은 다소 거칠었다. 격포항에서 빠져 나온 개양카훼리호가 위도와 격포의 중간쯤에 위치한 임수도(臨水島) 근처에 다다르자 거친 해걷이바람에 놀란 물결이 하얀색 포말을 숨 가쁘게 뿜어냈다. 그 포말의 일부는 개양카훼리호 갑판 위로 간간이 뛰어 들었다.

임수도 부근의 해역은 심청전(沈淸傳)의 주인공인 효녀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고 뛰어 든 인당수(印塘水)라는 주장이 이미 오래 전에 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바 있다.

그 주장에 따르면, 심청은 전남 곡성군 오곡면 송정리에서 태어난 실존 인물이다. 중국 상인에게 팔려 고향인 곡성을 떠난 심청은 섬진강을 따라 완도군 금일도로 나와서 대형 상선으로 갈아탄 뒤 위도의 임수도 해역에서 몸을 던졌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다는 임수도는 원래 ‘인수도’로 불렸다는데, 오늘날엔 ‘임수도’로 불리고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임수도 인근은 암초도 많고, 물살이 거칠고 험하다. 그런데다 해무(海霧)가 자주 끼어 해난 사고가 잦은 곳이다. 바로 이 임수도 근해에서 1993년 10월10일 오전 10시, 292명의 생명을 앗아간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임수도를 지나 위도의 관문 파장금(波長金)항을 향해 더딘 걸음을 재촉하는 개양카훼리호 2층 갑판 위엔 30대 후반의 남자가 한명 서 있다. 키는 175㎝ 정도로 보이고, 야윈 편이다. 검은색 뿔테 안경 너머의 작은 눈동자는 맑고 촉촉해 보인다. 취기가 잔뜩 오른 눈망울엔 슬픔과 고뇌가 가득 고여 있다.

개양카훼리호가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지점에 이르자 그는 반병쯤 남은 소주를 병째 들이 마셨다. 그러더니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2층 갑판 가장자리를 두른 철재 난간을 붙들고 선 그의 뒤태가 심상치 않다. 아무래도 292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그 죽음의 바다로 뛰어내릴 성싶었다.

그의 시선은 식도(食島) 너머 저 멀리 수평선 근처에 떠 있는 왕등도(旺嶝島)를 향하고 있다. 그의 눈동자에서는 왕등도 뒤편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는 석양빛에 그을린 섬뜩한 광채가 번뜩거렸다.

“어머니! 아버지! 흐윽!....동해야!....”

개양할미의 전설이 깃든 칠산바다 한복판을 미끄러져가는 여객선 갑판 위에 홀로 서서 남몰래 울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동녘아!....옥자야!...흐으윽!...”

비장한 그의 눈빛과는 달리 나지막한 소리로 부모를 부르고 처자식의 이름을 나열하는 그의 입에서는 술기운에 범벅된 슬픔이 쏟아져 나왔다.

입술을 깨물며 그는 결심을 굳히는 듯 했다. 중국 상선을 타고 가다 이곳 인당수에 뛰어들었다던 심청처럼 그도 갑판 위의 철재 난간만 훌쩍 뛰어 넘으면 임수도의 천길 물길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왕등도 낙조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물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을 언제든지 집어 삼킬 기세로 하얀 게거품을 물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임수도의 사나운 삼각파도를 주시하다가 눈을 질근 감았다.

그가 철재 난간 하단에 한 쪽 다리를 올리고 서서 다시 고민에 빠져드는 참인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오 집에 오냐?”

조희오는 뒤를 돌아보았다.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50대 후반의 아낙은 다름 아닌 신궁자였다.

“아니 이모! 육지 갔다 오시요?”

“어, 너그 이모부 제사가 얼매 남지 않아서 지찬 좀 장만허러 부안엘 댕겨오는디, 넌 어쩐 일이냐? 오랜만에 집에 오는 것 같은디?”

“별일은 없고요. 지난 추석 때도 못 오고, 어머니 제삿날도 오지 못해서 어머니 산소에 술이나 한 잔 올릴라고 왔네요.”

개양카훼리호의 선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탓도 있겠지만 술이 많이 취한 희오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잰걸음으로 달려든 궁자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희오의 팔뚝을 붙들었다.
신궁자.

친이모는 아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친동생처럼 여겨 조희오는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왔다. 궁자도 늘 희오를 친조카처럼 여겼다.

철재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선 희오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연신 켜보지만 세찬 바닷바람에 담뱃불을 붙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불을 붙인 희오는 담배 연기를 한 모금 깊게 빨아서 가쁘게 내뿜었다.

희오의 얼굴은 아직 앳되지만 세상의 모든 근심을 죄다 짊어진 양 축 처진 양쪽 어깨는 무거워 보였다. 담배 연기에 뒤섞인 깊은 한숨엔 숨길 수 없는 살기(殺氣)가 진하게 묻어 있는 듯 했다. 이 때문인지 궁자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당황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조희오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신궁자는 잠시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넉 오메 제사가 음력 팔월 스무 난 날 아녀?

“예, 양력으론 10월9일인 오늘이 아홉 번째 기일입니다만 어머니 제사는 음력으로 모시고 있어 음력 팔월 스무 나흗날인 지난 주 월요일이 기일이었네요.”

“그려? 참 나! 이모라는 작자가 지 먹고 살기가 바쁘다고 너그 집이 어떡기 돌아가는지 신경을 못 써 입이 열 개라도 헐 말이 없다만 넉 오메 제사는 너그 성 희진이가 계속 지내지야?”

“예, 희진이 형님이 큰 아들이라 어머니 제사도 아버지 제사도 모시고 있습니다만...”

말끝에 한숨을 잔뜩 찍어 바른 희오의 대답을 듣자, 궁자는 더 이상 질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희오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식도 뒤편의 거북바위 쪽을 바라보았다.

“동핸가 고놈이 살았으면 시방 열 두세 살은 안 됐겄냐?”

불쑥 내뱉은 궁자의 질문에 희오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희오의 눈엔 순식간에 핏발이 돋아
났다.

영혼의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선지 희오는 담배를 쭉쭉 빨아댔다. 어느새 담뱃불은 필터까지 태울 지경이었다. 필터 앞에 남은 담뱃불을 검지로 힘 있게 툭툭 털어 낸 희오는 담배꽁초를 엄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바다에 튕겨 날렸다. 그런 다음 볼을 흠뻑 적시고 있는 눈물을 손바닥으로 연신 훔치며 거북바위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희오는 소주병에 남아 있던 술을, 병나발을 불어서 마저 다 마신 뒤, 빈 소주병도 바다에 내던졌다. 눈에 칼을 세우고 오만상을 다 찌푸리더니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수백 번은 꿈속에 나타났을, 9년 전 서해훼리호 참사 때의 참혹했던 잔상들이 또 다시 머릿속에서 펼쳐지자 희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렸다.

노령산맥의 꼬리가 바다 속에서 헤엄쳐 나와 섬이 되었다는 위도.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위도’의 한자 표기로 ‘고슴도치 위(蝟)’와 ‘섬 도(島)’를 써왔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근거해서 ‘고슴도치 모양을 닮은 섬’이라는 뜻에서 ‘위도’라는 지명이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항공사진을 찍을 수도 없던 그 옛날 옛적에 어떻게 결코 작지 않은 섬의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12세기 초, 서긍이 배를 타고 전라남도 흑산도 쪽에서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멀리서 바라 본 위도의 모양이 고슴도치를 연상 시켰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조희오의 먼 삼촌뻘인 김만수의 탯줄이 묻혀 있는 작은 딴치도 등의 모습이 고슴도치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서긍이 위도가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위도의 지명 유래에 대한 연구와 논의는 좀 더 필요하겠지만 고슴도치 섬인 위도엔 식도(食島)라는 딸린 섬도 있다. 식도는 고슴도치의 입 앞에 위치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위도 사람들은 이 섬을 ‘고슴도치의 밥이 되는 섬’이라는 뜻에서 ‘식도’로 불러온 듯하다.

두 개의 섬이 이어져 있는 듯한 식도엔 까마귀산이 있다. 오산(烏山)이라고도 하는 이 까마귀산의 정상은 그 옛날 봉홧불을 피워 올렸다고 해서 ‘봉우재’라 불린다. 봉우재에서 올린 봉홧불은 임수도 건너 고군산(古群山) 일대에서 확인했다고 전해 온다.

까마귀산 정상인 봉우재에 오르면 고군산 방향으로 헤엄쳐 가고 있는 것 같은 두 개의 바위섬이 눈에 띈다. 하나는 지네 모양의 ‘지여’이고, 또 하나는 거북이 모양의 ‘거북바위’다. 손바닥만 한 작은 무인도인 이 두 개의 바위섬은 언뜻 보면 지네 형상인 지여가 거북이 형상의 거북바위를 뒤쫓고 있는 것 같다.

‘수리바우’라고도 불리는 거북바위의 머리에 해당 되는 앞부분은 육지, 정확하게 말해서 고군산 군도(群
島)를 향하고 있다. 꽁무니에 해당되는 뒷부분은 식도 쪽을 향해 꼬리를 내리고 있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있는 거북바위는 수 천, 수만 년 동안 임수도의 거친 물살을 헤치고 뭍으로 달아나려고 단 1초도 쉬지 않고 헤엄을 쳤을 것 같다. 고슴도치가 ‘밥섬’ 식도를 다 먹어치우고 나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것이라고 걱정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까마귀산의 까마귀와 지여의 지네가 끊임없이 괴롭히는 통에 차라리 멀리 달아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허우적 허우적 용을 쓰며 육지로 달아나려고 시도했을 거북바위의 꿈은 오랜 세월 동안 미몽(迷夢)에 그치고 말았으리라.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엔 적벽강이 있다. 채석강 못지않은 절경을 자랑하는 적벽강의 용두암, 다시 말해 사자바위 위엔 여해신(女海神) 개양할미를 모시고 있는 당집인 수성당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수성당 할머니인 개양할미는 아득한 옛날에 수성당 옆 ‘여울골’에서 나와 서해 바다를 열었다고 한다. 어찌나 키가 크던지 굽이 있는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이 물에 젖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개양할미의 도움을 받아 칠산바다가 오늘의 형상을 갖춘 이후부터 지금까지 거북바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붙박고 떠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헤엄을 쳐서 단 한 뼘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거북바위는 헛된 꿈만 부질없이 꾸며 긴긴 세월을 보낸 셈이다.

어느 때 부턴가 거북바위는 고슴도치 섬 위도의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맘에 들어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기로 작심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위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멀리 달아나고 싶은 생각을 아예 지워 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있어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무섭지 않아서 말이다.

어쨌거나 그 거북바위 덕분에 9년 전 이맘 때 희오는 천추의 한을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

“동해야!...흑흑!...동해야!....흑흑흑!....”

설움이 북받쳐 자꾸 숨을 거칠게 내쉬며 울고 있는 희오의 머릿속엔 서해훼리호 참사 때 바다에서 인양해 거북바위에 올려놓았던 세 살배기 동해의 주검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동해는 희오의 큰 아들이었다. 1991년 11월생인 사내 아이 동해는 친할머니인 희오 어머니와 함께 서해훼리호를 타고 격포로 나오다가 변을 당했다.

당시 희오는 아내와 함께 격포항 방파제에서 좌판을 깔고 낙지와 해삼 등 해산물을 파는 장사를 했다.

이 때문에 희오 어머니는 손자인 동해를 위도에서 맡아 키웠다. 동해가 감기에 걸려 몇날 몇일을 심하게 앓자 병원에 입원 시킬 요량으로 어머니가 데리고 격포로 나오다가 그만 서해훼리호 참사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손주 동해와 함께.

임수도와 위도 사이의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에 서해훼리호와 함께 수장되었던 동해의 시신은 사고 발생 11일 만에 거북바위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뻘 속에 박힌 선체에서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시신 보다 먼저 발견됐다.

배가 표류하는 과정에서 바위에 부딪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바다 속 어패류의 공격을 받아서 그랬는지 한 쪽 눈은 심하게 훼손돼 있었고, 코도 뭉개져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귀는 완전히 잘려 나갔고 왼쪽 귀는 반쯤 남아 있었다.

거북바위 몸통 쪽의 넓적한 바위 위에 뉘어 있던 동해의 시신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희오의 아내 김옥자는 기절하고 말았다. 희오 역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지만 아들의 주검을 수습한 다음 한 시라도 빨리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야 된다는 생각 하나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희오는 개양카훼리호 2층 갑판의 철재 난간 중간에 오른 발을 올렸다. 드디어 이 험한 세상을 더 이상 살 가치가 없고, 더 이상 살아갈 자신도 없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런 결론에 이르게 된 데는 격포에서부터 마시기 시작한 소주의 영향도 컸겠지만 서울에서 내려 올 때부터 작정한 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희오는 위도면 대리에서 태어났다. 대리국민학교와 위도중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는 군산에서 나왔고,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다. 그의 처 김옥자는 전라남도 진도군 출신으로 두 사람은 캠퍼스 커플이었다.

1970년대 중반 추자도 근처 해상에서 고깃배 침몰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별명이 ‘꺼꾸리’여서 동네 사람들이 ‘꺼꾸리 막내아들’로 불러 온 조희오.

그의 머릿속에서는 3남1녀의 막둥이로 태어나 서른여덟의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겪었던 잊지 못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못 다한 이승의 인연 때문에 앞으로 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작은 아들 동녘이와 아내 김옥자의 얼굴이 사선(死線)에 선 희오의 눈앞을 가로 막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는 처자식의 얼굴이 술기운에 더욱 대범해진 그의 굳은 결심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아니 이 썩을 놈이 어쩔라고 이런댜! 야 이놈아, 희오야! 희오야!...”

이미 눈이 뒤집혀 철재 난간 상단으로 올라서는 희오의 허리춤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궁자는 필사적으로 그를 난간 안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놔아!...이것 놔아!...아 씨팔, 이것 노란 말여!....”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나 반세기가 넘는 모진 세월을 억척스럽게 헤쳐 온 궁자의 손등엔 벌써 좁쌀 만 한 검버섯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죽음을 향해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려는 희오의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가냘프고 쭈글쭈글한 손가락은 어쩌면 대형 크레인의 쇠줄보다 더 강한 생명줄이었다.

연약하지만 강인한 궁자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며 악다구니를 부리고 있는 희오는 흡사 섬마을의 이 고샅 저 고샅 싸돌아다니다가 쥐약을 핥아먹고 발광한 똥개 같았다. 미쳐서 날뛰는 희오가 죽음의 문턱을 넘지 못하도록 붙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궁자는 기운이 다 빠져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희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자신의 허리춤을 붙들고 있는 궁자의 양쪽 팔뚝을 움켜쥐었다.

“놔아!...이것 못 놔!...에이 씨팔년아! 이것 노란 말야!....”

이미 제 정신이 아닌 희오의 입에서 패륜의 쌍욕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궁자는 이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희오의 초인적인 완력 때문에 두 손으로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허리춤을 놓친 상태였기에 그녀의 정신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여차하면 난간을 뛰어 넘을지도 모를 희오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는 것이 급선무였다.

“희오야! 희오야!...야 이 썩을 놈아, 으디를 갈라고 이러냐!....희오야!...”

궁자가 판단하기에 희오가 다시 용을 써서 올라서려고 하는 개양훼리호 2층 갑판 위의 철제 난간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었다. 이 때문에 궁자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조카 희오를 죽을힘을 다해 붙들어야 했다. 난간 상단에 다시 또 오른발을 올리고 있는 희오를 등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바다에 뛰어들려고 난동을 부리는 조희오와 조카의 투신을 저지하려는 이모 신궁자. 두 사람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며 질러대는 괴성과 비명은 개양훼리호 기관실에서 빠져 나오는 엔진소리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 했다.

몸싸움이 벌어진 지 4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궁자가 희오를 끌어안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객실 외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궁자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희오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벌떡 일어서더니 난간 앞으로 다가섰다.

철제 난간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잠시 멈칫하며 거북바위를 응시하고 있는 희오의 몸 이곳저곳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궁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얼굴과 목, 그리고 손등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났지만 희오는 그런 상처에 신경을 쓸 정신이 아니었다.

육신의 아픔과 고통에 무뎌진 영혼이었지만 의식은 또렷해지는 듯 했다. 그 투명한 의식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뱃속에서 탯줄을 끊고 나오면서부터 머릿속에 새기기 시작한 어머니의 이미지 컷은 수십만 장, 아니 수백만 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순간 저승 어귀를 서성거리고 있는 희오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머니의 이미지 컷은 단 몇 장 뿐이었다.

서해훼리호 참사 때 큰 형제섬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던 어머니.

시신 확인과정에서 아들 희오가 하얀 천을 걷어 올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들여다 본 어머니의 얼굴은 한마디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여객선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19일 만에 발견 된 어머니의 시신은 그 형체가 얼마나 훼손되었던지 본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어머니!...흐흑!...흑흑!...”

희오는 난간 상단에 다리를 올렸다. 그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인당수의 전설이 서린 임수도 앞바다에 몸을 던졌다. 어머니의 아홉 번째 양력 제삿날, 그렇게 저승길에 뛰어들었다.
개양훼리호 2층 갑판 위에 쓰러져 의식도 없이 드러누워 있는 신궁자의 머리맡엔 선홍색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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